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표준 지키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생각하지 않고 웹디자이너로 한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 이전에 학교에서 이런 저런 경로들을 통하여 독학하였던 실력을 바탕으로 나름의 자신감을 가지고 취업을 하였다.

정보산업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가 관련 분야에서 일찍 일을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로그래밍에도 관심이 있고, 그래픽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 두 분야를 통해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당시의 웹디자이너였다.

웹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전에도 홈페이지 제작 관련해서 나우누리 웹디동의 활동이 있었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웹표준이라는 용어를 알지는 못했지만 익스플로러와 넷스케이프, 이 두 브라우져에서 똑같이 보일 수 있도록 코딩을 하는 것이 웹디자이너로서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 외의 브라우져는 그다지 많이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고,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브라우져인 넷스케이프와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브라우져가 익스플로러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년여를 관련 직종에서 실무를 했지만, 일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하고 나서는 웹디자인을 그만두고 군에서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별도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군에 입대하면서 웹디자이너로서의 앞길을 회의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에 관심이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웹표준에 대한 관심도 함께 적어졌다. 그저 주로 쓰는 브라우져이든지 잘 보이게만 하면 되는거지라는 생각으로 변해갔다. 그렇게 군에서의 생활이 마무리 되어가던 시점에서 Firefox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직접 관련 소식을 접해서 알았던 것이 아니라 네트워킹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브라우져가 파이어폭스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모질라 커뮤니티에서 웹표준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다시 생각이 바뀌어지게 되었다.

표준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자원의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효율의 문제이고 미래의 우리를 위한 예방 활동이다.

표준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법규를 지키는 것과 같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며 무시하고 마음대로 했을 때 당장은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그런 불법에 익숙한 습관으로 인해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할 때에 원망조차 할 수 없는 문제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의 몸에 규칙적인 운동이나 식사를 하지 않았을 때 당장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지속적이고 반복되었을 때 건강상에 문제가 생기고 몸에 이상이 생기는 문제와 같다.

지금 당장 공부하지 않고 게임이나 유흥을 하고 관심있는 부분만 공부하는 학생이 가지게 될 좋지 않은 성적은 우리가 지금 당장 웹표준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가지게 될 결과가 같지 않을까?

웹표준은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꼭 지켜야 할 필수요소라고 생각한다.

돌들 모두 모아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최대 공약으로 들고 나왔던 한반도 대운하 이야기는 벌써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논의 되고 있다. 이전에도 민노씨는 몇 번에 걸쳐 관련 포스팅을 해왔는데, 문득 이 글 <한반도 대운하(경부대운하)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 – [피디수첩] 보도를 토대로>을 보니 군에 있을 때의 한 지휘관이 생각이 났다.

그는 처음으로 입대해서 자대배치를 받고 간 부대에서 대대장이었는데, 보통 대대장이 중령이었던 반면에 그는 소령의 계급을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령(진)1이었다. 이제 곧 중령으로 진급하기 위해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곧바로 부사관(하사)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채 부대를 배치 받아 대대를 거쳐 중대로 갔는데, 대대장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대대장은 조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주어진 부대운영비를 손대지 않고는 조경을 할 수 없으니 나름 돈을 별도로 들이지 않고 꾸미기 위해 전 부대에 있는 돌들을 모아오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대대와 떨어진 곳에 영외 중대에 있었는데, 그 근방에 있는 돌들도 모아서 차로 대대까지 배달(!)을 해줘야 했었다.

어쨌든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부대를 꾸며(?) 가서 그의 대대 지휘관으로 임기를 마쳐가던 어느날 소속 사령부에서 높은 양반들2이 와서 부대를 순시하는 중에 돌을 모아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를 보이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만든 것 중에 대형 물레방아에서 터졌다. 다른 조경물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는 그 곳을 지나면서 설명은 들은 그 사람은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 물레방아를 멋으로 굳이 만들어야할 이유가 있었냐는 것이었다. 부대 환경 조성도 중요하지만 부대 사정에 맞는 꾸밈을 해야 한다는 덧말이 있었다고 한다.

