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가 필요한 일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순종하라!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을 겪고 난 직후에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의욕을 잃었다. 사는 것의 소중함이나 일상의 소소한 기쁨 따위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어진 순간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 목숨을 쉬이 끊고자 하는 생각까지 가지지 않는 인간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순간도 없지 않았다.

의욕상실

많은 포기와 자기 부정을 겪고 난 뒤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이다. 심지어 적지 않은 나이1에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같은 고민이 그 스트레스의 시작점이다.

노화를 퇴화가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 결코 뒤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6

‘마흔에게’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부분, 특별히 이 책에서는 노화가 몸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마흔 살의 변화에서 힘을 잃고 의욕을 잃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나고, 내 삶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별히 지금 공부하고 있는 독일어, 그리고 그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방향성2을 거부하고 내가 가진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중년이 되면 평가나 평판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11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던가? 나 자신에 대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과 큰 일을 겪게 된 원인이 나라는 자책감 등이었다는 점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생각이 아닌듯하다. 나에게 없는 것을 먼저 살피고 생각한다.

책 리뷰는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는 가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좋은 것이라고 한다. 같은 관점에서 생각을 더 이어 나갈 수가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참 많다. 인간으로서 몸을 가지고 있고, 부모를 가지고 있다. 주변의 환경들 가운데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공기와 자연,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가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공공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가진 것이다.

이 많은 것들을 주신 분, 허락하신 분은 우리에게 아무 가치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셨고 그저 누리고 있다.

내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삶의 큰 일 가운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어떤 위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듣기를 원하시는 그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방식인 것이다.

다른 세계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나의 신앙고백은 ‘그래,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정도로 생각되는 ‘다른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 그가 누구라도 – 당연히 해야할 고백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누구라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이런 세계관에 속해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관을 무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가 기록된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청교도는 거짓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한다. 거짓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열매로 증거된다른 성경의 기본적인 증언을 통하여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당연히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우셔야 할 우리 인생의 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1. 물론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나이겠지만[]
  2. 금전적인 부분으로의 방향성[]

모심기

오늘은 모심기 2일차였다.
사실 저번주에는 이양기1를 이용해서 심었는데, 어제와 오늘은 손으로 모심기를 하였다.

모를 어떻게 심는지에 대한 설명을 간단하게 듣고 심기 시작했는데, 적잖이 어려웠다. 적당량을 뜯어내는 것도 일이고, 심는 것 또한 일이었다.

논에 진흙이 적당량이 깔려 있으면 그나마 심기가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흙을 끌어다가 별도로 모아줘야한다.

일단 모판에서 적당하게 손에 덜어서 들고는, 못줄 위에 있는 빨간 표시에 손을 넣어 심을 수 있다.

손의 모양은 표창을 던지는 것과 비슷한데, 표창을 잡듯이 손가락을 모으지는 않는다. 한 가닥을 한 포기라고 셈하는데, 이번에는 4~5포기 정도로 심었다.

심을 손으로 5포기 정도를 뜯어서 중지위에 뿌리가 놓여지고 엄지손가락으로 윗 부분이 펴지도록 잡으면 심을 준비는 된 것이다.

그리고는 물이 있는 진흙에 심는데, 심는다는 표현보다는 붙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왜냐하면 진흙에 뿌리가 붙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넣어 대주어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하고나면 허리도 뻐근하고 어깨도 적잖이 아픈데다가, 심는 중에는 뙤약볕 아래에 있기에 따갑기도하지만, 솔찮이 재미있다.

다른 농가들은 대부분이 이양기를 이용해 심기 때문에 기회를 가지기 쉽지가 않은데, 기회를 가지고 싶으면 손모를 심으로 매년 5월 중순에 방명록에 남기기 바란다.

  1. 모를 심는 기계[]

감사와 불평의 차이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 차이이다. 사실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일상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주의 말씀에 살기로 작정하고 그것에 스스로 자원하여 따른다면 그렇지 않았을 때 느꼈을 불편함을 느끼지 않듯이, 불평의 상황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자원하여 감사한다면 쉽다.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 분명 하루 종일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안되기만 하는 날에도 감사해야하는가의 문제와 불평도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하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그의 말씀에 따르고 지혜를 좇기를 바라시지 말씀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 심판을 받기 원치 않으신다.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어둠 가운데서 빛이 비추면 더 밝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방치

요즘 블로그를 한동안 방치해 두었다. 방문조차도 하지 않고, 누가 댓글을 남긴건지 확인도 하지 않았다. 사실 공지를 하고 일정을 진행했다면 이렇게까지 장기간 방치되지 않았겠지만, 일단 이렇게 17일까지는 정신 없을 듯하다.

