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란고교 호스트부

요즘 재미있게 보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오란고교 호스트부이다.
처음엔 아무생각없는 그저 웃기기만 한 내용이려니 하고 웃으며 보고 말 내용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최근의 내용을 보면서 부장인 스오우가 호스트부원들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면서 개설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히카루, 카오루 쌍둥이 형제가 둘을 구분해 보라며 스오우에게 따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샷

특히나 이 두 쌍둥이 형제(히카루, 카오루)들의 내용은 머리가 굵어지고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점부터 느꼈던 소외감에 대해 해결점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하나 또는 둘, 그 이상의 집단에 속해있더라도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집단이라도 독립적이다. 그 집단에 속해 있는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로서 독립적이다.

쨌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동시에 온전히 독립적인 동물인것이다.

수 없이 외로움을 느껴가면서도 혼자가 아니라고 애써 그 사실을 감추려한다. 자신은 외롭지 않은 존재이기를 갈구한다.

간소한 문양이 새겨진 먼지 쌓인 금 자물쇠
간소한 문양이 새겨진 먼지 쌓인 금 자물쇠가 쇠사슬에 걸려있는 부분이 크로즈 업 되어 있는 사진

그러나 그런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려는 속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굳게 닫혀 있는 자물쇠를 풀고 그(그녀)와 함께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내 자물쇠를 열고 들어와줄 사람은 없는건가… 스스로 벽을 형성하고 그 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해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나란 인간은 그렇다.

외롭지 않으려하지만 끝내는 외로워져버리는.. 그런 허술한 인간관계를 가졌으면서, 그렇지 않으려 노력하는 존재

이건… 완전… 궤변 수준인건가… ㅡ.,ㅡ;

컴퓨터 재설치했다~~

어제(8월 20일) 아버지께서 노트북이 생기셔서 집에 있는 데스크탑을 주셨다.
하드를 옮겨다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원래 쓰던 케이스를 그대로 쓰려고 메인보드랑 다 작업하려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냥 하드만 바꿔달라고 하시기에 뭐.. 조금 귀찮기도하고 그래서 그냥 하드만 두 개 떼어달기로하고는 본체를 해부해 놓고 하드 달아놓고 윈도우 설치하는데… 아! 이게 웬일인지 문제 발생!!
워낙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자료들이 방대해서 원래 쓰던 마스터 하드를 자료 저장용으로 바꾸구 아버지께서 쓰시던 하드디스크에 운영체제만 깔아서 쓰기로 하고 작업하고 있는데, 운영체제를 깔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중에 운영체제가 이상하기에 재시작(역시 윈도우의 모든 해결은 재시작?!)
엌! 이런… 재시작하는데 운영체제가 오류 발생!

hal.dll이 손상되었거나 없습니다.

윈도우 설치 CD를 넣고 복구 콘솔로 확인해 보니, 80기가 짜리 하드가 아닌 160기가짜리(원래 마스터였던 디스크)인것이 아닌가! 그래서 CMOS 셋업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운영체제를 깔았던 디스크를 인식 못하기에 PC에 붙어있는 디스크를 살폈다. 역시나! 하드가 죽어버렸던 것!
무슨 이유에선지모르겠지만 하드가 진동하지 않았다. 나머지 2개의 하드는 이상 없이 진동하는 것으로 봐서는 메인으로 삼으려 했던 디스크가 오래되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얼마전 리디의 생각하는 글 중 먹통이 된 컴퓨터의 본문내용이 머리속에 급격한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시간을 보니 새벽예배 시작시간이 지나고 있었고, 하나님 왜 이런건가요하고 기도해봐도 도무지 해결방안이 생각나지도 않고 복잡해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삼성 서비스센터에 가서 인식 불가의 이유로 하드디스크를 교체해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시 삼성!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집에 와서 다시 윈도우 설치하고 인증을 받고 재시작하는데 또 다시 새벽과 같은 일이 생겼고, 또 다시 서비스센터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체해오는데 서비스 기사 曰 “또 다시 안되면 계속 바꿔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가져가면 다른 쪽으로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살펴보세요”.

그렇게 집에 와서 설치하는데, 잘 되는가 싶더니 설치 완료후에 재시작하는데, 이번엔 블루스크린이!!
이젠 한계에 다다랗다. 의자에 올라 무릎사이로 머리를 넣고, 양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인거죠? 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로 한것들(서원)을 시행하지 않아서인가요? 이것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기게 하기 위해 준비해주신것 아니던가요? 이젠 모르겠어요. 하나님보다 컴퓨터를 우선시해서 그런건가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설치 중간에 읽었던 말씀 본문이 생각났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수기 30장 2절)

과부하걸린 머리를 쥐어싸고는 잠시 잠에 들었다 깨고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윈도우를 다시 설치하는데, 이번엔 설치된것을 복구하니 잘 되었다.