  1. 지금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중령(진)이겠지만 당시에는 진급되기 전의 계급에 (진)을 더해 표현했다.[]
  2. 아마 중령 이상의 계급[]

작은 아버지 이야기

어제 저녁에 아버지를 통해 할머니를 모시고 작은 아버지 댁에 다녀오라는 특명을 받고 작은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오후에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오전에 가겠노라고 통화하고는 아주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어야 했지만, 이제 곧 정리할 여자친구로부터 호출이 있어서 얼른 그 아이의 집 근처로 가게 되었다.

이런일 때문에 새벽에 집에 돌아오니 새벽 4시였다. 차 안에 있으면서 조금 자 두긴 했지만 편하게 누워서 잔 것도 아니고 두어시간 정도 밖에 자지 못 했기 때문에 집에 들어와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는 잠이 겨우 들었는데, 9시 반에 설정해 놓은 휴대폰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하고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까지 자고 말았다.

오전에 이대 근처 작은 집에까지 가려면 서둘러야했다. 어제 저녁에 출발하면서 연락드린다고 했었는데 전화해야하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 작은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출발한다고 했더니 얼른 오라고 하신다. 오후에 일정이 있으신 모양이었다. 작은 아버지와는 전에 작은 일이 있어 조금 불편한 상태임에도 나름 편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그 일로 인해서 전혀 불편하지 않은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게 도착하니 졸업 선물로 양복을 한 벌 해 주셨다. 상설 매장인데 30만원이 넘는다. 작은 아버지께서 시간이 없으신 듯해서 눈에 띄는 것으로 얼른 골라 입어보고는 결정했다. 사실 양복은 저번 주에 경방필이 정리되는 시점에 싸게 2벌이나 구입해 둔 상태여서 구두를 사달라고 했어야하지만 작은 아버지의 일정에 무리를 드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차로 작은 아버지를 모셨을 때 길 안내하시는게 점심을 먹으러 가는가 싶어 아무말 없이 그대로 따라갔던게 화근이었을까.

그래도 문안한 디자인으로 골라서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골랐다. 타이도 하나 골라서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다지 식욕이 없어서인지 포천갈비 한 판을 시켜서 먹고는 일어섰다.

철인28호 쌤! 삭발은…

이 기사를 보면서 생각이 났는데, 머리카락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때는 필자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주가 흐르지 않아서 생긴일이다. 반이 정해지고 학기가 시작되고 담임 선생님들은 각 반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기 바쁜 시기인 것이다.

처음에 배정된 반에 들어앉아 맞이했던 담임 선생님의 미소에 속았다. 웃는 얼굴은 미소가 아니라 사악함으로 변해버렸다. 단 며칠만에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면 당신의 학창 시절에는 여름에도 시원하게 빡빡머리를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 발언을 학기가 시작되고 여름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까지 몇 번인가 했는데, 아~ 그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필자가 머리를 빡빡밀고 학교에 등교한 날에 발생했다.

하필 그 날 다른 학생도 머리를 빡빡 밀고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좀 논다는 친구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본다.

대뜸 반에 들어오시더니 조회를 하면서 삭발한 녀석들 왜 그랬냐고 하면서 맨 머리를 손바닥으로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무슨 반항하는거냐 어쩌냐 하면서 계속 때린다. 아~ 맨 머리를 맞은 건 둘째 치고 당신께서 시원하다고 해서 한번 밀어본 것인데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어 황당했다.

그 당시만해도 매우 내성적이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좀 놀긴 했어도 성격이 매우 온화하여서(?) 가만히 있었다. 웃어 넘기고 말았다.

아~ 정말 그 머리를 어떻게 자른 머린데!!

삭발을 하고 집에 들어선 순간에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조모님께서 동거하고 계셨는데 집안에 들어서자 눈빛이 바뀌시더니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시냐고 여쭈우니 말 없이 눈물을 그렁이신다.

왜 그러셨을까.. 왜 눈물을 그렁이셨을까..

쨌든 철인28호 쌤~ 그땐 정말 너무 하셨다구요!!

난 담배가 죽도록 싫다

필자가 담배에 대해서 이토록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은 어린 시절로부터 담배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7/10/23 – [나의/일상] – 아놔 담배점~
2007/11/24 – [나의/감상] – 날 보러와요~
2007/11/25 – [나의/일상] – 내 글은? 답변은!?

직접적으로 담배가 싫어서 쓰게 된 글들은 위와 같다.

