불꽃중앙교회에서 사기를 당했다?

바로 전 포스팅 뒤에 통계를 살피는데 14일 방문자가 평소의 두 배 가량이 되어 무슨 일인가 싶어 유입로그를 살펴보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Mobile Terminal이거나 BiteSMS 관련 유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강마리아 목사 사기 라는 검색어로 유입된 흔적이 있어 검색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링크를 따라 검색 결과를 보면서 전에 부모님께서 강목사님 교회가 어려움에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게 사기 건이었는지는 유입 로그를 통해 처음 알게 됐네요. 덕분에 목사님의 본명도 알게 되었구요.

검색 결과 중 제일 상단에 노출된 것이 **할렐루야! 빛된 예수!** – 이 사람을 보라!(수원 불꽃중앙교회 강마리아 목사를!)인데, 링크의 본문은 교회 19주년 감사 예배 사진을 메인으로 소망의 동산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기 관련 내용은 댓글에 나오는데,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시험들어 나와서 고통 받고 있다 거나 금전적으로 피해를 봐서 소송했으나 폐소했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댓글을 읽으면서 익숙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와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댓글을 적으시는 분들의 태도에 한 번 더 놀랍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기를 친 사기꾼이니 막 대해도 되는 사람들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그 분들은 댓글에 나와 있는 행동을 고의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그 분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이지요. 이단성을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판단하시는 것에 또 한 번 놀랍니다.

댓글을 쓰신 분들에 대해 정죄하는 내용을 길게 적었다가 얼른 지웠습니다. 실수는 저 같은 못난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도 실수하지요. 어떤 행동이 오해되어 실수가 된 것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아 골이 점점 깊어지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미천한 인간인지라 감히 정죄할 수 없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어떻게 심판하실지 두고 보는 수 밖에 없겠지요. 그 분들이 사기꾼이면 과연 인간의 법으로도 하나님의 법으로도 심판 받을 줄로 압니다.

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함께 기다려보지요. 세월이 흘러 흐지부지 되더라도 추적하여 올리겠습니다.

올리지는 않았지만 링크 글에 달아놓으신 댓글을 캡춰해 저장해 놓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올리게 되더라도 닉네임 등은 처리해서 올리겠지요.

내가 해야할 일은?

※ 상지대 구출 대작전에 이어 쓰려다가 혹 혼란스러워 하실 분이 계실 듯 하여 별개의 글로 작성하고 트랙백합니다.
※ 또한 상지대 관련 내용을 포스팅하는 이유는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읽으시는 분들이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사실 전부터 관련 글을 쓰려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망설였는데, 이 기회를 빌어 작성하네요. 개인적으로는 교회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밝히거나 교회가 정치 세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욕심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인데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 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 하신
바라

로마서 13장1절

교회의 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시는 분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은 그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비판하는 분들을 욕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그 분들은 신념에 따라 행동하시는 거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 행동들이 옳다 그르다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해석하는 사람의 이해에 따라 여러가지로 갈라집니다. 그로 인해 분파가 생기고 또 그 안에서 쪼개져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위의 로마서 말씀도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지 않냐는 분이 계실까 또한 조심스럽게 적었습니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나뉘는 것에 대해 말하면 또 그로 인해 싸움이 될까 싶어 명확한 것 하나만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내 뜻을 구하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장 36~39절

좁게 해석하여 예수의 희생에 대한 것이 아니냐 하시면 또한 무능하여 답할 수 없습니다.

요점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몸소 하셨듯이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현명한 행동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그렇기에 행동으로 움직여야한다는 분도 계시겠고 이런 상식도 없는 사람을 봤나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 분도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 밖에 없음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상지대 구출 대작전

산골에서 일하고 있는 중에 동참해 달라는 민노씨의 메일을 통해 소식을 접했습니다. 관련 내용은 상지대 구출 대작전 페이지희망21 프로젝트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주시고요. 다음은 참여방법입니다.

* 희망21 참여방법 *


‘희망21’ 트윗 모꼬지

http://twtmt.com/cards/4062

위 모꼬지 페이지에 참여의사 밝혀주시면 더욱 큰 힘이 됩니다!
트위터러들께선 가입 한방!

방법 1 (필수). ‘귀차니스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래 세 가지만 즐겨 노시는 게시판에, 자신의 블로그와 트위터에 옮겨주세요. 이것만 해주셔도 느무느무 고맙겠습니다. 😀

(하나)  상지대 구출대작전 블로그 http://saveschool.net트위터  http://twitter.com/saveschool 를 알려주세요!

(둘) 2010년 7월 23일(금) 상지대 지키기 촛불문화제(청계천광장 7시)에서 우리 사회에 여전히 상식이 건재함을 저 거만한 정부 여당에게 보여줍시다! 

(셋) 7월 30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 결정을 두눈 부릅뜨고 지켜봅시다! 김문기 구재단 비리인사는 상지대 이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정부 여당은 물론 야당에도 엄중한 책임을 묻겠습니다. 그리고 이 중대한 사안을 방치한 언론들에게도 그 책임을 무겁게 물을 것입니다. 


방법 2 (선택). ‘나는야 낭만주의자’  

– 가장 기뻤던 혹은 슬펐던 학창시절 에피소드 
–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 가장 기억에 남는 학교 친구

위 글감으로 글을 써주시고, 교육의 소중함을, 학교의 소중함을 되살려 주세요.

그리고 물론 방법 1. 세 가지(하나! 둘!! 셋!!!)을 더불어 옮겨주시는 것은 물론이겠죠? ^ ^
상지대 블로그와 트위터에 대한 관심, 23일의 촛불 문화제 참여, 그리고 7월 30일의 사분위 결정에 대한 엄중한 경고. 이 세가지를 꼭! 꼭! 함께 써주세요.: )

방법 3 (선택). ‘열혈네티즌과 블로거’  

– 상지대 사태의 심각성과 긴급함과 부당함을
– MB 정부와 교육부 그리고 사분위(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합법적인 야만을
– 그리고 정부 여당과 야당, 그리고 언론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태도를 질타해주십시오.

– 혹은 상지대를 지키자는 우리 목소리에 추호라도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을 비판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우리 자신을 깨워 주십시오.
격려의 목소리든, 애정어린 비판의 목소리든 경청하겠습니다.

물론 위 ‘하나/둘/셋’에 대해서도 꼭! 꼭! 꼭! 옮겨주시고요.

소통의 욕구

민노씨는 트위터와 소통 강박증에서 “아무리 스마트폰이 진화하고, 트위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고 해도 그 시간과 관심은 물리적인 한계치와 심리적인 한계치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하면서도 그렇고 한창 아거님의 글을 읽으며 홍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대공중관계라는 용어에 관심을 글로 표현해내면서도 지금과 같이 소통은 하나의 욕구로 자리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소통의 욕구는 인기나 명예 따위로 귀결되겠지만, 저에게는 그저 소박한 꿈입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의 만남. 꼭 얼굴을 보면서 만나는 만남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그것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는거지요. 환경이 받쳐주지 못해서, 또 환경이 받쳐주더라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것이지요.

여전히 이전에 만나고 대화했던 짧은 인사로 시작되었던 관계들의 주체들과 나름대로의 관계를 이어가기위해 그들의 글을 읽고 팔로우해서 살펴는 보고 있지만 여러모로 허락되지 않고 있다는 핑계를 가지고 여전히 망설이고 있습니다.

민노씨의 말처럼 물리적인 한계치와 심리적인 한계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조금만 변해 주세요.

KT, 요금제를 바꾸는 비용이 만6천원? By 도아

벌써 10 년도 전의 일이지만 SKT로 갈아타기 직전 KT에서 폰을 개통해서 쓰다가 상담원의 어이없는 응대에 홧김에 SKT로 넘어갔었습니다. 지금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화낼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SKT로 넘어오고 나서는 상담원 및 직원의 친절한 대응 때문에 그런 기억이 아주 없습니다.