역시 뭔가 하나님앞에 걸려있으면 문제가 생겨버린다.
참… 리디님 글을 읽으면서 “이거 나도 좀 위험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생활했어야하는데, 역시나 하나님은… 멋쟁이!!

조금 더 기도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대화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당신께 다가가길 원하셨던 거다.

엇갈리는 행사 참여

어제(19일, 土)도 테터툴즈의 2차 오픈하우스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컴퓨터 관련 행사에는 왜 이렇게 가질 못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언제나 소식을 늦게 접해버리거나 아니면 일찍 접했더라도 항상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다. 그 일정이라는 것도 변경불가능한 일정이라던지, 다른 날에 잡혀 있는 일정이 그 날에 잡혀버린다던지 하는 것이 다반사인것이다. 이건 다 핑계라고 치부해버리면 되는걸지도 모른다.
행사 공지는 대부분 짧게는 일주일 전(좀 심했나? ㅡㅡ;;)이나 그 이상의 기간에서 할 텐데, 정보의 입수가 항상 늦는 것은 무관심한 성격탓이라고 정당화해버리면 될까나.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어린 시절(초등학교 4학년)부터 PC에 몰입(!)하여 살아온 나로서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 힘들었다. 부모님들도 나름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던데다가 PC를 접하고 나서는 동생과도 – 물론 다른 남매들보다 잦은 접촉이나 친밀감을 가졌겠지만 – 잘 놀지않아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초, 중, 고등학교 때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거나 아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스무살이 넘어 내 길이 PC쪽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질 무렵부터는 조금씩 소외감 같은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적극적이며 외향성의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생각된다.
간부는 어떤 조직에서든 그 아래에 속해 있거나 위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소속돼 있는 집단의 여러 면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군에 간부지원해서 갔는데,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런 성격을 얻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서인지 적극적이어 졌으며, 외향성의 성격을 획득했다고 판단된다.
물론 처음에 들어가서 – 훈련을 마치고 – 간부라는 신분을 갓 가지게 되었을 때는 그런 무관심한 성격탓으로 꽤나 고생했다. 물류 창고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아래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또 업무에 관심을 가지는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이론적인 수업들을 업무에 적용하고, 또 제대로 업무수행을 하는데까지 이른 시간은 무려 4년 가까이다.
아무래도 관심이라는 것이 있어야 업무능력이든 뭐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화..

나란 인간은 참 변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환경, 성격이라는 3가지 분류로 살펴본다면,
먼저 지금은 무려 27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지고 있다. 나이라는 것은 단지 태어난날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가를 나타내기도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사람이 얼마나 죽을 날에 가까워지는가 하는 것을 수치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참… 쓰고 나서도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의로군.

환경면에 있어서는 전보다 평균적인 삶의 질이 조금 더 높아졌다고 해야하는걸까? 질이라는 것의 기준이 모호해서 명확하게 어떤 점이 어떻게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의 생활과 비교해봤을때 지금의 삶은 여러 모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있다. 이전의 월세 생활에서 전세로, 지금은 어렵게 마련한 자금들을 이용한

우리집

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좋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부채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나아졌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가족은 화목하기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겠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17살 ~ 19살)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됐는데, 오늘 그렇지도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낮에 당산에서 회의를 하고 나서 친구녀석이 “너 요즘 왜 이렇게 침체돼 있니?”라는 것이다.
스스로는 성격의 변화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인지 “그래?”라는 답변만 해 줬을 뿐이다.
단지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변한건가? 사람의 성격이라는거 나이 먹어서도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 타인이 갑작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단숨에 – 변해 버린 것일까?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전보다 굉장히 차분해졌다. 사람이 결단을 하고 그것을 행하려고 할 때 변화되어버리는 것인가. 결단이라는 것은 목표가 있지 않더라도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버릴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좋지 않은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사람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달라지게 된다는 생각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성격 변화라는 주제에 연관지어 성화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성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믿기로 작정했을 때 긍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과정을 말하는데, 비난 받는 – 비그리스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성화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완전히 성화된 인간이 아닌 불완전 성화의 상태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이다.

뭔가.. 꽤나 복잡해져버릴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 겠다. 사실 좀 피곤하기 때문에 줄이는 것이기도 하다.