왜 친하지 않게되었냐면, 필자의 부친께서는 당시 건축토목기사로 건축현장을 다니셨다. 건축현장에는 흡연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곳인데, 왜 담배 냄새를 싫어하게 됐냐는 의문을 가지게 되리라 생각된다.

때는 필자가 3살 때로 돌아간다. 아버지께서는 어린 아들 녀석이 심부름을 할 수 있게 되자 기쁘셔서는 담배 심부름을 종종 시키셨다. 아들아~ 담배좀 가지고 오너라~

그렇게 몇 번을 잘 가지고 오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계속 시키셨는데, 어느날엔가는 이 어린 아이가 담배에 불을 붙여가지고 오더란다.

아뿔싸! 아버지께서는 그날로 담배를 끊기로 작정하셨다고 한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집안에서의 흡연자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누군가 흡연을 하면 얼굴이 벌겋게변해 죽을 듯이 기침을 하곤 했다.

이런 사실은 군에 가서도 변함 없었는데, 다행인지 비흡연자인 중대장이 부임해와서 얼른 행정직으로 올라가 버렸다. ^^

여차 저차해서 담배냄새와는 여전히 친하지 않다!

게다가 후각이 꽤나 예민하기 때문에 괴롭다.

앞으로 인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연극을 얼마나 볼 지는 모르겠지만, 필자와 같은 비흡연자들의 쾌적한 공연 관람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

연필 좀 줄게

“북한 삐라 주워와도 연필 안줘요”를 보자마자 생각난 안 좋은 추억이 하나 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이 조금 안된 때였는데, 당시에 잘 놀던 친구 둘과 함께 놀이터로 산으로 놀러다니던 때의 이야기이다.

살았던 동네가 성신여고가 있는 산동네였는데, 친구들과 놀다가는 한 친구가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전단지를 주웠다. 그런데 이 친구 주워서 그대로 경찰서에 가져갔으면 좋았을일인데,
주웠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주운 것이 달랑 한장이기는 했지만 삐라를 주우면 학용품을 받는다는 사실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웠기 때문에 더 기뻐했고 그런 이유로 자랑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자랑이 화근이 되었다. 동네에서 놀던 한두살 위의 형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자며 달라하여 줬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경찰서에 가져갔을 거라며 황당해하는데 금새 경찰서에 다녀온 그 형이란 아이는 연필 한다스를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들과 마주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미안했는지 연필 좀 줄게 라며 받은 연필 중에서 몇 자루를 주는 것이다.

그 형이라는 아이 뻔뻔하게도 마치 자신이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줬던 기억의 한 조각이다.

인기를 위해서라면!!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연예인들은 아침방송프로그램에 나가서 폭로성 얘기를 하거나, 평소에 알려지지 않았던 비사등을 얘기하면 그날의 연예 뉴스 순위에 올라가는 현상이 부쩍 늘어났다.
일부러 관심을 모으기 위한 돌출 행동이나 발언도 심심치 않게 포털을 달구는데, 이것도 연예매니지먼트의 전형적인 방법이라고 누군가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상은 킬크님의 포스트를 읽으면서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어서 일부 긁어온 것인데,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은데 고 이주일씨가 어떤 쇼프로그램에 나와서 토크쇼를 하고 있는 중에 방청객 중에 한 명이 올라와서 난리를 피웠던 사건이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생방송이 아니었다는게 그 사건의 큰 문제였다.

명확하게 고 이주일 씨의 사건인지 어떤지 확인하기 위해 검색을 하다보니 다음의 비슷한 사례를 검색하게 되었다.

MC 허참의 표정 역시 난감해 질 수 밖에 없었고, 방청객과 문제를 낸 남성팀 역시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TV를 지켜보던 전국의 시청자들은 방바닥을 구르며 웃었다.놀라운 것은, ‘가족오락관’은 생방송이 아닌 녹화방송이었는데도 이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탔다는 사실이다.

물론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은 이 사건이 아니다. 검색해 봐도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쨌든 저 사건이 꽤나 오래전 사건인데, 고 이주일 씨라고 기억하고 있는것은 아마도 TV에 출현했던 인물중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한 뒤에 나왔던 프로그램이라고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 이주일씨가 소천하기 최소한 몇 년 전의 일로 기억하니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쯤일 것이다.

