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 더러움 그리고 나

처음 이 공간을 마련했던 것은 그리 큰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생각을 표현하고, 그것을 누군가 보고 반응하고, 그 반응에 또 반응하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글을 썼던 순간, 조금 더 설명을 더하면 처음 글을 썼던 도구와 지금의 도구는 다르다. 여러 도구들을 거치면서 글을 옮기고 옮겨와 결국 워드프레스까지 오게 되었다.

지난 글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이 보인다. 물론 지금조차도 나는 부족하다. 필력의 부족함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이 있다. 여전히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편이고, 이는 나의 일에 영향이 적지 않다. 이런 부족함으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지난 글들을 숨기지 않고 열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더러움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더러움을 숨기려고 한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더러움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더러움은 나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내 세계관의 기반이 된다. 모든 인간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허구의 세계관을 통해 재미를 얻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같이 더러웠는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우리에게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으며 스스로가 그렇게 사셨다.

오늘도 난 부족함을 느끼고 부족하다. 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100% 완전한 인간, 100% 완전한 하나님,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존재방식을 가지신 분!

불꽃중앙교회에서 사기를 당했다?

바로 전 포스팅 뒤에 통계를 살피는데 14일 방문자가 평소의 두 배 가량이 되어 무슨 일인가 싶어 유입로그를 살펴보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Mobile Terminal이거나 BiteSMS 관련 유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강마리아 목사 사기 라는 검색어로 유입된 흔적이 있어 검색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링크를 따라 검색 결과를 보면서 전에 부모님께서 강목사님 교회가 어려움에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습니다. 그게 사기 건이었는지는 유입 로그를 통해 처음 알게 됐네요. 덕분에 목사님의 본명도 알게 되었구요.

검색 결과 중 제일 상단에 노출된 것이 **할렐루야! 빛된 예수!** – 이 사람을 보라!(수원 불꽃중앙교회 강마리아 목사를!)인데, 링크의 본문은 교회 19주년 감사 예배 사진을 메인으로 소망의 동산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기 관련 내용은 댓글에 나오는데, 댓글의 내용은 대체로 시험들어 나와서 고통 받고 있다 거나 금전적으로 피해를 봐서 소송했으나 폐소했다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댓글을 읽으면서 익숙한 사람들의 이름이 나와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댓글을 적으시는 분들의 태도에 한 번 더 놀랍니다.

그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기를 친 사기꾼이니 막 대해도 되는 사람들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그 분들은 댓글에 나와 있는 행동을 고의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그 분들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이지요. 이단성을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판단하시는 것에 또 한 번 놀랍니다.

댓글을 쓰신 분들에 대해 정죄하는 내용을 길게 적었다가 얼른 지웠습니다. 실수는 저 같은 못난 사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도 실수하지요. 어떤 행동이 오해되어 실수가 된 것일 수도 있고, 또 그것이 완전히 풀어지지 않아 골이 점점 깊어지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미천한 인간인지라 감히 정죄할 수 없어 하나님께 기도하며 어떻게 심판하실지 두고 보는 수 밖에 없겠지요. 그 분들이 사기꾼이면 과연 인간의 법으로도 하나님의 법으로도 심판 받을 줄로 압니다.

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지 함께 기다려보지요. 세월이 흘러 흐지부지 되더라도 추적하여 올리겠습니다.

올리지는 않았지만 링크 글에 달아놓으신 댓글을 캡춰해 저장해 놓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올리게 되더라도 닉네임 등은 처리해서 올리겠지요.

내가 해야할 일은?

※ 상지대 구출 대작전에 이어 쓰려다가 혹 혼란스러워 하실 분이 계실 듯 하여 별개의 글로 작성하고 트랙백합니다.
※ 또한 상지대 관련 내용을 포스팅하는 이유는 이런 사실이 있다는 것을 알려 읽으시는 분들이 스스로 판단하시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사실 전부터 관련 글을 쓰려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아 망설였는데, 이 기회를 빌어 작성하네요. 개인적으로는 교회에서 정치적인 의사를 밝히거나 교회가 정치 세력에 도움이 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욕심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인데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 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 하신
바라

로마서 13장1절

교회의 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시는 분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은 그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비판하는 분들을 욕할 생각 또한 없습니다. 그 분들은 신념에 따라 행동하시는 거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그 행동들이 옳다 그르다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은 해석하는 사람의 이해에 따라 여러가지로 갈라집니다. 그로 인해 분파가 생기고 또 그 안에서 쪼개져 있는 것이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위의 로마서 말씀도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지 않냐는 분이 계실까 또한 조심스럽게 적었습니다.