불꽃 중앙 교회 수원 성전 16주년 예배

오늘(2006년 8월 19일)은 수원 성전 창립 16주년이었으며, 내일 그에 대한 감사예배를 드린다.
2005년에는 15주년이라고 해서 굉장히 규모가 컸었다고 한다. 컨벤션 센터를 빌려다가 전 교인들과 여러 지인들을 모아서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90년 당회장이신 강마리아 목사님께서 김충규 목사님과 이현익 목사님을 만나서 시작하게된 교회가 이제 16년이 흘러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감찰하심으로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바르게 살아가는 당회장(강마리아) 목사님은 언제나 존경스럽다. 나를 포함한 많은 현세의 부패한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물론 부패하다고 알려진 것들의 대부분은 공격용 거짓 보도인 경우가 적지 않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들과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되어진다. 목회의 경영면과 말씀에 입각한 삶에 있어서 모델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말씀에 있어서는 철저한 김충규 목사님을 모델로 삼고 있다.

쨌든 오늘 수원에서 청년 예배를 드리고는 청년들의 연극 연습이 있어서 보고 왔는데, 참 기특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 전교인 수련회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특징적으로 잘 묘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칭창해 주고 싶다.
내일 본 공연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연습으로 만족해야했지만, 그들의 열정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도 그런 열정이 있어야하지 않겠냐는 도전을 받았다.

거리, 지하철 모금(구걸)

길거리 혹은 지하철등에서 모금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 내가 저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되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진정으로 그 모금 목적에 맞게 그 자금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진정 불우한 이웃들도 있을거라는 적은 가능성을 이유로 가끔씩 돕기도 한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대화중에서 지하철 맹인 장애우 모금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꼭 나오는 것이 그런 사람들 중에 진짜 맹인(장애우)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돌아다니며 모금하는 사람들이 끝(또는 처음)칸에 가서는 안경을 벗고 내린다거나, 장난으로 돈을 넣는 척하다가 안에 있는 돈을 빼려고 하면 정확하게 그 손목을 잡아낸다던가 하는 것들을 전해듣기도 했다. 바꿔말하면 사지 멀쩡 비장애우인경우에도 그런 모금을 통해서 생활을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들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천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부천에 와 살게된 지 12년 정도 되었고, 12년 전 부천역에서 꾸준히는 아니어도 지금까지도 가끔씩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친구가 부천역에서 모임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그 사람이 그랜져를 타고 가더라는 것이다. 친구에게서만 들었다면 거짓이었다고 판단했겠지만, 그 이후에도 연배가 있으신 분들의 목격증언이 있었으므로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불로소득을 준다는 것이 분하다.

그렇다면 통일교 배경의 단체들의 모금행위는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통일교의 이미지는 적잖이 부정적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이단이라는 점과 비기독교인 중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활동자금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 먹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선한 목자들을 그들과 함께 매도시켜버리도록 만들어버리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박준우씨(31·봉천동)는 “3~4년 전부터 국제학생봉사단 혹은 그 비슷한 이름을 쓰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몇 천원씩 돈을 준 적이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인 데다 외국인이라는 점, 뭔가 공익적인 성격이 있어 보여서 흔쾌히 기부했다. 하지만 통일교와 관련이 있는단체인 줄 알았다면 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뭐.. 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오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사를 시작한 이후 모금 행위가 사라졌다고 하는 기사 말미의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봤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통일교와 관련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초점을 두어야 할 문제는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 모금액이 진정 그들이 목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제대로 쓰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은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조합

얼마 전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아래의 동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사랑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자료들이 있고, 또 많은 의견들이 있다.

인성이의 사랑은 이상이다. 지현이의 사랑은 현실이다.

분명히 사랑은 현실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은 굉장한 오류라고 생각된다. 물론 현실 때문에 사랑이 휘청휘청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적지 않은 요소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위대하다 한다.

나 역시 조인성과 비슷한 입장이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사랑을 시작할 준비는 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라면 평생 함께 해 줄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률이 급하게 오르고 있는 지금의 세대에서 이런 입장에 대해서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 남자라면 내게 어떤 것이든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의 즐거움이나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랑을 하는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

많은 사랑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직접 또는 간접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사랑을 통해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를 가지지 않도록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평균적으로 사랑의 지속기간은 2년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아버지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다투었을 때 잠시 사랑의 감정이 끊겼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끝없는 사랑을 보이고 계신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와서인지 난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

라는 말을 믿는 바보 중에 하나이다.

쨌든 나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사랑하는 사람 상호간의 협조체제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는게 이 글의 주제인 셈이다.

한국통신 요금, 그리고 교육이라는 것…

이번달 들어서 사역중인 교회의 성경학교로부터 시작해서 이번주에 집회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ㅠㅠ).

