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기가 필요한 일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순종하라!

인생에 있어서 ‘큰 일’을 겪고 난 직후에 인생의 모든 분야에서 의욕을 잃었다. 사는 것의 소중함이나 일상의 소소한 기쁨 따위에 신경 쓸 여력조차 없어진 순간은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 목숨을 쉬이 끊고자 하는 생각까지 가지지 않는 인간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순간도 없지 않았다.

의욕상실

많은 포기와 자기 부정을 겪고 난 뒤에 다시 시작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무엇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스트레스이다. 심지어 적지 않은 나이1에 무엇인가를 새로 시작해야 하는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과 같은 고민이 그 스트레스의 시작점이다.

노화를 퇴화가 아니라 변화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년의 삶은 청년의 삶과 비교할 대상도 아니고 결코 뒤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공만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은 성공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6

‘마흔에게’는 인간의 변화에 대한 부분, 특별히 이 책에서는 노화가 몸에 느껴지기 시작하는 마흔 살의 변화에서 힘을 잃고 의욕을 잃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나고, 내 삶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인 상태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려주는 지표를 발견하게 되었다.

특별히 지금 공부하고 있는 독일어, 그리고 그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는 방향성2을 거부하고 내가 가진 방향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중년이 되면 평가나 평판에 개의치 않고 순수하게 배우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이 든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마흔에게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p. 11

무엇이 나를 힘들게 했던가? 나 자신에 대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과 큰 일을 겪게 된 원인이 나라는 자책감 등이었다는 점은 언제부터인가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에게 기본이 되는 생각이 아닌듯하다. 나에게 없는 것을 먼저 살피고 생각한다.

책 리뷰는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는 가진 것을 생각하는 것이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좋은 것이라고 한다. 같은 관점에서 생각을 더 이어 나갈 수가 있다.

우리가 가진 것

우리가 가진 것은 참 많다. 인간으로서 몸을 가지고 있고, 부모를 가지고 있다. 주변의 환경들 가운데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공기와 자연,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가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소유가 아닌 것을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공공재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우리가 가진 것이다.

이 많은 것들을 주신 분, 허락하신 분은 우리에게 아무 가치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셨고 그저 누리고 있다.

내가 바닥이 보이지 않은 삶의 큰 일 가운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어떤 위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일어서게 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듣기를 원하시는 그 말씀에서 힘을 얻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방식인 것이다.

다른 세계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나의 신앙고백은 ‘그래, 그건 당신 생각이고!’ 정도로 생각되는 ‘다른 생각’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는 – 그가 누구라도 – 당연히 해야할 고백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누구라도 같은 신앙고백을 하고, 이런 세계관에 속해 있다는 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관을 무시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세계가 기록된 성경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청교도는 거짓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한다. 거짓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열매로 증거된다른 성경의 기본적인 증언을 통하여 이렇게 정의하는 것이다.

현실의 어려움을 무시하고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당연히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우셔야 할 우리 인생의 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1. 물론 어떤 이에게는 젊은 나이겠지만[]
  2. 금전적인 부분으로의 방향성[]

하나님을 신뢰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를 들고 다니며 크게 외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믿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정신적인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보여지게 할 뿐인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게 아닌가!?

믿는 사람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믿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과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겉으로는 믿는다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 사랑은 다만 그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하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면 쾌락을 위한 관계 어떤 만족의 조건을 위한 관계일 뿐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동들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바칠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예비하셨다.

사무엘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며 다만 형식적인 것들을 갖추기만 했을 때이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완벽한 승리자로서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이스라엘의 군사들의 사기,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곁의 제사장들..
하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승리의 조건들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필수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신뢰와 그에 따른 행동들이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사무엘상 4장 3절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직전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게 된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궁리한다. 여호와의 궤가 함께하면 이길 것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다시 이스라엘이 패한 요인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하지 않은 것
  2. 패배의 요인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다시 전쟁에 임한 것
  3.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

1항과 2항은 같은 것이다. 2항과 3항도 연결된다.

여호와께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가 되겠냐 싶겠지만, 다윗을 예로 든다면 그는 항상 여호와께 작은 것이라도 기도하고 임했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며 사울에게서 그의 아들에게서 피할 때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할 때의 그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호와께 구하지 않은채 범죄한다. 이스라엘에게 칭송받는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구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항을 다루기 전에 3항에 대해 집고 넘어간다면 사무엘상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들의 이로운것들을 취함으로써 죄를 범했고, 그로 인해 멸하시기로 정하셨다.