여러가지로 해석이 나뉘는 것에 대해 말하면 또 그로 인해 싸움이 될까 싶어 명확한 것 하나만 말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내 뜻을 구하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해야한다는 것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2.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3.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장 36~39절

좁게 해석하여 예수의 희생에 대한 것이 아니냐 하시면 또한 무능하여 답할 수 없습니다.

요점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지금의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몸소 하셨듯이 기도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현명한 행동이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그렇기에 행동으로 움직여야한다는 분도 계시겠고 이런 상식도 없는 사람을 봤나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요. 하지만 그 분도 결국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될 수 밖에 없음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청소년 산상성회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2회를 참여하고 글을 작성(우리 보기에는 )한 뒤 벌써 1년이 흘렀다. 그 후에는 산상 성회에서 광고한 약속1이 이행되었다.
자! 올해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하며 일정을 알려드린다!

청소년 산상성회 (제3회)
장소 : 기독교 대한수도원
전화 : (033)452-2594
기간 : 2009년 7월 27일(월) ~ 31일(금)

준비할 것은 간단히 세면도구, 갈아입을 옷가지, 덮을 이불 정도 되겠다. 물론 성경·찬송가는 필수다! 자체 복음성가를 사용하지만 성회의 대상인 청소년에 한 하여 무료로 증정되니 참고하시고, 기타 자세한 사항은 전화하여 문의하시는 수고가 필요하다.

자!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1. 어떤 것인지는 올해 참여해 보시라![]

좌절 낙심

인간으로 태어나 삶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낙심될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 3 :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 : 6

하나님을 신뢰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를 들고 다니며 크게 외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믿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정신적인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보여지게 할 뿐인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게 아닌가!?

믿는 사람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믿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과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겉으로는 믿는다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 사랑은 다만 그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하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면 쾌락을 위한 관계 어떤 만족의 조건을 위한 관계일 뿐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동들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바칠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예비하셨다.

사무엘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며 다만 형식적인 것들을 갖추기만 했을 때이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완벽한 승리자로서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이스라엘의 군사들의 사기,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곁의 제사장들..
하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승리의 조건들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필수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신뢰와 그에 따른 행동들이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사무엘상 4장 3절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직전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게 된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궁리한다. 여호와의 궤가 함께하면 이길 것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다시 이스라엘이 패한 요인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하지 않은 것
  2. 패배의 요인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다시 전쟁에 임한 것
  3.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

1항과 2항은 같은 것이다. 2항과 3항도 연결된다.

여호와께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가 되겠냐 싶겠지만, 다윗을 예로 든다면 그는 항상 여호와께 작은 것이라도 기도하고 임했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며 사울에게서 그의 아들에게서 피할 때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할 때의 그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호와께 구하지 않은채 범죄한다. 이스라엘에게 칭송받는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구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항을 다루기 전에 3항에 대해 집고 넘어간다면 사무엘상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들의 이로운것들을 취함으로써 죄를 범했고, 그로 인해 멸하시기로 정하셨다.

먼저번의 블레셋과의 전투 패배 요인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죄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언약궤와 함께 그들이 있도록 했다.

여기서 아골의 죄를 처벌하고 승리했던 사건과 대조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 7장에서는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충분하다고 판단된 군사를 보냈지만 패한다. 그리고는 패한 이유를 여호와께 구하고, 아골의 죄를 드러내고 처벌했으며 그 후의 전쟁은 승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패전의 이유를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으며, 공식처럼 이것 저것들을 준비하고 전쟁에 임하지만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와 이스라엘 자신들의 실수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동행한다는 것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정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는다. 범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그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바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복을 받으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여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야만 그에 더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목적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는 적은 노력이 들기도 하지만 많은 노력이 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과 목적을 향해 나가면서 신에게 자신의 계획을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기도라는 것은 어떤 것을 빈다는 의미인데, 그 비는 대상이 그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데서 기도가 성립된다.

단순히 보너스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래서 그저 심리적인 만족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신앙의 정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기독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성령의 실존을 믿고 그(들)에게 자신의 목적에 도움이 되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목적에 도움을 달라고 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하나님께 빌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물론 맞기는 하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더 큰 것을 구하고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적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계획 안에서 완성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은 변하기 마련인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그들의 희망대로 움직여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가 맞춰간다면 어떨까.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분(들)의 응답은 때론 이성에 오류를 일으키게하고 비합리적인 것들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결과를 – 물론 좋은 쪽으로 – 이루어 내시기 위해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머리로 이해는 하고 있지만, 일상에서 그것을 행하기란 정~~~~말 어렵다.