이런 경험 때문에 SKT의 불합리성을 지적하는 글들을 읽으면서도 쉬이 타 통신사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KT로 넘어갈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몇 년은 넘어갈까 생각이 들면 금새 이전의 그 상황이 연상되어서  내가 뭐하러 홀대 받으러 KT로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리치고 말았지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폰이 KT에서 정발되고 통신사를 옮기게 되었는데요, 초기에 아이폰 발송 지연 사태로 연결이 쉽지 않았지만 연결되고 나서의 상담원들의 응대는 이전의 기억이 조금은 사그라 들 정도로 친절했습니다.

그렇게 폰을 사용한 지 1달 쯤 사용하고 있는데 간간히 몇 분 내지는 십여분을  3G신호를 제대로 잡지 못하다가는 결국 서비스 없음 상태가 지속 되어서 전화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렇게 된 것이 연초에 있던 일 중이었기에 일을 마치고 본가 근방에 있는 부천 직영점을 찾았습니다.

서비스 없음이 지속되어서 탈옥 때문인가 싶어서 여러 번 순정으로 복원하여 확인해 본 뒤에도 서비스 없음이 지속되었고 지금 리퍼 받은 폰 역시 탈옥 상태로 쓰고 있은 지금도 몇 달째 관련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걸보면 탈옥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고로 기계적인 문제여서 리퍼가 확실히 가능하다는 생각에 개인정보 보호의 이유로 DFU 모드로 복원하고는 서비스 인증도 받지 않은 채 들고 갔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 화면엔 아이튠즈 연결 화면이 나오지요.

아이폰을 가지고 가서 접수하고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넘겨주니 대뜸 해킹하셨죠? 라고 하더군요. 조금 황당했습니다. 그 순간에 들었던 생각은 10여 년 전에 겪었던 불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앞서도 적었지만 확실하게 기계 문제였기 때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더니 왜 대뜸 해킹했냐는 질문을 던지냐고 따졌더니 탈옥한 사람들 중에 DFU모드로도 복원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이튠즈 연결화면으로 가지고 온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세월이 흘러 아주 조금은 인덕이 수양되어인지 그 자리에서 흥분하지 않고 넘겼지만 10여 년 전의 저와 같은 이제 갓 스무살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요? 또 다시 KT에 대한 불쾌한 경험으로 다시 타사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글이 조금 길어졌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네요.

조금만 변해 주세요!

겁이 났을 뿐

아래의 몇 개 안되는 최근 글 중 몇 글의 서두에는 종교 체험이기에 비난은 거절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단절을 유도하고자 하는 목적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게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후의 글에는 해당 경고문구(!)를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해당 글들에 경고 문구까지 넣은 것은 단지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블로깅하는 많은 분들은 이미 이런 댓글들에 적절하게 대처하시며 감당하고 계시죠. 하지만 감당하려기 보다는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좀 소인배스러운 행동이지요.

앞서 작성한 모친과 관련된 글에 욕보이는 댓글이 달려 있었을 때 위로를 해 주시던 분들의 고마움 이후에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마음을 다졌어야 했는데, 그 과정이 생략된 채 지금까지 지내왔기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를 것은 걸러야 겠지요. 두려움을 피하기 보다는 감당해 내는 것이 어른의 행동일텐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 아직도 어린 아이에
불과한가 봅니다.

희망의 기간

희망의 기간이라는게 있을까요?

덴마 라는 네이버 웹툰에 보면 실버퀵이라는 회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회사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자신의 몸이 아닌 다른 이의 몸에 정신을 가둬두고 계약 기간을 채우도록 합니다. 희망을 가지며 일을 하는 그들은 절망과 분노의 감정 뿐 아니라 그 희망을 향한 열망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회사는 결국 그들의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소멸시켜 버리고 맙니다. 계약 기간 중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보안을 위한 조치일까요.

결국 그들은 이용당하다 죽어버리는 겁니다. 참 절망적입니다. 그 안에 있으면서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죽기 직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사의 중요인물들이겠지요.

1년을 기다리고 이제 나가야겠다 싶은 마음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1년 “만” 더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엄청난 절망감에 화가 나기도 하지만 또 다시 세워진 1년이라는 목표를 생각하면 희망을 가집니다.

과연 이런 식으로 얼마나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학습하는 동물이기에 얼마 못 갈 겁니다. 두세번만 반복된다면 의심을 하게 되겠지요. 세 번도 많은 걸까요.

또 다시 1년을 기약하며 희망의 기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귀찮아

귀찮다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적지 않게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어떤 계기에 의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적잖이 사용했는데, 만사가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어서 어떤 것을 하던지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도 있다.

언젠가 TV에서 드라마를 보는데 극중 할머니 분을 맡은 배우에게서 나온 대사중 하나가 귀에 띄었다.

······ 귀치 않아.

어랏 저게 귀찮다는 말의 원래 말인가? 하는생각으로 금새 이어졌다.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생각이 그쳤지만 그 후에 몇 번인가 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귀하지 않다에서 귀치 않다를 거쳐 귀찮다로 줄어들었다고 추측된다.

귀찮다의 시작말인 귀하지 않다는 어떤 말인가. 귀하다 / 귀하지 않다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말이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어떤 행동에 대해 사용하고 있기에 그에 대한 가치가 낮다는 표현이다.

다른 용례는 접어 두고 이 글에서는 교회에 가는 것이 귀찮다는 것으로 글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교회는 종교적으로는 해당 종교의 신에게 일종의 행위를 하기 위한 장소를 말한다. 불교의 경우 사찰이나 법당, 힌두교나 기타 종교에서는 신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를 교회라고 한다.

교회에 가서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예배(Worship)이다. 예배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라고 일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기 귀찮다는 말은 교회에 가는 것이 귀하지 않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귀찮다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귀찮아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귀찮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교회에서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예배를 귀찮아하는 것으로 이어 갈 수 있겠다. 교회에 가는 것은 대부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그를 위해 지음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즉 다시 말해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귀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가 아닐까.

교회 가기 귀찮아. -=> 교회에 가는 것이 귀하지 않다. -=> 예수 만나는 것의 가치가 적다.

교회는 모임의 장소 교제의 장소 예수와의 관계 정립의 장소.

좌절 낙심

인간으로 태어나 삶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낙심될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 3 :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 : 6

우리 보기에는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금년으로 대한수도원의 청소년 산상 성회는 2회가 되었다. 그 이전에도 청소년들이 개인적으로 부모들과 함께 큰 집회에 함께 참여하여 변화받기도 했으며 소명을 받는 일은 있었지만 – 대한수도원에서 – 그들을 위한 집회는 없었다.

대한수도원의 청소년 집회는 다른 청소년 수련회나 캠프에서와 같은 프로그램은 볼 수 없다. 다만 원내에 설치되어 있는 수영장에서의 수영시간을 매일 가져 더위를 식히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거나 보화1들을 체험한다.

성회 주최기관은 독특한 3가지 보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곳에 계속 다니지 않았거나 올해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3가지 보화를 경험하게되면 거부감을 표하기가 일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복음성가에는 다른 캠프에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양들에서는 보기 힘든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내용들이 가득하고 안찰은 폭력적인 모습으로 보이는데다가 성령춤은 이단의 어떤 행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보다는 독특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다른 일반의 교회나 기독교 관련 기관에서는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했다. 첫 번의 성회에서와 별 차이 없는 사람이 참여하였지만 청소년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청소년 성회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참여하게 했기 때문에 1회 때는 초등학생들의 비율이 적지 않았다. 금년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지만 초등학생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이전에 몸 담고 있던 선교단에서는 청소년 캠프를 준비하면서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연습했다.