다녀와서 빠져나갈 여러 요금들을 점검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한국통신 요금이었다.
저번달에 해지를 했기 때문에 요금이 70%정도만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해 본 결과, 해지 때와는 달리 요금 전체가 청구됐다!
한국통신 요금 납부사이트에서 확인해 보려고 들어갔더니만 이미 해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회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해지를 했더라도 지난 기록들은 살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한가지를 알게 됐는데, 작년 초에 가입해서 약 3개월여를 사용했던 넷스팟이 해지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신경쓰지 않은 내 탓이다.
쨌든, 지금까지 1년여의 기간동안 2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버렸다. 무신경한 내 뇌구조라니…

요 몇 일간의 대한수도원 성경학교 교사활동을 통해서 한 가지 거듭 확인하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선생님은 역시 폭력이나 강압적인 주지방법보다는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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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때리지 않았다거나 전혀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말을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야 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을 때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라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오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초등학생 폭행 선생님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교육에 있어서 폭력은 한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폭력은 필요 이상의 폭력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때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 경우를 들자면 내 아버지는 군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셨다. 신체적인 결함(색약) 때문에 장교 신분에 지원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병장으로 전역하셨지만, 전역 후의 아버지께서는 군의 교육 방식, 또한 조부님의 교육 방식을 취하셨다. 그 교육 방식이라는 것은 잘못에 대해 사랑의 매로 다스리시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던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원인은 그 교육방식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같은 경험을 두고 동생의 평가는 다르다. 사랑으로 하신 행동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긍정적 평가를 가진 우리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런 동생의 의견에 일부 찬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부분까지 덮을 수는 없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면에 있어서 매우 힘들다.

그래서 교육자라는 분들이 존경받는 것이다.

여름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마쳤다.

작년엔 두 행사를 함께해서 부담이 덜 됐던 데다가 선교단에서 하는 캠프도 갈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다른 일자에 하게 됐다.

그 덕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선교단 캠프에 가지 못한것은 적지 않은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원 계획은  작년과 같이 전교인 수련회와 병행하기로 되어있었다는데, 이번엔 수련회 전달 초에 갑작스레 변경하게 됐다고 한다.
수원 성전에서 교사를 맡고 있는 사람들도 교사 강습회는 물론이거니와 준비를 조금 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이번 성경학교는 어쩐일인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은데다가 더욱이 성경학교를 하는 곳이 부천이 아니라 수원이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아이도 생겼기때문에 조금 더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학교는 어찌어찌해서 잘 마무리 되었고, 전교인 수련회가 있었다.

작년에 선교단 캠프에서 사진을 담당해서 영상담당했던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며 여러모로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사실 이번 수련회 덕분에 캠프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나 역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구성원이기 때문인지, 수원 성전 청년회 회장으로부터 봉사할 남자청년이 적다고 하면서 봉사 부탁을 받았다.

당연.. 일단 그다지 할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승락했다.
승락해 놓고는 참.. 난감해 했다. 이번에 가서 작년보다 더 고생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조금은 나를 겁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4박 5일간의 수련회에서의 봉사는 생각보다 즐거웠고, 그 분으로부터의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있는 수련회가 되었다.

뭐.. 기록을 남기는 것에 있어서 사진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일단 오늘은 밤새도록 명언관리 프로그램을 손보느라 피곤하기에 여기서 줄여야겠다.

우워… 뭐 한것도 없이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기쁘도소이다!

와~ 티스토리에 초대됐다.

미니위니에 새로 생긴 티스토리 초대 공간이 생겼기에 수련회 가기전 신청해 뒀었는데, 요즘은 여러가지로 좋은일이 계속된다.

이번 티스토리 계정이 생긴일만해도 그렇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응답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생각된다.

쨌든.. 나도 블로거인가?!

전에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했었는데, 거의 사진 연결용으로 썼다가는 네이버에서 외부 링크를 차단시켜버려서 거의 쓰지 않는 폐쇄 상태로 버려져 있다.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잔뜩 드는건 왜일까?
전처럼 하루종일 글들을 읽느라 시간을 다 소비해 버리는 바보같은 짓은 반복하지 않겠지?

조금 더 체계적인 글을 작성하는데 주력하는 공간이 되었으면하는 작은 소망도 있다.

