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신뢰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두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를 들고 다니며 크게 외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일단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믿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믿는 것에 대한 사람의 정신적인 변화와 행동의 변화는 그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해 준다.

다만 그렇게 보여지게 할 뿐인 사람들은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되는게 아닌가!?

믿는 사람을 위해 많은 것들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믿는 것을 그 기본으로 한다. 상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믿는다는 말과 동일시해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는 그의 말을 믿고 따를 수 있는 행동과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겉으로는 믿는다고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 사랑은 다만 그에게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하기 마련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보면 쾌락을 위한 관계 어떤 만족의 조건을 위한 관계일 뿐이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행동들을 미리 아신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바칠 수 있는 서원을 통해 이스라엘의 제사장을 예비하셨다.

사무엘이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며 다만 형식적인 것들을 갖추기만 했을 때이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완벽한 승리자로서의 자리가 예비되어 있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이스라엘의 군사들의 사기, 하나님의 언약궤와 그 곁의 제사장들..
하지만 이것들은 외형적인 승리의 조건들일 뿐이다. 이 사건에서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필수요소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 대한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신뢰와 그에 따른 행동들이다.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사무엘상 4장 3절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직전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지게 된 사실을 말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궁리한다. 여호와의 궤가 함께하면 이길 것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 다시 이스라엘이 패한 요인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하지 않은 것
  2. 패배의 요인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다시 전쟁에 임한 것
  3.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

1항과 2항은 같은 것이다. 2항과 3항도 연결된다.

여호와께 기도를 하지 않은 것이 무슨 이유가 되겠냐 싶겠지만, 다윗을 예로 든다면 그는 항상 여호와께 작은 것이라도 기도하고 임했기 때문에 승승장구할 수 있었으며 사울에게서 그의 아들에게서 피할 때 무사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야의 아내를 범할 때의 그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혀 여호와께 구하지 않은채 범죄한다. 이스라엘에게 칭송받는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구했기 때문에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의 가장 큰 죄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다.

2항을 다루기 전에 3항에 대해 집고 넘어간다면 사무엘상 2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무시하고 제사를 드리기 전에 자신들의 이로운것들을 취함으로써 죄를 범했고, 그로 인해 멸하시기로 정하셨다.

먼저번의 블레셋과의 전투 패배 요인은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죄를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언약궤와 함께 그들이 있도록 했다.

여기서 아골의 죄를 처벌하고 승리했던 사건과 대조할 수 있다. 여호수아서 7장에서는 아이성을 공격하는데 있어서 충분하다고 판단된 군사를 보냈지만 패한다. 그리고는 패한 이유를 여호와께 구하고, 아골의 죄를 드러내고 처벌했으며 그 후의 전쟁은 승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은 패전의 이유를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았으며, 공식처럼 이것 저것들을 준비하고 전쟁에 임하지만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바로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와 이스라엘 자신들의 실수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 또는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를 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다. 동행한다는 것에는 우리가 범죄하지 않고 정결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 붙는다. 범죄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한다면 그는 그 범죄에 대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바로는 여호와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내 보낼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그로 인해 복을 받으려면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보여지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따라야만 그에 더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순종의 태도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생각 조금하고 기도 많이 해야 한다. 생각이 많으면 일하러 갈 수 없다. 바로 가자! 그리고 뭐가 되든지 간에 꼼지락거려보자!

(중략)

채워주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중히 보시는 것, 그것은 종다운 순종의 태도다!

출처 : 채워주심1

순종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순종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순순히 복종하다2이다.
순순히 복종하기 위해선 복종의 대상, 명령을 내린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이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수는 있지만 마음에서부터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따르는 것은 순종이라고 할 수 없다.
유명한 위인들의 주변에는 자원해서 도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은 그 위인에게 적지 않은 존경심을 가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 존경심은 감사의 형태를 띄고 감사의 마음으로 그를 따르게 된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순종과 감사는 하나의 팩으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순종하고 존경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접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정보를 얻으려 노력한다.
내게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모두를 알 수는 없지만 적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분에 대해 순종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감사에 대한 행동 표현이다.
이 글을 읽고 있으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는 있겠지만 그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행동으로 마음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또한 깨닫기 바란다. 그리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1. 이상혁, 채워주심, (서울 : 규장, 2007), p.137.[]
  2. 순종(順從)【명사】【~하다|자동사·타동사】 순순히 복종함., 민중국어사전.[]

새 예루살렘과 불 못

요한계시록 4:3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렀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같다 <like>

⁂like2 [laik] a. (more ∼, most ∼; (주로 시어) liker; likest)
「종종 목적어를 수반, 전치사로 볼 때도 있음」 ① (┅와) 닮은(resembling), ┅와 같은.