이번 성회를 참여하면서 특별한 프로그램도 준비되지 않았고 일반의 찬양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며 아이들이 어떻게 버텨낼지 의문이 먼저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지루해하는 학생도 있었고 끝까지 말썽을 피우며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기는 했지만 끝까지 남아 참여한 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런가운데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반적인 수련회나 캠프 일정으로 계획을 하고 참여한 경우 3일 내지는 4일만 참여하고 돌아가는 경우였다. 자율학습이 있는 학생의 경우 허락된 기간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성회의 마지막 날에 학생들의 입에서 나온 체험담은 듣는 사람들로 더 깊은 은혜를 느끼게 했다. 단순한 기분이나 심리적 만족감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느꼈다.

학생들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방언 기도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만지심으로 마음 속에 있던 상처들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의 표현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백하는 모습을 함께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학생들의 이런 변화는 경험 후에도 지속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집회에서 얻은 중요한 것 하나는 어떤 인간적인 노력들로 보면 부족한 모습임이도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가운데에 성회가 진행되었고 그런 가운데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런 변화는 그들의 삶에서 증거될 것이다. 내년 또는 그 후의 그들의 삶을 통해 이 변화의 간증이 이루어지기 원한다.

우리 보기에는 주먹구구식으로 해 나가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이루어진 지금의 시점에서의 성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다.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렇다 할 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삶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1. 성회가 시작되고 3가지 보화를 설명했는데 복음성가, 안찰, 성령춤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에 포스팅하겠다.[]

하나님을 신뢰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를 들고 다니며 크게 외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믿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정신적인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보여지게 할 뿐인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게 아닌가!?

믿는 사람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믿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과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겉으로는 믿는다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 사랑은 다만 그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하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면 쾌락을 위한 관계 어떤 만족의 조건을 위한 관계일 뿐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동들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바칠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예비하셨다.

사무엘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며 다만 형식적인 것들을 갖추기만 했을 때이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완벽한 승리자로서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이스라엘의 군사들의 사기,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곁의 제사장들..
하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승리의 조건들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필수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신뢰와 그에 따른 행동들이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사무엘상 4장 3절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직전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게 된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궁리한다. 여호와의 궤가 함께하면 이길 것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다시 이스라엘이 패한 요인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하지 않은 것
  2. 패배의 요인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다시 전쟁에 임한 것
  3.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

1항과 2항은 같은 것이다. 2항과 3항도 연결된다.

여호와께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가 되겠냐 싶겠지만, 다윗을 예로 든다면 그는 항상 여호와께 작은 것이라도 기도하고 임했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며 사울에게서 그의 아들에게서 피할 때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할 때의 그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호와께 구하지 않은채 범죄한다. 이스라엘에게 칭송받는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구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항을 다루기 전에 3항에 대해 집고 넘어간다면 사무엘상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들의 이로운것들을 취함으로써 죄를 범했고, 그로 인해 멸하시기로 정하셨다.

먼저번의 블레셋과의 전투 패배 요인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죄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언약궤와 함께 그들이 있도록 했다.

여기서 아골의 죄를 처벌하고 승리했던 사건과 대조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 7장에서는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충분하다고 판단된 군사를 보냈지만 패한다. 그리고는 패한 이유를 여호와께 구하고, 아골의 죄를 드러내고 처벌했으며 그 후의 전쟁은 승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패전의 이유를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으며, 공식처럼 이것 저것들을 준비하고 전쟁에 임하지만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와 이스라엘 자신들의 실수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동행한다는 것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정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는다. 범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그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바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복을 받으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여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야만 그에 더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 차이이다. 사실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일상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주의 말씀에 살기로 작정하고 그것에 스스로 자원하여 따른다면 그렇지 않았을 때 느꼈을 불편함을 느끼지 않듯이, 불평의 상황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자원하여 감사한다면 쉽다.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 분명 하루 종일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안되기만 하는 날에도 감사해야하는가의 문제와 불평도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하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그의 말씀에 따르고 지혜를 좇기를 바라시지 말씀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 심판을 받기 원치 않으신다.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어둠 가운데서 빛이 비추면 더 밝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목적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적은 노력이 들기도 하지만 많은 노력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향해 나가면서 신에게 자신의 계획을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기도라는 것은 어떤 것을 빈다는 의미인데, 그 비는 대상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데서 기도가 성립된다.

단순히 보너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그저 심리적인 만족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성령의 실존을 믿고 그(들)에게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목적에 도움을 달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물론 맞기는 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더 큰 것을 구하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적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계획 안에서 완성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인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그들의 희망대로 움직여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가 맞춰간다면 어떨까.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분(들)의 응답은 때론 이성에 오류를 일으키게하고 비합리적인 것들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결과를 – 물론 좋은 쪽으로 – 이루어 내시기 위해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머리로 이해는 하고 있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행하기란 정~~~~말 어렵다.

순종

노아는 이렇게 이상한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단한 순종이다. 우리들은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성을 설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부정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신비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에도 인색하다.

출처 : 채워주심1

순종이라는 것은 사실 대단히 힘든 일이다.

장담하지만 당신들이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당신들보다 잘 살 수 있다. 물론 당신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211.[]

순종의 태도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생각 조금하고 기도 많이 해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일하러 갈 수 없다. 바로 가자! 그리고 뭐가 되든지 간에 꼼지락거려보자!

(중략)

채워주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중히 보시는 것, 그것은 종다운 순종의 태도다!

출처 : 채워주심1

순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순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복종하다2이다.
순순히 복종하기 위해선 복종의 대상,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마음에서부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따르는 것은 순종이라고 할 수 없다.
유명한 위인들의 주변에는 자원해서 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은 그 위인에게 적지 않은 존경심을 가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존경심은 감사의 형태를 띄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따르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순종과 감사는 하나의 팩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순종하고 존경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접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노력한다.
내게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모두를 알 수는 없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감사에 대한 행동 표현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는 있겠지만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마음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137.[]
  2. 순종(順從)【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순순히 복종함., 민중국어사전.[]

글읽기 강박에 대한 단상

절대 바톤 놀이 를 포함한 몇 건의 포스트에서도 밝혔지만 어떤 블로그를 보기 시작하면 처음부터 읽는 습관이 있다.

사실 습관이라기보다는 강박에 가까운데, 지금도 그렇게 읽고 있는 블로그가 4곳이다. 그나마 한 곳을 거의 다 읽어가기 때문에 3곳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듯 하다.

이전부터 왜 이런 강박이 생겼을까하고 생각해 보려고 하다가 글을 얼른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얼른 돌아서버려서 그다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지금 문득 떠 오른것은 통신 시절의 일이다.

나우누리에서 대화에 끼어들기라는 글이었던 것 같았는데, 그 글에서 말하기를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끼어들기보다는 기존에 어떤 내용들이 오가고 있는지, 어떤 분위기인지를 파악한 뒤에 참여하라는 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단지 대화방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커뮤니티에든지 그 곳의 분위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인지 어떤 곳에 끼어들기 전에 짧은 시간이나마 분위기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지고 그들의 대화에 무리를 가하거나 중단되지 않도록 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RSS구독을 하면서 발생한다. 그저 구독 목록에 넣어놓고 최근에 오른 글을 읽어가면서 분위기를 파악해도 될 듯하고 사람의 실시간 대화에 끼어드는만큼 분위기를 망칠 가능성도 적은데, 그런 사실로부터 시작한 순차적 글읽기 강박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최근에 몇 주간 좀 바빠져서 읽지 못했던 글을 지금까지 약 1주일에 거쳐 다 읽어내고 나서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그만두자… 얼마 전에 읽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 지도책(?)에 많은 것을 읽기 보다는 한 권을 읽더라도 논점을 파악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논리적인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했듯이, 많은 것을 읽기 보다는 글 하나를 읽더라도 정독을 해서 논리를 파악하자!