어쨌든 해당 사건은 다음 날 아침엔가 뉴스에까지 보도된 바 있다.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저렇게까지 하려는 것은 분명히 지나치다 싶은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런 저런 행동들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튄다고 하지만 그건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 뿐이지 의도적으로 사건을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다르게 생각해 본다면 연예인들이란 인기를 – 그러니까 사람들의 관심 – 먹고 사는 존재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적용해 본다면, 우리가 만약 숨을 쉬기 힘든 상황 가령 수영을 못하는데 물에 빠진 상황에서의 숨을 쉬고자 하는 몸부림 같은 것일까 생각해 본다.

내가 너 보러 왔다냐~

2007/10/02 – [나의/과거사] – 유선여관 2에서 이어지는 글이면서 다른 제목을 달아놓은 이유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태어나던 해에 관련된 이야기는 2007/06/23 – [나의/과거사] – 아들에게에 작성되어 있다. 그 후로 며칠이 안되어 조부님께서 장손의 득남 소식을 듣고 재빠르게 광주에 올라오셨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들어오시는 조부님을 반기며 아버지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글쎄 조부님께서는 그런 아버지의 인사를 뿌리치시고는 내가 너 보러 왔다가 내 손주 보러왔지 라고 하셨단다.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서운하셨던지 지금도 종종 이야기 하시면서 서운한 감정을 얼굴, 몸짓 등으로 표현하시곤 한다.

유선여관 2

친조부님께서 돌아가시던 해는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그 당시 그로부터 몇 년후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관 근처에 솔숲이
캠핑장이 되고 또한 공원 내라고하여서 여관과 붙어있던 상가가 뜯겨져버리는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되고 있다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친조부님께서는 필자를 유독 사랑해주셨는데, 그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그 사랑의 잔향이 여전히 느껴질 정도이다. 친조부님께서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으셨던 이유는 연안 차씨 강렬공파 39대손으로, 종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친조부님의 장례식에서도 종손으로서의 영정을 들고 여기 저기 조부님께서 돌아다니셨던 길을 되짚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날을 유독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영정을 들고 있는 필자를 중심으로 대둔사의 승려들이 좌우로 좌~악 줄지어서서는 되짚었기 때문이고, 장례식 중간에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면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유선여관에서의 추억은 여럿이 있는데, 조부님과 함께 하셨던 증조모님과의 추억이 또 연결된다. 이 여관은 전통가옥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엌도 전통 가옥의 부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부엌에는 작은 방이 딸려 있었는데, 여관의 안 주인이셨던 증조모님께서 그 방에서 지내시곤 하셨다. 밥을 짓는 아궁이와 직접 연결되어 최고의 화력을 지닌 방이기도하고 거동이 불편하신 증조모님께서 식사를 그때 그때 하시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여관 뒤편에 있는 개울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난도 치고 고동도 잡곤 했다. 물론 친인척들과의 만남도 잦았다. 어린시절의 그곳은 좋은 추억들로 가득한 곳이다.

여관에서는 진돗개를 키웠는데, 그 개드로가 강아지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키스(!)도 했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공원 지정도 그렇지만, 증조모님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와 함께 살게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소천하셔서 나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사건들도 적지 않은데, 이와 관련해서는 언젠가 포스팅할 기회를 엿보겠다.

유선여관 1

박상민은 1989년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역을 맡아 데뷔했으며 영화, 드라마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엔 SBS TV 드라마 ‘불량커플’에 출연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 사람 아직 결혼 안 했나아~ 장군의 아들 촬영지 이다.

첫 번째 들었던 생각은 그저 단순한 내용이어서 패쓰~ 하지만 두 번째 생각은 필자와 매우 관련이 깊다.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인 유선여관이 바로 관련의 첫 접점이다.

대둔사와 유선여관

대둔사연못한편
두륜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둔사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둔사는 한때 대흥사로 불리우다가 1993년부터
예전 이름을 찾아 대둔사로 불리고 있다.
대둔사는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로 대한 불교조계종(佛敎曹溪宗) 제22교구 본사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응진전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서산대사 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등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천불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지난 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다. 서산대사의 유물과 유적이 보관된 표충사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밖에도 서산대사 유물관에는 많은 문화유적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유선여관경내버스
종점 바로 위쪽에는 서편제에서 판소리하는 장면이 촬영된 유선여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또한 장군의 아들 1. 2. 3 가
촬영된 곳으로 한국영화는 두륜산도립공원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선여관은 1930년대에 지어진 여관으로 현재
전통보존가옥으로 지정되어 보수중이다.