헤헤~ 마지막으로 계정 주신 WAZUP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푸코의 진자

지금 한창 재미있게 읽고 있는 책이다. 필자에게 있어 이 책의 저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논문 작성법과 장미의 이름으로 친숙했는데, 장미의 이름은 영화로 먼저 접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프리메이슨에 대한 자료들을 읽어봤는데 적잖이 황당한 내용들이 많이 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읽었던 책들이나 영화들이 이 책을 읽는데 도움이 되어진다. 사람들이 이러 저러한 책들을 읽어가면서 상호 연관성을 통해 더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 말이 새삼 체험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까소봉, 야코포 벨보, 디오탈레비라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추적해 나가는 모양새를 보는 것이 이 책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 책은 동생이 구매해서 읽고 있던것인데 나름대로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해 왔는데, 필자는 사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읽어내려가고 있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연하게도 최근에 읽고 본 책과 영화들의 주제 또는 그 구성 요소들에서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들을 이미 알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까소봉이 대학 논문을 성당기사단이라는 주제로 정한것은 우연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이후의 삶에서 그것과 뗼레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가지는 것을 보면 졸업논문 주제를 잘 선택해야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사실 대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갔는데, 군에서 졸업 논문 주제를 미리 정해서 복학하면서 그것에 대해 깊이 연구해서 작성해봐야겠다는 의미있는 결심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동안 철저히 잊혀졌다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2권을 막 다 읽고 난 후에 이 글을 적고 있는데, 3권이 꽤나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 책의 페이지 번호가 1권에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참 새로웠다. 책과 인연이 없어서라고 생각되어지기는 하지만 이렇게 페이지 번호가 이어지는 책은 처음 접해봤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적으면서 든 생각인데 이 책의 원본은 3권까지 쭉 이어지도록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싶다.

휴~ 이미 탄력 받은 상태라서 3권을 쭉 읽어나가고 싶지만 3권은 어디론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있기 때문에 내일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봐야겠다. 부천 시립 도서관에 조회해 보니 집 앞에 있는 도서관에 3권이 있다.

카카오 99%

한창 카카오 99%로 말들이 많았다.

필자는 99%를 좋아한다. 그런 필자가 먹는 것을 옆에서 보시던 모친께서도 한 조각 드셔보시더니 괜찮다고 좋아하시게 되셨다. 원래 쵸콜릿을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당뇨 때문에 드시지 못하시는데, 당도가 거의 없다는 걸 아시고는 필자의 것을 자주 탐하신다. 그리고 차에 두었던 카카오 99%는 어느새 빈 케이스만 남아있게 된다.

그래서 엊그제는 아주 어머니께 하나 새로 사다 드렸다. 기분 좋아라 하신다. 어머니께서 처음 그것을 맛보시던 날에 이러 저러한 이유로 몸이 고되시고 기분이 좋지 않으셨는데, 맛보시더니 기분도 괜찮아지고 몸이 가뿐해지는 듯한 느낌을 가지셨기 때문에 카카오 99%를 좋아하시게 되었다.

카카오 99%를 처음 접한것은 그다지 오래전이 아니다. 기껏해야 한 달도 안 되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것의 존재는 알았지만 사실 초콜릿류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나은 듯 하다.

어쨌든 작년 12월에 카카오 56%를 어느 모임엔가 참여해서 먹어본 일이 있는데 그 때 좀 달달한 것 같으면서도 이전에 먹었던 쵸콜릿보다 달지 않은 것에 괜찮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카카오와의 인연은 마련되었다.

그리고는 언젠가 공적인 일로 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는데 카카오 99%가 반값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 마트가 새로이 오픈해서 마련된 이벤트였다. 그래서 재빠르게 하나 구입했다. 카카오 99%는 사람들이 호감있게 구매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으로 된 것이 없었고 판형으로 되어있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뜯어 먹어보았다! 아~! 이거다! 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먹여보았을 때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그런 반응을 나타냈는데 먹으면 먹을 수록 느껴지는 그 진한 카카오의 맛이 괜찮게 느껴지는거다.

오호.. 이거 중독성 있는걸~ 이라고 생각하면서 마트를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 그 어떤 곳에서도 카카오 99%를 구매할 수 없었다. 그래서 먹지 못하고 있었다. 약 한달 가량을 그 맛을 그리워하면서 지냈지만 그 마트에서도 더 이상 그것을 판매 하지 않았다. 다른 대형 마트들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찾아보았지만 72% 또는 그 이하의 카카오만이 있었다.

급기야는 일반 편의점에서 그것을 구매하려고 찾아다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한한 사람이라는 듯한 눈초리를 날려주었을 뿐이었다. 가장 심했던 반응은 방화역 앞에 있는 GS25 편의점에서 겪었는데, 카카오 99% 없나요? 라는 질문을 하자 사장으로 보이는 아저씨께서 그걸 먹으려고 하시는거에요? 라면서 정말 직접적인 시선을 날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필자가 누군가! 군대에서도 할 말은 다 했던 인간이 아니던가! 그럼요! 그걸 먹으려고 찾지 왜 찾겠어요? 라며 째려주었다.