먼저번의 블레셋과의 전투 패배 요인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죄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언약궤와 함께 그들이 있도록 했다.

여기서 아골의 죄를 처벌하고 승리했던 사건과 대조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 7장에서는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충분하다고 판단된 군사를 보냈지만 패한다. 그리고는 패한 이유를 여호와께 구하고, 아골의 죄를 드러내고 처벌했으며 그 후의 전쟁은 승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패전의 이유를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으며, 공식처럼 이것 저것들을 준비하고 전쟁에 임하지만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와 이스라엘 자신들의 실수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동행한다는 것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정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는다. 범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그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바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복을 받으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여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야만 그에 더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감사와 불평의 차이는 백지장 하나 차이이다. 사실 그보다 더 적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일상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주의 말씀을 따르는 문제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주의 말씀에 살기로 작정하고 그것에 스스로 자원하여 따른다면 그렇지 않았을 때 느꼈을 불편함을 느끼지 않듯이, 불평의 상황에서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자원하여 감사한다면 쉽다.

감사할 상황이 아닌데, 분명 하루 종일 일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안되기만 하는 날에도 감사해야하는가의 문제와 불평도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에 의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하든지 그것은 그 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그의 말씀에 따르고 지혜를 좇기를 바라시지 말씀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삶을 살아서 심판을 받기 원치 않으신다.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한다. 어둠 가운데서 빛이 비추면 더 밝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내려놓음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내려 놓기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눈에 보이고 내 손에 잡히는 명백한 실체가 있는데, 이러한 알토란 같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내려놓아야 할 것이 내 눈물과 내 피가 섞인 것일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내려놓지 못한다.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며 잠시 내려놓는다고 해도 언제라도 수틀리면 다시 집어들 생각을 하며 손닿는 가까운 곳에 둔다.
내려놓음이란 믿음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눈물의 헌신이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 내려놓지 못한다. 하나님은 내려놓는 우리의 손길이 떨리고 있는지 아니면 추호의 흔들림이 없는지도 보시는 분이시다.

채워주심1

내려놓음이란 이런 것이다. 에서 언급한 나아만 장군도 자신의 권위와 고집을 내려놓았을 때에 문둥병을 고침 받았다.

최근의 내게 내려놓음이란 상호작용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활동하던 선교단에서의 활동들을 내려놓고, 이성교제도 내려놓았다.

이성교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이해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있다. 둘 중의 어느 쪽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도 그렇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 그럴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에 순종하고 따를 때 더 나은 상황과 여건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경험을 기억하고 다시금 자신을 정비해야 한다.

사실 고민할 것도 없이 순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결국 하나님께 부름받기 시작하면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분명하게 정리가 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사람들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정리가 분명하지 않다.

선교단의 문제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해 왔던 사역을 이어받아 줄 사람이 없다. 홈페이지를 제작하고 관리하며, 관련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해시켜주시고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p.144-145.[]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이번 글은 내 어머님의 간증이다. 경험담이고,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심과 실행하심에 대한 증거이다.
간증의 내용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로 마감된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이며, 읽고 싶으신 분들만 읽으시라.

여기서부터..
먼저 어머님께서 자라오신 환경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조부(여기에서의 호칭은 어머님 기준)께서 성당(천주교)을 다니셨고, 다른 가족들도 조부님을 따라 성당을 다니셨다고 한다. 8남매 가운데서 맏이셨고, 어머님 세대의 다른 어르신들처럼 딸에게는 지원을 굉장히 아끼셨기 때문에, 학교를 자비로 다니시지 않으시면 안되는 상황에서 대학을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입학하셨다.

고등학교 때에는 믿음이 없으신상태로 교회에 다니셨다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사정은 마찬가지겠지만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처음 교회에 나간다는게 친구를 따라 나간케이스에 속하셨다. 그렇게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시고 대학교 1학년(20살)에 들어섰는데, 뭔가 세상에 의미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의 국군간호사관학교는 대구에 있었는데, 그런 이유로 전라도 학생들의 향우회가 조직되었고 그 사람들과 여기 저기 활동을 하기도 하고 등산도 다니고, 만남도 가지고 하셨단다. 그런데 그 향우회라는 것의 활동이 그런 활동들의 반복이었고, 그런것에 별 의미를 두지 않으셨던 어머님께서는 흥미를 잃으셨다고 한다.