– 입장료 : 어른 2000원(2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1200원), 어린이 1000원(800원)


…………..( ) 안은 30인 이상 단체요금

– 주차비 : 승용차 1000원, 버스 2500원


이 유선여관은 위에 나온 것처럼 영화의 촬영지로도 사용되었는데, 그 여관이 필자의 친조부님께서 운영하시던 여관이었기에 더욱 깊은 감정이 녹여진다.

여튼 이 유선여관에서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적도록 하겠다.

신문의 이빨~

<web 2.0 미디어를 위기상황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을 보고 있으니까 이전에 군 복무시에 고참과 관련된 얘기하나가 생각난다.

국방일보에 났던 기사라서 검색해서 링크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는 없지만, 그 당시 고참인 전 중사와 그의 형제들은 군에서 복무중이었다.

그렇게 장관들과 오찬을 나누고 며칠후에 기사가 난 걸 읽는 순간에 필자가 함께 있었다. 기사를 읽더니 고참이 하는 소리

하여간, 기자들 이빨1하나는 알아줘야한다니까.. 난 그 자리에서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형님들이 함께 군생활 하시니까 든든합니다’라고 내가 말했데.. ㅋㅋ

뭐 대략 위와 같은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 사실 원래는 입발이라고 써야 할 듯하지만, 당시 사용했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표준화로 희생당하는 이들

각종 기계를 디자인하는 데 표준화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 더욱 오른손 사용이 장려됐다는 것이다.

필자의 주변에도 왼손잡이들이 꽤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친근한 고모님의 따님되시는 누나를 예로 들자면, 우리 어렸을 때는 그 왼손잡이에 대한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누나도 마찬가지로 양손잡이가 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이 누나가 낳은 아들 둘이 모두 왼손잡이다.

얼마전에 밥을 먹는데 왼손잡이인 아이들을 오른손으로 밥을 먹게 이야기하려는 걸 보고 아직도 그런걸 신경쓰냐고 말했는데, 사실 요즘엔 왼손잡이에 대해서 그다지 우리 때만큼 인식이 나쁘지 않은데다 되려 좋은 인상을 줄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이유였는데 또 그렇지도 않은가보다.

쨌든 이번 글을 쓰게 된건 인용된 글을 보고서인데, 표준화를 위해 희생되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내용인데, 참.. 사람이라는게 아니 인생이라는게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것도 있다는 생각을 다시금 해 본다.

뭐 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해서 왼손잡이가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도 힘들다고 생각된다.

자연이 절 불러요~

수업시간엔 자느라 못 들었던 것 같구, 동생이 시험 공부하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라는 표현을 공부하는 걸 본적 있었다. 그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었는데, 오늘 문득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일기를 블로그에 기록하는데 그 포스트들로 초등학교 3학년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잠시 느낄 수 있다. 그 중에서 다음의 일기를 보면서 생각이 나게 된 것인데, 아래 인용구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방문할 수 있다.

나는 안심이 됐지만 또 만약을 준비해서 똥이 마렵다는 말은 영어로 배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상우일기

그 당시 동생이 공부했던 표현은 Nature calls me. 또는 Nature is calling.로 기억되는데, 이걸 보고 문득 기억난 건 그걸 직접 사용했던 기억이었다.

영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화장실에 가려고 손을 들고는 쌤~ 자연이 절 불러요~ 라는 식으로 한글화해서 써 먹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반에서는 최소 3차원 이상의 정신세계를 가진 친구로 인식됐겠지만, 나름 스스로는 즐거워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친한 친구녀석들에게서 질문을 받고 답해줬다.

뭐 지금도 고차원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지만 그 당시에도 적잖이 고차원이었다.

왜 블로그를 시작했을까?

킬크님의 나와 Tistory와의 인연을 더듬어 보면…를 보면서 블로그를 왜 시작했을까로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다.

