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함, 더러움 그리고 나

처음 이 공간을 마련했던 것은 그리 큰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생각을 표현하고, 그것을 누군가 보고 반응하고, 그 반응에 또 반응하는 것이었다.

사실 처음 글을 썼던 순간, 조금 더 설명을 더하면 처음 글을 썼던 도구와 지금의 도구는 다르다. 여러 도구들을 거치면서 글을 옮기고 옮겨와 결국 워드프레스까지 오게 되었다.

지난 글들을 보면 나의 부족함이 보인다. 물론 지금조차도 나는 부족하다. 필력의 부족함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이 있다. 여전히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느끼는 편이고, 이는 나의 일에 영향이 적지 않다. 이런 부족함으로 인해 오해가 생기고 일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지난 글들을 숨기지 않고 열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나의 더러움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더러움을 숨기려고 한다. 그것은 숨겨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더러움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다.

더러움은 나에게 필수적인 것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내 세계관의 기반이 된다. 모든 인간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허구의 세계관을 통해 재미를 얻기도 한다. 혹은 잘못된 세계관을 가지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죄로 더러워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같이 더러웠는가? 그렇지 않다. 그 분은 우리에게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셨으며 스스로가 그렇게 사셨다.

오늘도 난 부족함을 느끼고 부족하다. 이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100% 완전한 인간, 100% 완전한 하나님,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존재방식을 가지신 분!

오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일은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어딘가 다닌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의 여행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친구는 많지만 친한 친구는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친구들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전산반으로 활동했었는데, 선도부와 환경봉사부1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로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날 저녁에 누군가 술을 구해왔다. 소주와 맥주를 가져왔는데, 모두 모여서는 아니지만 각 인맥 집단별로 앉아서 간단하게 마시고 취해 있었다.

필자는 취기로 인해 기억이 끊긴다거나 기억의 오류2가 없어 때론 곤혹스럽기까지 한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취기가 올라 더워서였는지 평상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 평상에는 다른 친구와 교제하고 있었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친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단지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하거나 몇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그 여자친구와 교제하던 친구가 같은 반이었는데 자기 여자친구와 필자가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 뿐인데, 그걸 키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다. 분명히 그 친구가 잘 못 본것이라고 계속 대답했지만 도무지 믿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 친구 얼마나 집요한지 한달 넘게 쫓아다니면서 그 문제를 두고 의심하는 것이다.

조금 더 지나니까 설상가상으로 증인 선배까지 나타났다!!! 자기가 둘이 같이 있으면서 키스하는 것을 봤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억울하기도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니라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시달리다가는 그 친구에게 확실하게 말해주고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1. 각 반별로 청소구역이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을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봉사집단[]
  2. 잘못 기억되어지는 것, 사실 그대로 기억되지 않고 다른 기억으로 대체되는 일 따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일 뿐

사용자 삽입 이미지이하의 글을 기독교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신앙 고백이지만 사실에 근거하여 글이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그 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근 한달여를 RSS구독을 미뤄왔다.1 그러다가 방학을 시작하자마자 그 동안 읽지 못했던 포스팅들을 읽어내려가고 있다.

그러던 중 오늘은 리디의 생각하는 섬 바닷가의 글들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On your mark님께서 작성하신 글을 읽다가 문득 다음 부분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포기하는 것은 다만 인간입니다.

그렇다. 인간은 신(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다 안다는 듯이 사고를 하고 비판을 해댄다. 그게 무슨 신이냐. 인간을 만들었으면 그를 사랑한다면서 왜 그렇게 고난을 주고 힘들게 놔두느냐. 신 따위 없는게 아니냐. 혹시 포기한 것은 아니냐.

인간은 성경과 역사적인 근거들을 통하여 이성의 힘을 빌어 그를 정의하려고 하지만 그렇게 쉽게 정의될 수 있다면 난 흥미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끝 없는 탐구의 존재 아무리 알려고해도 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더 흥미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단지 그런 이유에서 저 부분에 시선이 멎은 것은 아니다. 바로 필자의 인생에서도 같은 생각을 갖도록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을 정의내려버리고는 그것과 달라버리거나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이라고 생각되는 사건으로 이어지면 신은 없다. 그 따위 것은 심리적인 의존일 뿐이다. 라고 단정해버린다.