군 교육 기관에서는 기숙사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주말에는 외출이 가능했는데, 믿음이 그다지 확실하게 세워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에 열심을 가지시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 모습을 좋게 보셨단 당시의 어르신들(군목을 포함한 교회의 어르신들)께서는 교리 학습을 시키셨고, 그로 인해 세례를 받으시기에 이르셨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세례 전날인 토요일에 문득 생각하셨다고 한다. 믿음도 확실하지 않고, 세례를 받을 자격이 되는가라는 생각을 하고 그저 앉아서 기도(어머님께서 표현하시기로는 단지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정도)하고 계셨는데, 한 학년 선배(2학년)가 한 명 다가와서 주말인데 외출도 안 하고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했단다. 그래서 이러 저러해서 고민이라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네비게이토식 교리 교육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너무도 쉽게 확실한 믿음을 세우시게 되었는데, 어머님께서는 그 선배를 표현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것에 준비된 영혼을 계획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 받으셨던 응답의 대략적인 내용은 큰 단체를 통해서 자비 부담 없이 선교에 쓰시겠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으로 교육기간을 마치고 마산으로 첫 발령을 받으셨는데, 학교에서만큼 열심으로 할 수 없는 여건들과 여러가지 이유들 때문에 믿음의 정도가 많이 떨어지셨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서 교회에서 부흥성회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부흥강사님께서 방언으로 기도를 권하셨고, 예배 가운데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세계 선교를 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응답을 받으셨는데, 당장 그것이 이루어지실 것으로 생각하시고 눈물로 기도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믿음이 전혀 없으셨던 아버지의 신앙상태와 태어난지 1년 정도 밖에 안된 본인과 갓 태어난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아버님은 건축토목기사로서 일을 하고 계셨고, 어머님은 간호사관학교를 졸업하셨기 때문에 의무 장교로 근무하셨기 때문에 서로 만날 시간이 거의 없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님을 따라 다녔던 두 아이들은 아버지의 얼굴에 낮설어 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런 이유로 어머님은 대위 4년차에 전역하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만 두시고 나서 아버님께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었다.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으셨다.(이것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에 하도록 하겠다)

그렇게 서울의 큰교회의 부교역자로서 활동하시게 되었고, 그런 가운데서도 당시 선교에 활동적이었던 교회에 가서 교육도 받으시고, 알아보기도 하셨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막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부교역자로 활동하시던 교회에서 나와 본인이 중2때(15세, 1994년) 부천으로 개척하여 나오셨는데, 개척교회라는 것이 아는 사람은 아시겠지만 적지 않게 힘이 든다.

그렇게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 이르셨단다. 이제 그 기도에 대해 별 희망을 가지고 있게 않게 될 즈음하여 어머님은 대방 제단이라는 곳을 알게 되셨고, 그 제단은 대한수도원과 연계된 기도 제단이었다. 그 제단을 통해 훈련을 약 4년 6개월 정도 받으셨단다.

그런데!
그렇게 짧지 않은 기간동안 훈련 받으시면서 들으셨을법도 한데, 한번도 졸업에 대해 들으시지 못하셨다고 한다. 3년 정도를 제단 지기로 활동하면 그 빡센 훈련의 강제적(?)의무가 해제되고 그와 동시에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제단에서 약 1개월 여간 활동하게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와 유사한 시기에 아버님께서도 중국으로 선교를 다녀오시게 되는 길이 열리셨다.

오늘 오후 예배가 끝나고 광고겸 간증 시간이 있었는데, 아버님께서는 그동안 까맣게 잊고 계셨던 한 가지를 생각해 내셨다고 한다. 27년 전 믿음이 없던 시절의 어머님의 미친(당시에는 믿음이 없으셨기 때문에 시댁 식구들이 모두 미쳤다고 이혼하라고 까지 하셨다고 한다)소리를 말이다. 이제 곧 세계 선교를 하게 될 것이라는 미친 소리를 들으셨다고 한다.

어떠신가… 지금 당신의 모습을 살펴보라. 당장 응답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좌절해 있지는 않는가? 내 삶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치밀하신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에 비추어 결단코 단언하건데, 결코 응답하시지 않으실 분이 아니다!

물론, 자기 욕심과 정욕을 위해 죄악된 것을 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으시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지 않다면 결단코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