제일 처음 블로그를 만든건 아무래도 싸이월드의 미니홈피이다. 미니홈피 서비스 초기에 흥미로 가입했다가는 그대로 방치해 두고는 미니홈피 열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사람들이 점차 미니홈피에 시들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열풍이 지나고 나서 시작하게 되었냐면 사람들이 필자가 찍는 사진을 퍼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글들을 보면 블로그 개설일보다 더 전의 글들이 있는데, 그 글들은 네이버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이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던 것은 아마도 그저 기록을 남기기 위한 단순한 동기였다.

사실 그 뒤로 말년 이후 줄넘기와 체중 관련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후에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미니홈피에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기록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 공간에 있는 글들 중에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들은 없는데, 아무래도 미니홈피는 계속 해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고, 그다지 사진 외에는 글이라고 써 놓은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스토리의 초대신청을 미니위니에서 해 놓고 초대를 받은 후 바로 모든 글들을 옮겨 오고 예약을 통해서 올린 시간을 그대로 적용하여 글을 옮겨오게 되었다.

사실 이전 블로그가 테터툴즈였다면 별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네이버 블로그와 파란 블로그에서 이동해야 했기때문에 일일히 수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쨌든 지금도 그다지 성실하게 포스팅하진 않지만 되도록이면 이삼일에 한 개 이상씩을 작성하려고 노력한다.

요즘들어서 킬크님의 자신과의 약속으로 1년간 하루에 한 개 이상씩 포스팅하기를 이루어내신걸 새삼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은 방문자수나 어떤 사람이 방문했느냐 – 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 보다도 글 솜씨가 얼마나 늘었느냐이다.

지금까지 이 블로그를 운영해 오는 목적 중의 하나가 글쓰기 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뇌를 옮겨놓고 글을 작성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 이상의 – 지금도 그다지 잘 쓴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해수욕장 횡포

을왕리 해수욕장을 찾았다가 왕산 해수욕장으로 가다를 읽다보니 고등학교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나는데, 그 때 가족들과 함께 해변에 간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안면도의 어느 해수욕장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모부님의 고향이 안면도였는데, 배들이 있는 곳이 집이었는데, 그 곳 뒤쪽이 방파제가 있는 바다가 있었다. 그 건너편에 해변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간을 내어 해변에 갔는데,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되었다.

해변에서 천막(텐트)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이 – 물론 필자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 두 명이 오더니 자리값을 내라고 했다. 그 둘이 왔을 때 모레들이 필자의 몸을 덮고 있었는데 황당함에 고개를 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전에 해변에서 자리세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뉴스에서 접했는데 그들이 그런 사람인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저씨들이 뭐하는 사람들인데 자리세를 받아요?라고 항변했더니 해변이 자기들의 땅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리세를 받는다고 했다.

대번에 들어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유지라면 그런식으로 영업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2년 전 쯤에 남이섬에 사진 촬영을 위해 간 일이 있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사유지라는 것을 느끼게 할 정도로 비싼 입장료와 주차요금을 내었다. 사유지라면 그곳이 나머지 기간에 운영될 정도로 요금을 받아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되지만 그곳의 해변은 엉성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그럼 땅문서나 영업이 가능한 증명서류를 보여달라고 했다. 이미 필자를 덮고 있던 모레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만나 있었고 얼굴은 붉게 타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으로만 했던 그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라졌고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목격할 수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쫓아가서 영업행위(?)를 방해해 주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참았다. 그들이 순순히 물러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가지게 된 엄청난 덩치덕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들은 그 동네에 사는 청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름에 오는 피서객들에게 돈을 그런식으로 갈취해서 뭘 하려고 했을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일까?

술 마시면 사라지는 사람들 1

아~ 먼저 이 글 미스테릭 포스팅은 당연히 아니다. Pink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좀 적어본다.

먼저 제목인 방팅에 관한 것인데,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전 통신을 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는데, 초등학교때는 단순히 통신 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만 했고 실제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겨우 장만한 컴퓨터로 전화연결이 되어 글 읽고 정보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그다지 실제적인 만남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없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이사를 하면서 그다지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통신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물론 통신을 이용하는 연령대가 지금처럼 폭넓지가 않아서 동년배의 친구를 알게 되는 경우는 좀 적었지만, 그래도 통신상에서의 만남이 즐거웠다.