순종

노아는 이렇게 이상한 배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대단한 순종이다. 우리들은 믿을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고 한다. 우리는 이성을 설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거나 부정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신비에 대해 무지하며, 하나님의 주권 앞에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에도 인색하다.

출처 : 채워주심1

순종이라는 것은 사실 대단히 힘든 일이다.

장담하지만 당신들이 이성적으로 믿을 수 없는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당신들보다 잘 살 수 있다. 물론 당신들은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하겠지만 말이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211.[]

내려놓음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 놓기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명백한 실체가 있는데, 이러한 알토란 같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내려놓아야 할 것이 내 눈물과 내 피가 섞인 것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내려놓지 못한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잠시 내려놓는다고 해도 언제라도 수틀리면 다시 집어들 생각을 하며 손닿는 가까운 곳에 둔다.
내려놓음이란 믿음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눈물의 헌신이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내려놓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려놓는 우리의 손길이 떨리고 있는지 아니면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지도 보시는 분이시다.

채워주심1

내려놓음이란 이런 것이다. 에서 언급한 나아만 장군도 자신의 권위와 고집을 내려놓았을 때에 문둥병을 고침 받았다.

최근의 내게 내려놓음이란 상호작용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활동하던 선교단에서의 활동들을 내려놓고, 이성교제도 내려놓았다.

이성교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이해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있다. 둘 중의 어느 쪽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에 순종하고 따를 때 더 나은 상황과 여건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경험을 기억하고 다시금 자신을 정비해야 한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하나님께 부름받기 시작하면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분명하게 정리가 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람들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정리가 분명하지 않다.

선교단의 문제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을 이어받아 줄 사람이 없다.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관리하며, 관련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해시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p.144-145.[]

순종의 태도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생각 조금하고 기도 많이 해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일하러 갈 수 없다. 바로 가자! 그리고 뭐가 되든지 간에 꼼지락거려보자!

(중략)

채워주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중히 보시는 것, 그것은 종다운 순종의 태도다!

출처 : 채워주심1

순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순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복종하다2이다.
순순히 복종하기 위해선 복종의 대상,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마음에서부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따르는 것은 순종이라고 할 수 없다.
유명한 위인들의 주변에는 자원해서 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은 그 위인에게 적지 않은 존경심을 가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존경심은 감사의 형태를 띄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따르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순종과 감사는 하나의 팩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순종하고 존경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접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노력한다.
내게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모두를 알 수는 없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감사에 대한 행동 표현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는 있겠지만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마음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137.[]
  2. 순종(順從)【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순순히 복종함., 민중국어사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일 뿐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하의 글을 기독교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신앙 고백이지만 사실에 근거하여 글이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그 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근 한달여를 RSS구독을 미뤄왔다.1 그러다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그 동안 읽지 못했던 포스팅들을 읽어내려가고 있다.

그러던 중 오늘은 리디의 생각하는 섬 바닷가의 글들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On your mark님께서 작성하신 글을 읽다가 문득 다음 부분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다만 인간입니다.

그렇다. 인간은 신(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다 안다는 듯이 사고를 하고 비판을 해댄다. 그게 무슨 신이냐. 인간을 만들었으면 그를 사랑한다면서 왜 그렇게 고난을 주고 힘들게 놔두느냐. 신 따위 없는게 아니냐. 혹시 포기한 것은 아니냐.

인간은 성경과 역사적인 근거들을 통하여 이성의 힘을 빌어 그를 정의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다면 난 흥미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끝 없는 탐구의 존재 아무리 알려고해도 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더 흥미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저 부분에 시선이 멎은 것은 아니다. 바로 필자의 인생에서도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정의내려버리고는 그것과 달라버리거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으로 이어지면 신은 없다. 그 따위 것은 심리적인 의존일 뿐이다. 라고 단정해버린다.