….. 라고는 하지만 쉽게 고쳐질 것 같지는 않는다. 속독 하는 것을 연습해야겠다. 내용도 파악하고 빨리 읽고… 그것 만이 살 길일까? ㅡㅡ;;

전설 2mb

나는 건설이다 에서

  • OldBoy댓글:2008년 1월 18일 18:52 편집그럼 국민들은 좀비인가요? 흑흑흑 ㅠㅠ응답
  • cansmile댓글:2008년 1월 18일 19:42 편집@OldBoy – 2008/01/18 18:52
    글쎄 그렇게 생각하면 또 그렇긴 한데요.나는 전설이다에 보면 윌 스미스가 살던 동네에 좀비들이 득시글 거리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좀비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서 살잖아요?좀비처럼 어떤 본능에만 충실한 사람들이 2mb를 뽑았잖아요.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그저 단순한 의미로 뽑기도하고요.응답
  • OldBoy댓글:2008년 1월 19일 08:25 편집@cansmile – 2008/01/18 19:42
    가능하면 더 멀이 떨어져 살아야겟군요! 응답
  • cansmile댓글:2008년 1월 19일 17:14 편집@OldBoy – 2008/01/18 18:52
    그러고보니 윌 스미스 분의 역할이 그들을 위한 치료제 개발을 했기 때문에 전설이 된건데, 좀비들의 왕(?)으로 여겨지는 2mb가 그들을 치료하는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 상상해 봤습니다.응답

이런 댓글들이 오갔는데, 정말 생각해보니 그렇다.

일단 이미지상으로는 2mb씨가 도드라져보이지만, 영화의 내용 – 원작 소설의 내용은 제쳐두고 – 으로만 보면 윌 스미스분의 박사가 결국엔 좀비들을 구원한다는 내용인데, 결국엔 2mb씨가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을 정상인(!)의 상태로 돌려놓는 역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나는 여전히 어리다

최근에 더욱 두드러지게 느끼고 있는 사실 중에 하나가 나는 어리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어르신들에 비하면 육체적인 나이도 어리고 젊지만 상대적으로 그 나이에 가져야 할 정신적인 나이가 어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웹상에서의 모습은 물론이고 오프라인에서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나이에 가져야 하는 사고의 깊이의 정도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각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는 분위기를 통해 그것이 정해져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 통념적이라는 표현을 빌어오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까?

조금 더 말해보면 철이 없다는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 나이에 가져야 할 행동 양식이나 마음 가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을 말하는게 아닌가.

사실 어린 시절부터 주욱 해왔던 생각은 철이 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하면, 다르고 싶다는 생각이 발전해서 나온것이다. 사회의 틀에 맞춰 사고까지 틀 짓기가 되어 평범 또는 그 이하의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이런 생각이 어중간하게 실현되었다. 그래서인지 스스로에 대한 문제점들이 적잖이 느껴졌다.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는 작은 문제들이 모이게 마련인데, 그 동안 문제가 될까 싶었던 것들이 지금의 생각을 가지게 하고 있다. 문제가 아닌 긍정적인 행동양식이라고 생각되었던 행동들이 오히려 또 다른 문제들을 낳았다.

쨌든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이 정도의 어설픈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이런 저런 현상들을 모아서 나는 여전히 어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정리를 해 보려고 쓰기 시작했는데, 생각만큼 정리되질 않는다.

댓글도 정신적 여유가 있어야 단다…

싸이에 가면 1촌이든 아니든 제일 처음에 댓글을 달아달라는 메시지가 보이도록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댓글은 사람들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필수 기제라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그 동안 댓글을 달 수 있는 상황이든 아니든 어찌됐든 눈웃음 표시만으로라도 댓글을 달아주고는 했는데, 어느순간 그것마저도 하지 않게 되었다.

싸이월드 뿐만 아니라 블로그에 올라온 글들에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어떻게 비춰질까라는 질문이라 생각된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 생각해보지 않았다기보다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같은 생각은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필자를 제한적인 인간으로 만들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게 몇십년을 보내고 나서 한 블로그의 주인장으로부터 거부처리를 당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댓글을 달기 위해 닉네임과 비밀번호, 홈페이지 주소, 그리고 내용을 적고는 입력을 눌렀는데, 거부되었다는 메시지가 충격에 휩싸이도록 만들어줬다.

아~ 난 이 사람에게 이런 존재구나 싶었….. 으면 좋았겠지만 그 순간에도 뭔가 오류인가 싶어 티스토리 사용자 포럼에 이상하게도 거부라는 메시지가 나온다는 질문을 했다.

답변으로 돌아온것은 EAS에 걸린거든지 해당 블로그 주인이 진짜로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곧바로 다른 티스토리 블로그 아무곳에나 방문하여 댓글을 달아보았다. 이상 없이 달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이런 경험을 하고나서는 기분이 좀 나쁜게 사실 그런 정도로 싫었다면 그다지 달갑지 않다는 쪽지 내지는 이메일을 보내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할 가치조차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그에게 있어 그런 존재인가.

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어중간한 인생살이에서 조심스러워야할 이유가 생겨버린것이다.

분명 이런 태도는 어느순간에 이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당분간은 지금의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다.

댓글을 달 때 망설여지고 내용을 언제 적었냐는 듯이 취소하고 탭을 닫아버린다.

존재감이 없는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구글(google)이라는 기업의 위치는 그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수도 있을 만큼의 위치에 서 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기업들처럼 항상 관심과 주목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구글 성공스토리와 우연의 일치에서는 구글이 어떤 우연들로 인해 성공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내용이 있다. 몇 몇 부분들이 있는데 제목과 연관하여 적어보자면

구글은 너무나 작은 회사여서  MS 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구글은 결국  MS의 방해 없이 열심히 웹 쪽을 계속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MS의 무관심으로 적은 방해를 받으며 충분히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졌지 않은가.

과연… 하지만 저 글에서도 주장되어지고 있지만1 단순히 우연만이 그들을 성공시킨것은 아니다. 우연을 잡아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한 설교시간에 설교자는 말했다. 에반 올마이티에서 신으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이 에반의 부인에게 말한 내용이었는데, 우리가 성공을 기도하고 부자가 되도록 기도하면 그 기도 그대로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고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구글의 성공신화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작은 기회들에서도 충분히 역량을 발휘하고 그 기회를 성공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기본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1. 구글이 지금까지 달려왔지만 그것은 단순한 운 또는 우연의 일치라기 보다는 그들의 열정과 노력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무관심하면 바뀔 수 없다

민노씨의 이글의 하단에 링크된 글을 따라 들어가보니 이명박 UCC, 퍼가기만 해도 조사 받아가 있어 주욱 읽어보았다.

관련 컨텐츠를 본 기억이 있는데 보면서도 참 이렇게 일괄적으로 정리하는데도 노력이 대단하다 싶었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기사를 읽어 내려가는데 이 사람 하는 말이 필자의 생각에 닿아있어서 해당 부분을 옮겨와보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요구사항이 있다면?

국민들에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선거참여와 관심을 부탁하고 싶다. 정치가 아무리 더럽고 지긋지긋해도 무관심하면 절대 바꿀 수 없다. 정치인을 자꾸 괴롭혀야 한다.

바로 이 부분인데, 무관심하면 절대 바꿀 수 없다. 정치인을 자꾸 괴렵혀야 한다는 말이다.

어떤 집단이든지 들어가면 적응을 해가기 시작하고, 또 그러다보면 이런건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필자의 군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혀 바뀔 수 없으리라 미리 의지를 거둬버리면 그 상태로 아들 세대에까지 이어져가버릴 것이 아닌가. 같은 상황을 아들이 겪어야 하는것이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대한민국 육군 병장으로 전역하셨는데, 70년대의 군은 그야말로 하루라도 빠따를 맞지 않으면 되려 잠이 오지 않는 그런 시기였다고 하셨다. 그렇게 군생활을 하면서 상병을 거쳐 병장에 이르게 되셨는데, 아버지의 동기들이 자신들이 그렇게 맞으면서 왜 아무 이유도 없이 때리냐며 욕했던 고참들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하셨단다.