아!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나우누리 채팅방에서 동갑내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몇 번 연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게 이 때 였다. 그다지 진지하지 않아서였을까. 단순한 이성친구정도의 느낌 뿐이어서인지 일반적인 연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인지 더 이상의 확실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올라가서라고 기억된다. 나우누리에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PC를 이용한 개인적인 활동은 이미 중학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만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의 만남을 시작으로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활발해졌다.

하이텔도 그렇고, 나우누리도 그렇고 채팅방에 가면 항상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채팅방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필자가 알고 있는 경우에 한정되기 때문이 이전에도 몇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천리안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방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것이 20살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보다 군에 가서 더 방팅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나름대로 방황하고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을 때가 23살정도였는데, 월급도 꼬박꼬박 들어오겠다 두려움이 없었다. 그 때는 친구들과도 가장 활발하게 만나고 다녔는데, 친구들과의 연결점 역할을 했었다. 대게 친구들이 무리지어 노는데, 그 친구들과 모두 연락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점차 연락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힘들어져서 지금은 연락을 정말 가끔씩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바빠져서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전역하기 1년 전인 2003년엔 아랫지방에 돌아다닐 계획을 세우고 경상도 지방에서 전라도 지방까지 순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 하다. 부산에 내려가서 전역한 친구와 연락해서 만나 한잔하고는 늦은 저녁이 되고 잘 곳이 없어서 PC방에 들어가서 부산 방팅을 찾았다. 그런데 이 부산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속적으로 방팅을 하고, 놀 돈을 마련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잠시 생각난 것이 있어서 시작했는데, 끝이 없다. 너무 길어서 둘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아들에게

민노씨의 글을 읽어내리다가 아거셔스에 등록되어있따는 고종석 논설위원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이 나서 옮겨 적어본다.
아래의 글은 제가 군입대(2000년 9월 1일)하는 날 아버지께서 전해 주셨던 시이다.

아들에게

네가 태어나던 그 해는 무척 더웠단다
5월의 함성이 틀어 막혔고
위로 가던 철도가 끊겼고
통하던 전화선이 잘렸기 때문에

세상이 싫었을까 두려웠을까
한달이나 늦게 나온 네녀석으로
의사의 가운은 오줌세례 받았고
우렁찬 울음은 할애비의 기쁨이 되었었단다

한해 두해 어느덧 스물 한해 9월
5월의 함성은 공원이 되었고
끊겼던 것들은 다시 이어졌는데
그 날의 군복이 우리를 가르는구나

싫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세상을
너를 위해 십자가 진 예수님을 보면서
교관의 구령으로 대한의 남아되어
풍성한 주의 열매 맺으려무나.

필자는 1980년 7월 3일에 태어났는데, 출생지가 다름 아닌 전라남도 광주이다. 광주통합병원1에서 태어났다. 다들 알다시피 5월에 시작된 항쟁의 시끄러운 세태로 인해 그 당시 광주에서 5월, 6월의 출산 예정이었던 아기들이 한 달 정도 이후에 나오는 경우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 필자도 포함되는데, 예정일인 6월 3일에서 무려 한 달이나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왔어야 할 시기가 지난 후 11개월에 출생하면서 의사의 가운에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좀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필자는 그나마 1달이나 늦게 나오면서 무려 12시간의 진통 후에 나왔다고 한다. 오전 9시에 진통이 시작되어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에 나왔는데, 젊은 아빠2는 그 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의 동생에게 그 자리를 맡기시고 병원 앞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신혼 부부들에게, 특히나 새신랑에게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임신 중에 책 잡힐 일은 되도록 하지 말라는 게 다 이유가 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종종 어머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곤 하시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 글을 받아서 지갑에 넣고 육군훈련소와 부사관학교를 거치고, 자대에 배치받아 관사에 생활하면서까지도 몸에 가지고 있었다. 군생활 2년차 정도에 이 시가 들어있던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다행히 어떤 경찰분이 주워 보내주셔서 다시 찾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모습은 여러가지로 권위적이었는데, 이 시를 접해서인지 조금은 다른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1. 현재는 광주 그 자리에 없고 수도통합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성남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 당시 아버지는 2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