과연 그런가. 필자는 – 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 굉장히 의심이 많은 인간이다. 모태신앙인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다. 끝 없이 부정하고 오해하고 투덜였다. 완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완전히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건 지금의 필자가 있기까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할 수 없었던 성격적인 면이나 성품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필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고 변화를 구하고 난 시점 뒤에 눈에 띄일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인간이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오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는게 확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렇게 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밥 한 숟갈 먹였다고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먹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것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자들까지도 피해를 보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쓸 이유가 없다.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줄 것을 권면하여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중에는 개인이 먼저 권면하고, 교회의 직책을 가진 자들에게 권면을 요청하고, 교회에 권면을 요청해도 안되면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냥 방치하는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방치 이전에는 분명히 단계적인 권면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느끼는 인성, 성품의 변화를 아무런 행동이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분명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으셨고, 그로 인해 변화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필자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시며 적극적으로 힘이 되어 주시지만 어떤 행동에 대해 꾸짖거나 하지 않으셨다. 물론 그런 것이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필자에게 있어서는 적절한 대응 방식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글이 좀 길어졌는데,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것은 인간들이여 자기 중심적 생각으로 신을 정의하지 말라 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진정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기를 구하고 – 기도하고 – 노력하라는 것이다.

  1. 방학이 끝나면서 Google Reader라는 존재를 알면서 HAN RSS에서 갈아타보려고 사용해 보고 있는데 글들을 쭉 읽으면서 웬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한 RSS와는 별 다른 기능의 차이는 없는듯 한데 어딘가 불편하다.[]

사랑 시리즈 2

서울에서 살다가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 아버지의 일 때문에 부천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앞서 1편에서 부교역자로 계시던 교회에서 나와 개척을 하게 되신것이다. 그렇게 남자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1년 반을 지내고 졸업을 했지만 친한 친구는 사귈 수가 없었다. 물론 남자 중학교였기 때문에 여자와의 관계는 가질 수 없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성적인 성격이고 다른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노력이 없었다고 해야할 듯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남녀공학이었다. 남녀공학에도 남자와 여자를 각기 다른 반에 편성해 운영하던 학교였지만 과의 특성상 여자가 더 많았고 해당 과에 배정된 반이 2개 반이어서 남녀 합반으로 편성될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3년 내내 같은 반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1학년에 입학해서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된다. 하지만 중학교 시절 한 껏 내성적인 성격으로 지냈던 것에 후회라는 것을 하게 됐다. 고등학교에서는 좀 더 활달한 사람이 되자는 목표아래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해 버렸다. 이 계획에 다행히 도움이 되었던 것은 담임 선생님께서 자유로이 자리를 정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었다. 난 문간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친구들에게 모두 인사하기 시작했다. 같은 중학교에서 온 친구들은 모두 다른 반으로 흩어졌기에 인사하는 친구들은 모두 새로운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시작하면서 보게된 그녀였다. 피부가 백성공주라고 불리워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하얀 친구였다. 지금도 그녀를 처음 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인다. 물론 지금은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렸지만, 그녀는 내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설레임..

문간에 앉아서 인사를 하면서 내성적인 성격이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녀와는 그런 친구들 중에 한 명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는 3년 간의 one side love가 시작되었다. 고지식하다고 하겠지만 한 여자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다른 여자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1학년 중간고사를 보고나서인지 2학년이 다 되어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고백을 하게 되었다.

고백의 결과는?

학교를 마치고 다른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간데다가 버스 정류장에는 그녀와 그녀의 친구, 그리고 내 친구와 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좋아하는데 사귀면 어떻겠냐는 질문을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고등학교 때에는 아무도 사귈 생각이 없다였다. 그 대답은 완곡한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를 먼저 버스를 태워 보내고 나서 애꿏은 정보지 통을 발로 차 버렸다. 내성적인데다가 눈물이 많은 필자는 집에 가서 펑펑 울어제꼈다. 그렇게 울고 있는데, 집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라며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였다. 그녀에게 전화번호를 알려 준 적이 없었는데, 어찌 저찌해서 알아냈다며 자신의 감정을 밝히려고 전화했다고 했다. 필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진짜로 사귀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고백할 때 곁에 같이 있어줬던 내 친구가 한 마디 한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녀석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기는 하지만 일단 이 것에 대한 확인은 추후에 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간을 짝사랑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포기가 되어졌다. 그리고는 취업을 나가고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채팅에서 만난 사람들과 번개를 하면서 지냈다. 주로 1:1 만남이었고 대상은 여자들이었다. 나름대로 여성에 대한 면역이 생긴정도를 넘어서서 적절한 작업이 가능한 성격으로 변화해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OT를 지내고 나서 한 친구에게 사귀자고 했다. 고등학교 내내 사랑했던 그녀와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다른 여자를 사귀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으로 사귀자고 했던 친구였다. 물론 호감이 가는 친구였기 때문에 사귀자는 제의를 했었지만 그 친구와는 그리 오래 사귀지 않았다. 호감을 느끼긴 했지만 사귀자고 했던 목적이 불순했다는 솔직한 얘기로 이별을 고했다.