지금의 좋은 군생활은 그런 작은 노력들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외압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겠지만 군이라는 조직의 특성상 자체적인 정화작용이 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고 생각된다.

물론 사회적인 분위기의 변화가 사회성원들이 군이라는 구성원이 되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자유스러운 상황이나 여건들은 그런 노력들을 통해 이루어져왔지만, 젊은 세대들의 정치에의 무관심은 이런 변화를 되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좀 비약했다는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포상으로 징계 빼기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를 보면서 따라가게된 사건의 전말 기사에서 보면

전북교육청 관계자는 “처벌 공무원이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측과 합의를 해 형사 처벌을 받지 않았고, 교육부장관 포상이 있어 징계 수위를 낮췄다”며 정직 처벌과 관련한 입장을 밝혔다.

이와 같은 부분이 있는데, 아니 성폭력을 행사해서 조사를 받고 징계를 받는데 교육부 장관의 포상으로 징계 수위를 감하다니 이런 일도 있나.

물론 교육관련 공무원이라 짱이 준 상을 받았으면 그만한 업적이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범죄한 사실에 대한 문제와는 별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읽고 아니 저 사람도 가정도 있고 먹고 살아야하는데 저렇게라도 해줘야하지 않겠냐는 사람도 있을텐데, 당신 말야 당신 어머니나 여동생이 성폭행 당했다면 그런 소리가 나올거 같아?

물론 사람이 실수는 다들 하고 살지만,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져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다.

온라인 그리고 오프라인

[댓글들] 아거 & 민노씨 – 온라인 실존과 블로그 본질로서의 개성에 댓글로도 작성하였지만, 필자는 온라인에서의 만남을 실존의 대면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

실제로 초등학교시절부터 통신으로부터 온라인 만남이 이루어져 왔고, 또 그들과의 인간관계가 오프라인에서도 주류를 이루어왔기 때문에 그런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슨 말인가하면 지금 형성되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맥의 대부분이 온라인에서 시작되었고, 관계의 유지 또한 온라인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것이라는 말이다.

오프라인에서 만남이 형성된 경우에 있어서도 – 초중고등학교 내지는 사회생활 중에 만난 사람들 – 직접 만나는 경우는 드물고 메신져 – 네이트온, Live Messenger 등 – 에서 대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실존과 대면하여 대화하는 것과 온라인에서 대화하는 것은 별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온라인에서의 안부를 묻는다던지 대화를 해 나가는데 있어서 필자에게 가지는 느낌들은 대부분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에서도 거의 같게 느껴질 것이다. 간혹 그렇지 않다는 평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별 차이를 가지지 않는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전에 찌질이 1人이 지나가다가 필자의 모친에 대한 글에 욕설을 댓글했던적이 있었는데<2006/10/01 – [나의/과거사] – 초등학교 1학년, 8시간 공부? 참조>, 그와 같은 경험이다.

악플러의 댓글은 단지 온라인에서만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필자에게 욕설을 한 것과 같은 무게감을 가진다.

앞으로도 많은 만남들을 가지게 되겠지만 그들과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때문일 것이다.

지금 관계를 맺고있는 많은 블로거들과 함께 나이들어가면서 소통할 수 있었으면하는 작은 바람을 적으며 마무리한다.

보는 눈의 차이

이번 ‘아이 온 사우스 코리아’를 위해 취재를 하면서 그녀는 한국의 기술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장면들이 한국에선 이미 일상생활이 돼 있었어요. 전국에 초고속 광대역 통신망이 연결돼 있고, 지하철에선 사람들이 휴대전화로 고화질 TV(HDTV)를 보고 있으니까요.”

태우님의 CNN Today 출연 후기를 읽으면서 링크된 기사에서 위와 같은 부분을 보았는데, 아~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에서 잘 얻어내는구나 싶었다.

이런 것은 그 기자의 능력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태우님의 포스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진행자인 Kristie가 남대문은 바로 “where the old and the new meet each other”라고 할 때 왜 나는 이 근처에서 4년을 일했는데도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던 문에 대해서 위와 같은 표현을 한다는 것에 놀라시는 것에 공감이 되었다.

가르치면 90% 유지

Silberman(1998)에 따르면, 우리가 많이 접하는 강의(lecture)는 retention rate이 5%에 그칩니다.
책을 읽는 것(reading)이 10%, 오디오비주얼(audiovisual)을 활용하는 것도 20%에 그치지요. 실제 보여주는
것(demonstration)이 30%, 토론(discussion)이 50%, 행위를 통해 연습하는 것(practice by
doing)이 75%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을 가르쳐 보는 것(teaching)이 90%라고 하네요.

확실히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가르치는 지식이나 방법 등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고, 또 가르치는 과정 중에는 자신이 스스로 공부할 때 알지 못했던 타인의 이해과정을 통해 다른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보다는 동생이 더 공부를 잘 했는데, 동생은 나름 대학교에 다니면서 학비를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는데, 가르치는 내용은 대학 공부와는 상관이 거의 없었지만,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을 통해 대학 공부에 임했기 때문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것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 수업 시간에 발표 수업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렇게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업에서 단순히 듣기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들을 공부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90%라는 것은 맞다!

돈을 위해 신념을 팔아 버리지는 않았는가

종교는 1:1 사이였던 창조자와 나를 1:1:1 사이로 만들었다. 신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신과 교회 그리고 나의 관계로 만들었다.

위의 인용문은 타블로에 의해 작성된 글을 월아님께서 작성1하신 내용 중의 한 부분이다.

타블로는 종교가 자신과 창조자와의 사이에 끼어 1:1:1의 관계를 형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인간이 다른 것에 의해 방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중간에 교회를 끼워 넣은 것이다.

대한민국에 종교가 들어오는데 있어서 큰 공헌을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백성들의 종교성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이름 없는 신을 섬기는 것을 두고 종교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지방의 사람들만이 종교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누구가 정도의 차이를 두고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 기독교가 쉬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전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각의 기본 종교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두 국가들과 종교들이 새로운 국가로 재탄생하면서 종교가 함께 바뀌었기 때문에 조선의 멸망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위한 종교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종교는 인간에게 이용당하고 만다.

사실 교회나 목회자가 중간에서 힘을 얻게 된 동기를 굳이 찾자면 샤머니즘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굿판을 벌이던 무당을 섬기던 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목사들을 무당쯤으로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억지스러운 추측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설득력을 가지기는 하다.

하고싶은 말이 뭐냐면 타블로의 1:1에서 1:1:1의 관계가 된것은 그 자신에게 있어서 아무런 무넺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간의 교회를 1로 차지하게 한 것은 타블로 자신이지 교회와 같은 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의 무당을 목사로 대체시킨것은 목사 자신들이 아니라 인간들인 것처럼 말이다.