과연 그런가. 필자는 – 전에도 말했을 테지만 – 굉장히 의심이 많은 인간이다. 모태신앙인이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지 않았다. 끝 없이 부정하고 오해하고 투덜였다. 완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완전히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건 지금의 필자가 있기까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할 수 없었던 성격적인 면이나 성품적인 면에서의 변화는 필자가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하고 변화를 구하고 난 시점 뒤에 눈에 띄일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인간이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오해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는게 확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즉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렇게 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밥 한 숟갈 먹였다고 배부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인간이기 때문에 욕먹을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건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것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자들까지도 피해를 보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면서 악행을 일삼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쓸 이유가 없다. 그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줄 것을 권면하여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성경중에는 개인이 먼저 권면하고, 교회의 직책을 가진 자들에게 권면을 요청하고, 교회에 권면을 요청해도 안되면 그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냥 방치하는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방치 이전에는 분명히 단계적인 권면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느끼는 인성, 성품의 변화를 아무런 행동이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분명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있으셨고, 그로 인해 변화되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필자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이시며 적극적으로 힘이 되어 주시지만 어떤 행동에 대해 꾸짖거나 하지 않으셨다. 물론 그런 것이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한 필자에게 있어서는 적절한 대응 방식이셨다고 말할 수 있다.

글이 좀 길어졌는데,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것은 인간들이여 자기 중심적 생각으로 신을 정의하지 말라 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진정한 하나님의 속성을 알기를 구하고 – 기도하고 – 노력하라는 것이다.

  1. 방학이 끝나면서 Google Reader라는 존재를 알면서 HAN RSS에서 갈아타보려고 사용해 보고 있는데 글들을 쭉 읽으면서 웬지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한 RSS와는 별 다른 기능의 차이는 없는듯 한데 어딘가 불편하다.[]

요엘이 약속했다?

필자가 필요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섭렵하던 가운데 최복태의 알기쉬운 신학이야기가 발견 되었다. 이 책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책인데 전반적으로 신학에 대한 지식을 두루 쉬이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초반을 읽고 있다가 이런 부분을 발견했다.

120문도가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 체험을 기록한 후의 부분인데,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어떤 이들은 저희가 술에 취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베드로는 군중에게 술 취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약속했던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다(사도행전 2:16, 21)1

위의 색이 다른 부분이 문제인데, 요엘이 약속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엘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 가지고 뭘 따지고 드느냐 지은이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 하시는 분이 계실까 적어두지만 이 부분을 문제 삼는 것은 이 책의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학생들과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2

이에 관해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 담긴 성경 구절을 함께 적어 두자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3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4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5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6
No, this is what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7
But this is that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8
but this is what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Joel:9

오해라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시작되어 그것이 해결되기 전에는 그 골이 깊어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이 초판인 것을 감안하고 다음 판에서는 이런 사소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이 수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최복태 지음, 알기쉬운 신학이야기, (서울 : 크리스챤 헤럴드, 2007), pp. 38-39.[]
  2. Ibid, p. 10.[]
  3. 개역한글[]
  4. 개역개정[]
  5. 공동번역[]
  6. 표준새번역[]
  7. NIV[]
  8. KJV[]
  9. NASB[]

신랑은 어딜가고…

어제 동생이 저녁 늦게 퇴근해오면서 뜬금없이
   “여봉~ 저 왔어요~”
라는 것이다. 그러더니 혼자 뭐가 재밌는지 킥킥 웃는다. 그러면서 얘기를 시작했는데, 동네 가게에 들어갔는데 주인 아저씨께서
   “신랑은 어딜가고 오늘은 왜 혼자여~”
라고 하시더란다. 그래서 황당해하며 아저씨께 오빠라고 했단다.
그랬더니 실수할 뻔 하셨다면서 동생이 어디갔어요~ 라고 대답하면 “둘 다 크니께 애들도 크겄구먼, 몇살이여?”라고 물어오시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젊은 사람들이 친인척 손윗 남자들에게 부르는 호칭처럼 남편도 똑같이 불러서 헛갈리신다고하셨단다.

아무리 별 다른 행동한것도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을 가지신건지.
나이가 그렇게 보일만한 나이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