시편 90 :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요한복음 14:23
예수꼐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한일서 3: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 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하나님의 거처는 가장 먼저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에베소서 2:21~22

  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전서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고린도전서 3:10~13

  1.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2.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3.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4.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사무엘상 3:3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성경은 (새 예루살렘) 성과 (불) 목의 두 결론으로 끝난다.”

요한계시록 21:1~2, 10~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 요한계시록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창세기의 네 강이 계시록에까지 이어져서 나타나고
이것들이 성의 중앙을 통과해서 흐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성은 마르지 않는다.

모든 적극적인 것들은 물의 성으로 모이게 된다.
그러나 모든 소극적인 것들은 불 못에 던져진다.”


요한계시록 19:20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하여 그들과 한 마음이 되어 움직일 때, 사단이 역사할 때 그들은 가장 먼저 유황 불 못에 던져진다.1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13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요한계시록 20: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창세기 1:8~9

  1.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2.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 창세기 1장, 2장 -> 요한계시록
옛 하늘 -> 새 하늘, 옛 땅 -> 새 땅, 동산 -> (새 예루살렘) 성, 아담 -> 이스라엘과 사도들(새 사람), 생명나무 -> 생명나무

창세기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창세기 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 필자 주 : 성령훼방죄에 해당한 것으로 추측.[]

말씀이 함께하지 못하면..

어제(25일) 금요 철야 때 들었던 말씀 중에 기도와 함께 말씀이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김충규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을 들어 “말씀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대언하셨는데, 먼저 본문을 살펴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John 15:7)

대부분의 사람 들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에 주목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란 대목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구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겨둠과 동시에 구하여야 우리가 구할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영을 살리고, 기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왜 들어주시지 않는 거지? 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에 소홀하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전교인 수련회 때 봉사하던 청년들이 당회장 목사님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일에 대해 매우 강조하셨는데, 기도로 구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직접 그 음성으로 응답해 주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가 말씀을 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아! 하고 깨달아졌다. 실제적으로 내 심령 가운데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심령가운데 깨달아지는 방식으로 내게 뜻을 밝히셨던 경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 생활 가운데는 말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는 것은 뜨겁게 기도하는 그 순간 뿐이다. 그렇게 집회를 마치고 나면 일상생활로 들어서서 전혀 관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그 분의 음성을 듣기는 커녕 뜻하심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 속으로 꽤나 자주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부분은 반향이 없다. 웬지 내 마음대로 떠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적도 적지 않다. 역시.. 삶이 말씀 가운데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게 된다.

요즘 미니위니를 통해 알게된 리디의 생각하는 섬 바닷가에 자주 드나드는데, 그 곳 분들의 글들 가운데는 웬지 모를 위로가 있다. 다른 곳에서도 말씀을 인용한 글들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 과는 또 다른 감정이 일기 때문이다. 사실 다니는 여러 다른 곳들 중에는 그런 식(?)의 글들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웹 개발 관련 페이지들이거나 관련 직종 사람들이 운영하는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회 관련된 곳에서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ㅡㅡ;; 인터넷의 물결이 들어오기 전 크넷이라는 곳 이후에는 없었다고 기억된다.

쨌든, 목사님의 설교로 돌아가서, 이후의 인용되는 말씀들을 주욱 살펴보면

사도행전 6: 1~4 ::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시편 119 : 147~148 ::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에베소서 6 : 17~18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요한복음 5 : 24~25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시편 119 : 50 ::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말씀들은 모두가

말씀

과 관련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는 것은 명령이며 지켜 순종해 내야 할 부분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에 입각하고 체계적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씀위에 바로 서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충규 목사님의 설교는 유난히 – 다른 목사님들의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라는 건 아니다 –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귀에 그리고 마음에 잘 새길 수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것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목사님을 찾아가는 이유일까? 그런 행동은 뭔가… 아니다라는 인상을 깊게 남기지만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한 일꾼으로서의 모델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