쨌든 그렇게 한 달여를 보내고 개강일이 다가오면서 신입생 OT를 계획 중인 총학생회에서 사진 촬영을 부탁해 왔다. 그래서 그 행사를 잘 마무리하고 집에 가려는데 다들 밥 먹으러 간다고 해서 같이 밥 먹으러 갔다가 나왔다.

밥을 먹고 내려와서 아이스크림들 먹자고 해서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메이지 카카오 99%인 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걸 골라 먹으려 하는데 같이 들어갔던 후배 녀석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본다. 계산하려는데 알바 누님이 자신도 이거 먹을 만해서 사다놓고 가끔씩 먹는다는 것이었다. 아~ 이 얼마나 반가운가! 에르네스토 게바라가 혁명동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이보다 더 기뻤을까 싶을 만큼 반가웠다. 그러고나서 보니 그것을 파는 편의점도 GS25였다.

같은 GS25인데 이렇게 달라서야! 흥~

어쨌뜬 지금은 총알도 없고, 다이어트도 시작해서 일체 살 찔 만한 것들과의 결별 상태이기 때문에 먹지 않고 있지만 이따금 총알 상태와 체중 감량 상태에 따라 먹을 생각이다. 아무래도 학교 앞 GS25에서는 그 종업원이 일 하는 한 계속 팔 것처럼 생각되니까.

기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한국어판)를 방금 다 읽어냈다.

전에도 몇 번인가 쓴 적이 있지만 책을 다 읽어낸다는 것은 일단 그 책의 난해함, 분량에 상관없이 엄청난 일이다. 읽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차치하고 읽는 속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책을 – 이전에도 많이 읽었지만 계속 읽기 시작한 이후로 – 읽었을 때보다 훨씬 빨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한 달이 걸리던 한권의 읽기 속도는 몇 주 내지는 몇 일만에 읽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굳이 흡족해 하는 것은 책 읽기 속도가 느리신 분들은 공감하리라 생각된다.

쨌뜬 이 책의 마지막권인 3권에서 역자인 이윤기씨는 도움말을 별도로 넣으려던것을 그만두었다면서 에코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넣었다.

작품이라는 것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나는 내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자들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혹은 작품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그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가 자아서 훼손할 생각은 없다.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푸코의 진자 3, 서울: 도서출판 열린책들, 2006, p. 1191.

그렇다 나는 어떤 분야의 것이든지 일단 평판을 제쳐두고 직접 확인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감상이나 느낌, 또는 작가(감독)의 의도 따위는 이미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졌느냐 혹은 어떤 메시지를 넣었느냐는 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 작품의 의도, 메시지를 구해내고 나서 필요해진다.

다른 사람의 것들을 무시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순수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에코 교수의 한 마디는 필자의 행동에 대한 한 근거로써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에코 교수가 부러 작품의 초반부에 난삽한 글이 있는 까닭에 대한 이유가 걸작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내 책 머리에 길고 난삽한 글이 실려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원고를 읽어본 내 친구들과 편집자들은, 너무 어려워서 읽으려니까 진땀이 나더라면서 처음의 백 페이지를 줄일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낯선 수도원에 들어가 이레를 묵을 작정을 한다면1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리듬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내 책을 읽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난삽한 첫 부분은 나의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 독자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입문 의례와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이 싫은 독자에게는 나머지도 싫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산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산기슭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산의 호흡법을 배우고, 산의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푸코의 진자 3, 서울: 도서출판 열린책들, 2006, p. 1190.

그렇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어려운 부분에 대해 동생이 잘 읽히느냐는 질문을 해 왔다. 어머님께서도 읽어보시려 하셨는지 똑같은 질문을 해 왔다. 필자는 어떤 것이든지 일단 시작하면 끝내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읽은것이기는 하지만 저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공부와 벽을 쌓았다고 할만큼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역을 하면서 공부라는 것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공부다운 공부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하다보면 알게 된다. 경험이라는 것은 그런 면에 있어서 중요하다. 뭐든 어렵더라도 일단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공부 역시 지금 당장은 어렵고 피토하고 쓰러질 것 같아도 계속 하다보면 자신만의 요령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그 이전에 받았던 성적의 두배수에 달하는 평점을 받도록 해 주었다. 컴퓨터에만 국한 되었던 집중력은 공부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누구든 산기슭에 남아있고자 한다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분이나 산 속에 들어갔을 때의 그 기분을 전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에코교수는 자신의 책을 읽을 자격시험을 작품의 초반부에 장치해 놓았기 때문에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산에 오르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산에 올라 그 정상을 점령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산에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완전히 그 산을 정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까지 읽었음에도 아직 모자란 감이 있다.