  1. 긁어오신 것인지 직접 타이핑을 하신것인지 포스팅상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지만[]

욕하지 않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가끔씩 듣는 상사의 유형 중에 x 부장은 맨날 우리에게 일 못한다고 질책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오면 아~ x 대리는, oo사원은 정말 회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일도 잘하고 싹싹하다고 자랑한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얘길 들으면서 그 사람은 그 사실에 대해 공감해 주길 원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그에 대해 반박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필자는 그 부장이 잘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발 없는 말이 천리간다는 말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학교 학생들이 학교에서도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하는 학교에 대한 불평을 학교 앞 분식집에서 했다고 치면, 그 분식집 주인은 그 얘기를 듣고 그 근처에서 장사하는 이웃들에게 하게 된다. 그 분식집 주인이 이웃에게만 하겠는가 언젠가 친인척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그 분식집 주인의 친인척 내지는 이웃의 자녀가 대학을 진학하려고 하는데 해당 학교를 고려중일 때 그 분식집 주인이 그 학교 학생들이 했던 불평을 들어서 그 학교는 좋지 않다고 했을 때 어떻겠는가. 그건 자신의 학교를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좋은 인재가 들어올 가능성을 줄이는 결과를 낳게 되지 않는가.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다니는 학교에 대해 – 비단 학교뿐 아니라 소속했던 모든 집단 – 자랑스러워하는 편인데, 다른 사람은 필자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끔 곤혹스러워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 사람이 곤란해하는 것도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소속해 있는 집단을 위해서는 필자와 같은 행동양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필자보다 더 우수한 학생들이 후배로 들어와서 더 좋은 학교 분위기를 만들고 학교의 질을 만들어 나간다면 좋은 일 아닌가.

자신이 소속해 있는 회사, 학교, 또는 자신과 사귀고 있는 연인에 대한 불만은 되도록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고려해 더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이용약관에 대한 아이디어…

명확하게는 사용자 중심인데, 이용약관을 읽다보면 매우 길기도하고 그만큼 시간을 많이 소비하게 되는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용약관이 간소하게 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 보건데, 개인 정보의 이용이나 뭐 이런 저런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들을 체크할 수 있도록 하고 그것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오픈아이디 같은 것에 등록해 놓고 가입시 오픈아이디 사용하면 체크해 둔것에 맞지 않으면 가입을 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같은 것은 어떨까 생각해 봤다.

물론 이런것들은 이용약관을 요상하게 해 놓은 웹페이지 등에서는 오픈아이디를 사용하지 않아버리면 그만이지만 이런걸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서 한다면 이용약관을 읽느라 소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그런 것을 귀찮아한다거나 약관을 그냥 스쳐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세세히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기능이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이런게 쉽게 적용되기는 힘들겠지만, 잠시 앞의 글을 쓰고나서 생각해봤다.

아놔 신용불량자는 경품도 못받는구나…

오늘 택배를 하나 받았는데, 그 택배 송장스티커 아래에 베지밀 2병을 100%무료 증정한다고 되어있어서 등록을 시도했다.

베지밀 이벤트 화면

택배회사와 송장번호 필자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잠깐! 경품 지급하는데 주민등록번호까지 받나.. 쨌든 어쨌든 진행했다.

넘어간 화면은 어딘가 가입하라는 것인데, 어쨌든 이메일과 문자 수신 동의 체크박스를 풀고 약관을 찬찬히 읽어내려갔다.

칸이 너무 좁아 복사해다가 텍스트편집기에서 읽어 내려가는데, 눈에 거슬리는 문구가 있었다.

4. 회원가입
(1) 회원가입 자격은 만 14세 이상 대한민국 국적의 실명 개인으로, 회원가입은 회원이 본 약관에 동의하고, 회사에서 요청하는 개인신상정보를 제공해야 합니다.
(2) 회원가입을 신청할 때 본 약관에 동의하고 “동의”버튼을 Ц?纛막館?본 약관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3) 회사는 이용자가 약관의 내용에 동의하여 회원가입을 신청한 때에 한하여 회원가입을 승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단 회사는 다음 각 호에 해당하는 신청에 대하여는 승낙을 거절하거나 그 사유가 해소될 때까지 승낙을 유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경품에 당첨되었다 하더라도 다음의 각 호의 사항이 발생한 경우에는 당첨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가.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한 경우.
나. 이용신청 시 기재사항을 허위로 기재하여 신청한 경우.
다. 정보를 악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거나 사회의 안녕과 질서 혹은 미풍양속을 저해할 목적으로 서비스 이용을 신청하는 경우
라. 신용정보의 이용과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어 있는 경우
마. 회사의 서비스설비 용량에 여유가 없어 서비스 제공이 불가한 경우
바. 회사의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사. 회원의 귀책사유로 이용승낙이 곤란한 경우, 기타 회사가 정한 이용신청 조건에 미비된 경우
아. 이전에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했거나, 기타 악의적인 목적으로 서비스를 이용하여 회사로부터 회원자격을 박탈당한 경우. 
단, 회사가 회원의 재가입 승낙을 한 경우는 예외로 합니다.
(4) 회사는 위 (3)의 각 호에 해당하는 경우, 신청을 한 회원에게 회사가 정한 방법으로 결과를 통지합니다.

기프트밀

바로 저 부분이다!!

그러나저러나 신용불량자라는 용어를 아직도 사용하는건가? 그럼 이건 잘못된 정보인가.

한편 그동안 신용불량자에 대한 사회·경제적 불이익이 획일적이고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이 일자 정부는 신용불량자제도를 폐지키로 했다.이에 따라 2005년 4월 28일부터 신용불량자라는 용어가 사라진다.

네이버 백과사전 – 신용불량자

그래서 법제처에서 검색해 보니 남아있다.

확인

제2조 (다른 법률의 개정) ①방문판매등에관한법률중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9조제7항 및 제18조제5항 후단중 “신용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 제2조제7호의 규정에 의한 신용불량자”를 각각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 한다.
  ②여신전문금융업법중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6조제1항제3호중 “신용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 제2조제7호의 규정에 의한 신용불량자”를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 한다.
  ③전자상거래등에서의소비자보호에관한법률중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18조제7항 후단중 “신용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 제2조제7호의 규정에 의한 신용불량자”를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 한다.
  ④중소기업창업지원법중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7조제2항제2호 사목을 다음과 같이 한다.
      사.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
  제19조제2항제2호 마목을 다음과 같이 한다.
      마.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자
  ⑤중소기업협동조합법중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제44조제1항제7호중 “신용정보의이용및보호에관한법률에 의한 신용불량자중 동법 제17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신용정보집중기관에 등록된 자”를 “금융거래 등 상거래에 있어서 약정한 기일 이내에 채무를 변제하지 아니한 자”로 한다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일부개정 2006.3.24 법률 제7883호]

쨌든, 자기 신용 관리 안 한 사람도 있겠지만, 관리를 했는데도 가족 때문에 엮여서 불량자가 된 사람도 있는데, 뭐 어찌됐든지간에 신용불량자라는 이유만으로 경품을 못 받는단 말인가. 이러나 저러나 관리 똑바로 못 했으니 받지 말아야 하는건가.

아놔 게다가 이 약관 중간에 깨져 나오는건 왜 이런건가.

(2) 회원가입을 신청할 때 본 약관에 동의하고 “동의”버튼을 Ц?纛막館?본 약관에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중략)
(3) 회사는 서비스 개편 등 서비스 운영 상 필요한 경우 회貶“? 사전 예고 후 서비스의 전부 또는 일부의 제공을 중단할 수 있습니다. 

기프트밀

편집기로 복사하는 과정에서 그런건가 싶어서 원래 사이트로 가서 확인해 봤지만 같은 부분이 깨져있는것이 확인되었다.

글씨가 깨져 보이는 화면

뭐 굳이 이렇게 포스팅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 블로그의 소개글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2006/09/09 – [분류 전체보기] – 관계 / 단절의 시작은..>

정말 기가 막힌다. 베지밀 2병 먹으려다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시켜주는 것에 감사해야하는건가. 그리고 신용불량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얼마나 더 써야할 것인가 고민도 해주는 센스를 발휘해야하는건가.