CC로 사귀었던 친구와 사귀기 시작한지 얼마가 되지 않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고등학교 때의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는 나에게 사귀는 여자친구가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 친구는 정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사귀고자 했던 것이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 순간이었다.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다는 말에 조금 놀라는 듯해서 니가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다른 친구를 사귀었다는 말에 고등학교 때는 그랬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화가 나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 하고 전화를 끊었다.

웬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나 라는 존재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3년 간의 짝사랑은 마무리 되어졌다. 아니 마무리 되어진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그녀는 나를 설레이게 만들고 있으니까 말이다.

컴퓨터 재설치했다~~

어제(8월 20일) 아버지께서 노트북이 생기셔서 집에 있는 데스크탑을 주셨다.
하드를 옮겨다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원래 쓰던 케이스를 그대로 쓰려고 메인보드랑 다 작업하려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냥 하드만 바꿔달라고 하시기에 뭐.. 조금 귀찮기도하고 그래서 그냥 하드만 두 개 떼어달기로하고는 본체를 해부해 놓고 하드 달아놓고 윈도우 설치하는데… 아! 이게 웬일인지 문제 발생!!
워낙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자료들이 방대해서 원래 쓰던 마스터 하드를 자료 저장용으로 바꾸구 아버지께서 쓰시던 하드디스크에 운영체제만 깔아서 쓰기로 하고 작업하고 있는데, 운영체제를 깔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중에 운영체제가 이상하기에 재시작(역시 윈도우의 모든 해결은 재시작?!)
엌! 이런… 재시작하는데 운영체제가 오류 발생!

hal.dll이 손상되었거나 없습니다.

윈도우 설치 CD를 넣고 복구 콘솔로 확인해 보니, 80기가 짜리 하드가 아닌 160기가짜리(원래 마스터였던 디스크)인것이 아닌가! 그래서 CMOS 셋업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운영체제를 깔았던 디스크를 인식 못하기에 PC에 붙어있는 디스크를 살폈다. 역시나! 하드가 죽어버렸던 것!
무슨 이유에선지모르겠지만 하드가 진동하지 않았다. 나머지 2개의 하드는 이상 없이 진동하는 것으로 봐서는 메인으로 삼으려 했던 디스크가 오래되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얼마전 리디의 생각하는 글 중 먹통이 된 컴퓨터의 본문내용이 머리속에 급격한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시간을 보니 새벽예배 시작시간이 지나고 있었고, 하나님 왜 이런건가요하고 기도해봐도 도무지 해결방안이 생각나지도 않고 복잡해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삼성 서비스센터에 가서 인식 불가의 이유로 하드디스크를 교체해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시 삼성!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집에 와서 다시 윈도우 설치하고 인증을 받고 재시작하는데 또 다시 새벽과 같은 일이 생겼고, 또 다시 서비스센터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체해오는데 서비스 기사 曰 “또 다시 안되면 계속 바꿔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가져가면 다른 쪽으로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살펴보세요”.

그렇게 집에 와서 설치하는데, 잘 되는가 싶더니 설치 완료후에 재시작하는데, 이번엔 블루스크린이!!
이젠 한계에 다다랗다. 의자에 올라 무릎사이로 머리를 넣고, 양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인거죠? 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로 한것들(서원)을 시행하지 않아서인가요? 이것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기게 하기 위해 준비해주신것 아니던가요? 이젠 모르겠어요. 하나님보다 컴퓨터를 우선시해서 그런건가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설치 중간에 읽었던 말씀 본문이 생각났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수기 30장 2절)

과부하걸린 머리를 쥐어싸고는 잠시 잠에 들었다 깨고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윈도우를 다시 설치하는데, 이번엔 설치된것을 복구하니 잘 되었다.

역시 뭔가 하나님앞에 걸려있으면 문제가 생겨버린다.
참… 리디님 글을 읽으면서 “이거 나도 좀 위험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생활했어야하는데, 역시나 하나님은… 멋쟁이!!

조금 더 기도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대화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당신께 다가가길 원하셨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