이런 작품이 더 매력이 있는 것은 필자의 성격이상 때문일까?

  1. 실제로 “장미의 이름”은 이렇게 시작된다[]

[펌]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

김준우박사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I. 문제제기: 세계/한국 기독교의 몰락 위기 — 윤리학자가 최근의 예수 연구 소개에 전념하는 이유

1.  한국교회/이민교회는 지난 세대 동안 급성장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London Sunday Times 보도 – “영국 전체국민의 70%가 하나님을 믿지만, 18세 연령층의 경우는 77%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가 한 세대만에 이렇게 몰락하는 위기는 조만간 한국교회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와 쇠퇴는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빠져나가기 때문으로 조사. 새신자 전도의 어려움 – 영남지역의 꽤 큰 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새신자는 10명쯤”- 3년에 1명꼴. 2천년 동안 확장을 거듭한 기독교가 서구에서 한 세대만에 급속히 몰락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새신자를 얻기 힘들어 교회가 점차 “양로원”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적 위기의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외적인 요인들, 즉 유물론적 세계관, 세속주의, 소비주의, 주5일 근무제 등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적인 요인 해결이 시급하다.

2. 귀국해서 두세 군데 기독교 대학들에서 몇 년 동안 [기독교 개론]과목을 가르친 경험: 신학생들 가르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신학생들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작업이지만, 기독교 대학들의 학생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5-10%에 불과했다.  대다수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은 동정녀 탄생, 육체부활 등 이해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억지부린다.”

3. 물음
1: 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왜 기독교인들 가운데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그 비율이 많은가?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는 믿으면서, 예수처럼 목숨 걸고 살려 하지 않는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무관심.
물음
2: 교회가 가르치는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지,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 언어가 매우 게토화된 언어이다.- 새신자들의 장벽.
교회는 오늘날 교육받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니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정직하게 이해, 수긍하는가?

4. 이 문제는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정직한 이해 -> 확신 -> 열심 -> 교회부흥.  “교회의 게토화된 언어를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윽박지르는 한, 기독교가 몰락하고 만다는 것은 서구교회가 이미 입증했다.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가 1년 넘게 기독교 학술서적 베스트셀러 1위- 성경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추구.  청년층의 갈증 반영,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고작 “성불하신 예수”, “유영모와 함석헌의 예수”가 전부이다.

II. 최근의 “예수 르네상스” –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중심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굳이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 언행 불일치의 근본 이유.
매주일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머리로는 정직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고백하는 것, 외우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독교인의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신앙고백조차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존 캅 박사의 지적대로,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토론을 통해 자기 나름의 신앙으로 다듬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열정이 없는 것 아닌가?  사도신경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 즉 예수의 잉태/탄생, 죽음과 부활/승천만 있지, 예수의 행적, 교훈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헬레니즘 밀의종교 영향을 받은 바울의 구원자 이해(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승천한 구원자)가 압도하게 된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잉태, 탄생, 수난, 죽음, 승천)은 모두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예수의 일생이 이처럼 수동적이라면, 기독교인의 생활태도도 자연히 수동적, 비주체적, 노예적이 된다.

1. 예수 이해는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관계 이해가 기초이다 – 예수와 폭력 문제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9․11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모슬렘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대응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원수 사랑을 내세워 폭력에 굴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결과적으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태 5:39).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오해하듯이 폭력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말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반항하라는 가르침이었으며, 폭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복수심으로 발전하여 똑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친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가 오른쪽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칠 경우에는 왼뺨을 맞게 된다. 따라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친 경우, 즉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참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 손을 사용하여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는 것은 손등으로 때릴 경우뿐이다. 이것 역시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가해자가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거나, 아니면 오른쪽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는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해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된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이다”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그런다면 맞아죽을 것이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2)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주어라.”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겉옷과 속옷이 입은 옷의 전부였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4에 나와 있다.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상대로 이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로버트 펑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 따라,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했다.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았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수치를 당하는 것은 그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게릴라 전술이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이다.

3)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 투쟁을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윤리이다.

