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기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면서 동네 형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그렇게 타고 싶었더랬다.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가면 항상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나는 그저 친구들과 뛰어노는게 전부였다.

내용을 이어가기 전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초등학교는 산등성이에 있어서 학교 운동장이 끝나는 지점에 경사가 5m가량 있고, 그 경사면이 끝나는 지점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이 튼튼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저 녹색 그물로 되어 있는 그런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10m가 넘는 절벽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가정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양새였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그 형에게 한 번 탈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의외로 바로 핸들을 내 주었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이미 배운적이 있었고, 그 동안 타고 싶어했던 마음을 가득 담아 페달을 밟으며 신나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법 오래 탔던 것인지 형은 이제 그만타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에겐가 멋지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나는 그 경사로가 있는 운동장의 한 구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멈추어 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힘껏 쥐어도 자전거는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끝네 살포시 올라와 있는 연석을 넘어서 경사로쪽으로 몸이 날아갔다. 마치 이티의 한 장면처럼 자전거와 나는 한 몸이 된 듯이 날아갔다.

운동장 끝네 닿기 전 자전거 주인이었던 형은 무엇인가를 힘차게 외쳤지만 나는 그게 그만타라는 말이었겠거니 하고 무시했다. 다행스럽게도 돌에 부딪히며 속도가 줄어서였든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서였든지 나는 그물 구조물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아래로 떨어졌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라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에피소드이긴한데, 사실 이것보다 위험한 순간은 더 많다. 또 언젠가 생각나면 적기로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작은 용기가 필요한 일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순종하라!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을 겪고 난 직후에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의욕을 잃었다. 사는 것의 소중함이나 일상의 소소한 기쁨 따위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어진 순간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 목숨을 쉬이 끊고자 하는 생각까지 가지지 않는 인간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순간도 없지 않았다.

의욕상실

많은 포기와 자기 부정을 겪고 난 뒤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이다. 심지어 적지 않은 나이1에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같은 고민이 그 스트레스의 시작점이다.

노화를 퇴화가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 결코 뒤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6

‘마흔에게’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부분, 특별히 이 책에서는 노화가 몸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마흔 살의 변화에서 힘을 잃고 의욕을 잃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나고, 내 삶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별히 지금 공부하고 있는 독일어, 그리고 그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방향성2을 거부하고 내가 가진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중년이 되면 평가나 평판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11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던가? 나 자신에 대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과 큰 일을 겪게 된 원인이 나라는 자책감 등이었다는 점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생각이 아닌듯하다. 나에게 없는 것을 먼저 살피고 생각한다.

책 리뷰는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는 가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좋은 것이라고 한다. 같은 관점에서 생각을 더 이어 나갈 수가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참 많다. 인간으로서 몸을 가지고 있고, 부모를 가지고 있다. 주변의 환경들 가운데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공기와 자연,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가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공공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가진 것이다.

이 많은 것들을 주신 분, 허락하신 분은 우리에게 아무 가치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셨고 그저 누리고 있다.

내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삶의 큰 일 가운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어떤 위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듣기를 원하시는 그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방식인 것이다.

다른 세계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나의 신앙고백은 ‘그래,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정도로 생각되는 ‘다른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 그가 누구라도 – 당연히 해야할 고백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누구라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이런 세계관에 속해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관을 무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가 기록된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청교도는 거짓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한다. 거짓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열매로 증거된다른 성경의 기본적인 증언을 통하여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당연히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우셔야 할 우리 인생의 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1. 물론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나이겠지만[]
  2. 금전적인 부분으로의 방향성[]

좌절 낙심

인간으로 태어나 삶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낙심될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 3 :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 : 6

공인은 쉬운게 아니다.

슈퍼 쥬니어의 동해라는 친구가 중국 팬들이 있는 곳에서 욕설을 해서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동해라는 친구가 욕을 한 상황이 참 난감하다. 팬들이 경찰이 만들어 놓은 저지선을 뚫고 들어와서 쉬이 짜증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일반이었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상황이고 말이지만, 공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이게 동영상으로 촬영이 되어서 중국으로부터 한국까지 퍼져 왔다는게 또 문제다.

동해라는 친구가 그 상황이 있기 전에 개인적으로 심기가 불편했을 수도 있고 그 상황 자체가 그 친구의 기분을 나쁘게 했을 수도 있는데, 다시말하지만 공인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목사님을 비롯한 교회 직분을 맡은 사람도 말하자면 공인인데, 공인으로서의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성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단지 마음 속에 저런 감정이나 생각이 들어서 저지시키는 수준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완전히 변화되어서 그런 마음이 아주 들지 않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러서 목회자로서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나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공인으로서의 자세, 삶의 태도, 생각까지도 통제해야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비로소 바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인덕을 갖추어야 할 이유

나는 누가 뭐래도 기독교인이다. 지금까지 어디를 가서든 당당하게 밝혀 왔고,이후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렇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인덕을 가지고 있었냐는 질문에는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사실 지금까지 꽤나 자유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지 못 했다는 얘기다. 오히려 그런 모습으로 인해 시험당하고 아파했던 사람들이 있었을거라는건 분명한 일이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기독교인이고, 신학생이라는 신분의 변화는 없다. 하지만 인성의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에 부정할 수 없다. 이전과 달라지게 된 것은 진심으로 주의 뜻을 받들기 시작했던 그 시점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전의 활기차고 쾌활했던 모습들을 생각하고,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왜 그렇게 시큰둥 해 졌니?”,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거니?”라고 걱정들 한다. 이제 익숙해져 가고 있겠지. 성화가 성격의 변화를 말하지는 않지만, 조금 더 겸손해졌다고 스스로 느껴진다.

내 삶을 드린 그 순간, 인덕을 갖추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뜻에 따라 이끌려 간다는 것..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이고, 갈구하는 것 중 하나이다. 최근 이전에도 여러번 하나님의 뜻을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나 노력은 있었지만, 그것이 꼭 직접적으로 음성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제 선교단에서 인생 그래프라는 시간을 가졌는데, 2명의 인물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얘기해주는데, 참… 그 가운데서 그들의 상처를 알 수 있었고, 또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떤 계기로 선교단에 들어왔는지. 그 사람들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인간은 끝없이 갈구해도 모자랄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친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시간엔 이래 저래 웃기만 하고 있었지만, 나란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연구해 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사명감(!)마저도 불타오르게 됐다.

끝없이 발전시키고 변화시켜도 모자라고 부족하기만 한 불완전한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