다들 즐거운 여름 휴가 보내시기 바란다~

미루었던 글쓰기

밀린 글을 쓸 때 가장 큰 문제점은 아무래도 쓰려고 마음 먹었을 당시의 느낌을 100% 되살리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쓸 내용은 매우 밝고 긍정적인 내용인데, 쓰려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우울하고 서글픈 때는 다소 난감해집니다.


정말 난처했다.

이번에 끝난 학기 중에 상담과목이 있었는데, 기혼 친구의 이혼 문제에 대한 상담을 한 것이 3월이었고, 그 친구와 상담한 것을 상담 사례로 제출하기로 하고는 다른 과제들에 밀려서 미루고 미루어졌다.

사실 그 과제의 제출일은 기말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기때문에 한참을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었다.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스스로에 대한 판단에 간단한 기록을 스프링 노트에 남겨두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대화의 전체 내용을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사실 상담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내담자1가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약간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대로 미루고 미루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거의 다 마치게 되었을 즈음에 가서야 조금 여유가 생길것이라는 생각으로 지내었는데, 학기 말은 그런 생각으로 미루어 둔 과제들이 몰려있기 마련이다. 이번 학기에는 조금 나은 형편이라고 말할 수 없고 되려 더 심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간단히 기록을 남겨둔 것에 힘입어 열심히 열정적으로 그 내용들을 기억해 내어 다 작성하긴 했다.

하지만 제출하기 위해 살피면서 그 때의 절박함2이 다 표현되어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과 같은 표현력이 필요한 부분이 아닌 사례 자료였지만, 좀 아쉬웠다.

역시! 글은 그 때 그 때! 글 뿐만 아니라 생각났을 때 얼른 처리해 버리는 것이 속 편하고 그것 나름대로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1. 상담을 청해온 사람[]
  2. 그 친구는 작년에 결혼해서 6개월 가량의 신혼이었는데, 이혼 상담을 청해왔음.[]

일! 끝도 없어..

뭔가 일을 만들어내는데에는 천재적이라고 자부할 만큼 지루할 틈이 없다.
지루할 틈이 없다는 건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지루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건 다른 말로하면 쉴틈이 없다는 것인데, 지루한 걸 싫어하는 편이어서 뭔가 일을 만드는게 무의식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사람들이 뭔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는 편이어서 도와줄 능력과 시간이 조금이라도 된다면 도와주겠다고 해버리니, 이거 일 = 생활 이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다.
바쁜게 좋다고는 하지만 가끔은 그렇게 쳇바퀴를 굴리는 다람쥐 같은 느낌이 들어버리면 이거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요즘같이 학기가 시작되어 과제들이 치고 밀어 들어오는 가운데에서도 일을 만들어 버리니 스스로도 미칠 지경인 경우도 적잖이 발생해 버린다.
하지만 대부분은 감당할 정도만 일을 만들기 때문에 즐겁다. 즐겁지 않더라도 흥얼 흥얼 가만히 앉아서 일들을 처리한다.

밤새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었던 지난날의 경험들로 인해서 뭔가 붙잡으면 밤 새는건 기본이고, 다음날 일정을 잠도 없이 쭉 처리해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나이라는 것을 한 살 먹어버려서인지 적잖이 무리가 된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작년까지는 밤새 달려 놀기에도 뭔가 붙잡고 하기에도 무리 없었는데, 나이가 먹어서라기 보다는 운동의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일까.

운동도 한다 한다 말만 늘어놓고는 제대로 되어지지를 않는다. 네이버로부터 퍼온 초기의 포스팅처럼 무식하게 운동할 때도 있었지만, 한번 귀찮아져버리니 쉽게 귀찬음을 떨쳐버리기가 힘들다.

뭐… 쨌든 일 하는건 즐겁지만 스스로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조절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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