하~ 정말…

어쨌든 이용약관 밑에 있는 이미지 문구처럼 SMS 보내면 막 따져야겠다. 이용약관엔 동의하지만 SMS수신동의는 하지 않는다고 체크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

인천공항 면세점에서의 나는 십여 년을 몸에 입혀온 냄새를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새로운 냄새로 갈아입을 준비 따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낯선 장소에서 향수 없는 며칠을 보낸 뒤에야 비로소 새로운 향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이전의 것과 새로운 것이 섞여서 좋지 않은 것들이 몇 있다. 당장에 생각나는 것들의 공동점은 사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상관을 들이게 된다던지, 새로운 사람과의 연애를 시작한다던지 하는 것은 이전의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 등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 문제는 발생하게 된다.

이혼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에 이른 사람들의 상당수가 다시 이혼한다는 이야기를 헛된 것이 아니다. 자신도 모른채 또는 의식적으로 이전의 상대와 비교하며 그 사람은 이랬는데 저랬는데 하고 있는다.

연애는 이전의 이별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기도 전엔 시작해서 안되는 것이다. 이전의 사람을 잊기 위해서라는 좋은 구실도 좋지만, 그건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상대방을 희생시켜서 되겠는가. 하지만 이런 행동의 결과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있다.

물론 완전히 이전의 사람은 잊을 순 없을 것이다. 이전의 사람을 육체적으로 보내는 단계를 떠나 마음으로부터 떠나 보낼 수 있을 때 연애를 시작해야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어떤 사람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보라.

배알이

전에도 여러번 썼지만 더 이상 댓글이나 포스팅을 통해 길게 쓸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그래도 짧게 써 본다.

위의 기사를 보면 여군에 대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글에 나오는 여군의 이야기는 접어두고 남성인 군인들의 심리를 간단하게 요약해보자면 여자가 상관인게 배알이 뒤틀린다 라는 거다.

현역에 있을 때에도 그랬고, 최근의 여러 주변 상황들 그리고 위의 기사를 보면서도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이다.

그렇게 못 견디겠으면 저런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야 하지 않겠는가. 부정적인 방법으로 한 사람은 논할 가치도 없다.

좀 평범하다고 생각되지만…

카카오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이 만성피로증후군(CFS)을 완화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내분비학의 권위자인 연구팀의 스티브 엣킨 박사는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을 주기적으로 섭취한 환자가 코코아 함량이 낮은 초콜릿 섭취 환자에 비해 피로감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연구진은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 초콜릿이 뇌 기능 자극 호르몬인 세로토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전문가들은 환자들이 초콜릿을 적당히 섭취해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너무 평범하잖아? 라고 생각한 순간 전에 어머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아마도 카카오99%를 처음 맛 보여드렸을 때 하셨던 말씀인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글<2007/03/11 – [나의/일상] – 카카오 99%>에서 언급<기분도 괜찮아지고 몸이 가뿐해지는 듯한 느낌>했다.

이런 말씀을 하신 것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것은 비교적 필자의 가족 중에서 필자와 함께 몸의 변화를 세밀하게 잡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어느정도까지인지는 객관적인 실험이나 측정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단언하긴 힘들지만, 대부분의 느낌은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분까지 느끼고 표현하는데, 이것을 두고 아버지께서는 사삭스럽다고 표현하신다.

오호~ 그나저나 이거 이전글넣기 편하다!

사람이 너무 튀면..

이 법안 37조의 내용은 “‘직장을 옮기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빵에 넣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악명높은 “예비, 음모” 조항입니다.

Guru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보게 된 글인데, 나라 기술보호하는 것도 좋은데, 저 정도면 누구 하나 눈엣 가시인 녀석 하나 인생 망치는거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거 아닌가?

예를 들어 최근에 김 연구원이 잘 나가고 있는데, 조금 있으면 자길 치고 올라갈 거 같은데, 이거 자리 내주기는 싫고해서 대략 상황 꾸며서 예비 음모로 회사에 보고했는데, 이게 또 재수없게 완전히 회사나 중정 따위에서 낚여서 구속 될 수도 있지 않느냔 말이다.

물론 필자는 기술 관련 직종이 아니라 별 상관이 없지만, 저 정도면 정말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 연구원들 윗사람들이나 회사 눈치보느라 헌법재판소에 말 한마디 못하겠지.

웬지 우러러보이던 그들이 불쌍해보이기까지 하다.

네이버가 펌에 대해 조금만 더 고민한다면…

네이버 약관 중 ‘게시물의 저작권’에 관해를 보다 보니 생각나는게 있어서 한 번 포스팅해 본다. 물론 이 글은 민노씨의 블로그에 트랙백하고 네이버 블로그 담당자에게도 함께 보낼 생각이다.

일단 민노씨의 글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필자의 댓글은

cansmile

2007/09/18 09:32
#
M/D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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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펌에 대해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지만, 마지막에 덧으로 붙이신 조항의 경우 펌로거들의 자료를 보호해주고자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원작자의 권리를 침해 당하도록 하고 있네요… 라고 쓰려고 마지막 도아님 댓글을
보니까 또 그것도 아니네요.

펌로거들이 스크랩 해 가는 이유는 원작자의 글이 삭제될 경우 자신이 보관할 용도로 그러는 경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렇다면 퍼갈 때 이를 글 작성자가 알 수 있도록 동의를 구하는 형식은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기능구현도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아요. 하지만 뭐 복사해서 가져가는건 어떻게 할 수 없더라고 펌제국 네이버 내에서는 어찌 할 수 있을 듯합니다만… // 61.101.***.***

인데, 위의 댓글에서도 나타나있지만 조금 더 발전시켜 본다면 이렇다.

네이버에서는 스크랩이라는 공식적인(?) 펌 기능이 있는데, 이걸 조금 더 발전시켜서 원작자의 권리 보호에 사용하면 좋겠다.

스크랩 한 블로그의 주소와 닉네임만을 표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원본 글의 작성자에게 허락을 얻도록 기능을 구현하는 것이다. 스크랩 버튼을 누르면 일단 글 작성자가 설정해 놓은 스크랩 허용 여부를 확인하고, 무조건 허용일 경우 바로 스크랩이 가능하도록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작성자가 스크랩을 원하는 목록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여 승인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 방법은 이대로 스크랩해 가는 입장의 사용자에게는 불편하겠지만, 기본적으로 댓글로 허락을 얻는 것보다는 조금 더 편한 방법이 되지 않겠나.

그리고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방법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블로거의 경우에는 상관이 없겠지만 블로그에 열 올리고 있다가는 한달 이상 사용하지 않는 사용자의 글이 유용할 경우이다. 물론 이런 경우 승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이런 저런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복사해 가겠지만 일단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스크랩이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펌으로 인한 작성자의 원성은 그다지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름 윈-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게임같은 블로깅, 블로기즘

필자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봐야 지뢰찾기나 테트리스 같은 간단한 게임만 가끔씩 할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게임은 최근에 여러 사람 폐인 만들었다는 스타 크레프트, 와우, 리니지 같은 류를 말한다.

관련글 : 프루나 같은 인간, 순간 판단력

게임을 하지 않는 대신에 다른 것에 재미를 가지고 PC에 대한 관심을 이어왔는데, 최초의 관심 대상은 하드웨어였다. 이런 저런 것들을 붙여보고 떼어보고 어떻게 하면 어떤 방식으로 다르게 작동하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성능을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글들을 통신에서 찾아서 직접해 보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러는 중에 날려먹은 PC만 10여대가 되었지만, 지금은 일반적으로 PC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조금 나은 하드웨어 운용능력을 가지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 시기적으로 그 다음이라고 할 만큼의 차이를 가지지는 않지만 – 그래픽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다. 마우스가 생기기 전에 닥터 할로라는 프로그램을 접하게 되었고, 마우스가 생기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사용하였다. 닥터 할로라는 프로그램이 지금의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션, 그리고 플래시 같은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닥터 할로는 말 그대로 끄적거리는 정도의 장난질로 그림을 그리고는 했는데, 그 이후의 프로그램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방면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 두가지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게임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게임과 같은 흥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민노씨의 게임과 블로그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것은 시민이자 대중인 우리가 삼성의 자본권력으로 귀추되는 것에의 새로운 혁명적인 행동이 가능한 곳이 바로 블로그, 블로기즘으로 이야기되어지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 ‘블로그’가 필자가 이전부터 PC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어올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흥미거리로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신도구로써의 도구로1 사용되어 진다는 것이다.

과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제안이라고 생각되는것이 필자 역시 단순한 기록의 도구로 블로그를 사용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과연 관계가 형성되면서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 여전히 많이 부족하지만 – 그것에 대해 사상이라는 것을 정립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블로깅이 단순한 기록의 도구에서 사상을 정립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피력할 수 있는 도구로 전환되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미디어들은 버려져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블로거들이 이처럼 바로 잡아가야할 대상 중에 기존 매체들도 포함되어져야 할 것이다. 삼성의 자본권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시사저널 기자단과 같은 분들처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사람은 변화하고 바뀔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것이 항상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2는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변화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게임과 같은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도구로써 블로기즘은 기존의 매체들을 비판하는데 그들을 처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로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 민노씨의 포스팅 중에서는 위(Wii)와 같은[]
  2. 블로거[]

비판의 대상으로서의 나, 그리고 대화

필자는 비판 받는 것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노씨께서 자주 언급하시듯이 비판은 그 대상에 대한 관심(애정)이 없다면 존재 할 수 없는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판은 고양된 애정을 표현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물론 비판의 탈을 쓰고, 그 ‘사람’을, 그 ‘블로거’를 증오하기 위한 비난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민노씨.네

민노씨.네

블로그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들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만들어왔고 자신의 발전에 매우 많은 도움이 되었던 자세가 비판의 수용이었다. 지금도 역시 비판에 대해서는 같은 방식으로 반응한다. 비판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비판을 위한 비판, 비난이 아닌 경우에만 그렇다.

오늘 레몬가게님의 글<(불)펌 블로깅 보다는 가벼운 블로깅이 훨씬 더 훌륭합니다.>과 민노씨의 글<함께 블로깅하기 – 블로깅의 민주적 가치>을 통해 다시한번 (불)펌, 비판, 대화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인용을 할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 부분을 인용한다고 원작자에게 이야기 해주지 않으면 원작자는 그 인용여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어딘가에 적어둔 어떤 구절을 가지고 나 모르게 사람들이 떠든다면 그것 역시 기분이 나쁘다. 인용의 경우에도 원글에 대한 링크는
확실하게 밝혀야하고 원작자에게 반드시 알려야한다. 똑같은 논리가 링크걸기에도 적용된다.

작성자의 동의와 바른 출처표시가 없다면 위에서 말했던 이유에 근거, 나는 그것을 무개념 포스팅으로 분류한다.

레몬가게

먼저 레몬가게님이 (불)펌질과 인용에 대한 반대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면 일단 (불)펌질에 대해서는 블로그 활동 초기에는 그다지 그에 따른 문제 발생에 대한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 했었고 인용의 부분에 있어서는 출처 표시만으로 필자로서의 의무는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레몬가게님의 의견에 따르면 무개념 포스팅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화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는 (레몬가게님 같은) 작성자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글이 뒷담화1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대화를 원해서 작성한 글이 자신이 빠진 상태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레몬가게님의 마음이 공감이 되었기 때문에 이 후의 포스팅에 인용이나 링크를 할 경우에 작성자에게 통보할 예정이다.

사실 인용문에 대해서 작성자에게 통보하는 행위를 의무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인용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만을 나타내는 것 또는 자신의 생각에 대해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한 도구 정도로 사용할 뿐인데 그런 활동에 작성자로 하여금 끼어들게 할 필요가 있는가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고, 이것은 블로그 정체성에 대한 단상 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블로그를 대화의 공간이 아닌 기록을 남기는 공간으로서만 활용해 왔기 때문에 생겨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운영행태는 이 블로그의 제목(관계 / 단절의 시작은.. ) 중에 있는 (대화의) 단절의 시작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의 이 블로그에는 대화가 거의 없어졌는데 이것은 스스로 자초한 일인 셈이다. 대화가 없는 블로그가 그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일단 관계의 시작이 되게 하고 싶다는 블로그 제목의 의미를 살려야 겠다는 생각을 레몬가게님의 글을 통해 관계의 시작을 바라면서 단순히 기록을 남기는 공간으로 사용했다는 것이 모순이라는 깨달음과 함께 했다.

그리고 인용문의 삽입이나 링크를 작성자에게 통보하지 않은 이유를 한 가지 덧 붙이자면 글을 작성은 하고 있지만 작성된 글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작성자의 글에 댓글을 달거나 인용했다는 글을 달아서 다른 사람들이 부족한 글 솜씨를 보고 업신여기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확실히 이 블로그에서는 지금까지도 정리되지 못 한 듯한 글들이 자주 작성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좀 과장되게 표현되어진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이런 두려움은 여러 공간에서의 글 작성을 취소하는 행동으로 이어진 적이 적지 않게 있어왔다.

위의 두가지 이유(교류, 자신의 창작물 관리)때문에 나는 (불)펌질이 싫다. 특히나 그 글에 대한 독자의 피드백이 해당 원글로 돌아가지 못하게 의도한 펌글은 더더욱 싫다. 의도했건 어쨌건간에 퍼온글이 원글에 제대로 피드백되지 않게 만들었다면 그건 퍼간사람이 절대적으로 잘못한것이라고 본다.(따라서 출처표시가 되었더라도 어느정도 무개념 포스팅에 포함시킨다.) 퍼온글이면 좀 더 확실하게 원글을 이어주어야 하는것이 퍼간 사람의 예의이다.

레몬가게

레몬가게님이 언급하신 작성자들의 대화의 기회를 앗아간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동시에 이미 여러번 다수의 블로거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검색의 최적화 문제의 원인2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뭔가 연결된 레몬가게님의 글의 주제와 살짝 거리감을 가진 듯 하지만 일단 레몬가게님의 비판의 대상이 되어버렸고, 그에 공감되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기 때문에 민노씨.네와 레몬가게님의 블로그 해당 글에 트랙백을 보내며, 이 글이 지적을 위함이 아니라 공감의 표시임을 알린다.

  1. 대화의 주제가 주제의 작성자를 배제한 대화를 뒷담화라고 정의 내려 본다면 말이다.[]
  2. 검색에서 원작자의 글보다 펌질 된 글이 더 상위에 링크되는 것에 대해 여러 블로거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내었다.[]

생각, 사고, 고뇌

상대방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꽤 나 재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목적에서든지 사람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으로부터 얻기 위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최근에 재미있게 보고 있는 카툰이 하나 더 늘었는데, 그것은 죽는 남자이다. 죽을 날이 90여일밖에 남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인데, 죽기전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는 50대의 거대 기업의 중견간부였던 사람에게 자포자기한 삶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요구받은 노인은 고민 끝에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주인공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했던 일은 무엇인가. 생각이다! (사 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생각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상(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지금의 나에게는 더욱 더 필요하다. 31화를 보려고 클릭한 순간, 득도한 듯한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떠 오른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생각인것이다. 다시 말해 떠올리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떠 올린 것을 다른 것으로 이어가고 무형의 구조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게 생각이다.
내 머리에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하게 된 때는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특정 분야인 컴퓨터쪽으로는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은채 개념을 가출시켜버린 일상의 반복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한시라도 뭔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하기 힘들다.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 머리가 폭주해 버린 것일까. 과부하 걸린다는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은 현상이 있는데,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PC에 과부하 걸려서 다운되는 듯한 현상이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잠들어서,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버린다.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 생각을 지속하다가 과부하걸려버리는 그런 경험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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