2. “예수 르네상스”의 신학적 배경과 방법론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의 성서연구: 교의학에 종속되어 교리를 변증하는 수단/도구.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성서연구: 역사비평이라는 합리성을 통해 본문 배후 탐구 –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해방.
20세기 전반부: 역사적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
1960년대 해방신학: 현재적 해방실천에 초점 – 텍스트 자체보다는 해석자의 컨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0년대 사회학적 방법(Gottwald, Kee, Horseley, Teissen): 본문의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 관계 관찰.
1980년대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석: 본문 배후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구조 속에서 의미 해석.
1980년대 이후 “예수 르네상스” –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서들이 수 십 권 출판.
1983년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산하에 Historical Jesus Section 구성됨
1985년 [예수 세미나] 조직

1) 예수찾기의 간략한 역사 (게르트 타이센․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역,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01, 31 이하를 중심으로 정리)

(1) 1단계(Old Quest): 18세기 중엽-19세기 독일
합리주의, 중세의 권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참된 근거” 추구
교회가 가르쳐주는 신격화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서와 역사와 이성이 가르쳐주는 “진짜 예수”를 찾기 시작.
라이마루스(1694-1768): 네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들이 서로 다르다 – 복음서들의 불일치 문제 지적.
예수는 실패한 유대인 혁명가였다. 예수는 예언자적-묵시적 성격의 유대인인데 반해, 기독교는 사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수의 정치적-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의 불일치는 사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 {예수의 생애}(1835/36): 예수는 위대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하나, 기적적으로 종말을 기대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열광적” 유대인이었다. 복음서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적 진술”이다.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된 것은 사도들이 사기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의 무의식적 과정 때문이다.

(2) 2단계: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론,
18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수많은 “예수전” 연구 – 르낭(1863), 슐라이에르마허(1864), 슈트라우스(1835, 1865) 등 교회의 선포와 역사적 예수를 대치시킴.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 기독교의 신빙성 근거 -> 자유주의 신학
르낭: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차츰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요구함으로써 배척받음.
홀츠만: 무시간적인 윤리적 진리를 설파하는 교사의 모습,
요하네스 바이쓰: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 이
슈바이처(1906):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 곧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에 의해 종말이 일어날 것 기대.  자신의 선교중에 사람의 아들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사역하였으나, 이런 기대가 빗나갔음을 알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에게 메시아적 고난을 체현하기 위해 자발적 죽음 선택. 그러나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착각한 묵시종말론자”(mistaken apocalypticist)였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돌아갔다.
비판: 예수전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시대정신과 이상이라는 의상을 예수에게 덧입힌 현대적 예수를 그린 것이다.

(3) 3단계: 역사적 예수 안 찾기 시대(no quest): 질문의 폐기 시대
신정통주의(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등) –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
양식비평: 복음서의 전승들이 직접 반영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다.
켈러(1896): 진짜 예수란 역사가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 처음 신앙인들이 믿었던 케리그마 그리스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1932): 예수의 삶의 의미와 존재 자체의 의미는 그의 죽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불트만의 <예수>(1926), <신약성서와 신화론>(1941):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불트만: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실존주의적 도전.  예수의 인성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에서 유래했다.
비판:
공적: 세상의 역사를 최고의 왕좌에 모시는 이른바 역사절대화라는 우상숭배로부터의 탈출 극단적인 역사회의주의라는 불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  “믿음만으로”라는 신앙우선의 정신을 재생.
폐해: 케리그마 신학과 실존론적 해석학의 결합은 성서의 구원의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사사화, 내면화, 정신화, 추상화시키는 엄청난 폐단을 야기시켰다(김창락, 62)

(4) 새로운 탐구(New Quest):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언동 속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근거를 찾으려함.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내포된 자기 이해는 초기 기독교 선포 속에 드러난 자기이해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탐구를 이룩할 수 있으며, 신정통주의의 지침 아래에서 타당하다.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
케제만의 {오늘의 신약성서 문제}, 본캄의 {나사렛 예수}(1956),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1983)  신정통주의의 틀 속에서, 복음서 속의 예수와 바울서신들 속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찾기에 주력하였다.
보른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 내용상 연속성 있다. 현재적인 종말론적 성취
예레미아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의 육화된 존재
비판: 신정통주의는 예수의 중요성을 단지 그의 죽음과 부활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펑크, 109)

(5) 세 번째 탐구(Third Quest) – 예수 르네상스 1975년 이후 신정통주의 붕괴, 나그 함마디 문서, 사해 두루마리 발견, 비유와 지혜전승 재발견,  –  종교사학,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등으로부터 배운 모델, 학제간 연구
a.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의 예수 사이를 구별한다.(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이 둘이 똑같은 존재라고 주장)
b. 신약성서 복음서들 이외의 자료들도 이용한다.   (   ꡒ    비정경 자료들은 중요하지 않음을 주장)
c. 교회의 모든 교리들을 역사적 탐구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   ꡒ    역사적 예수를 신조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킴)
d.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 가운데 진정한 것을 가려낸다. (    ”     가려내지 않는다)
샌더스: 예수는 유대민족 복권의 신학 전통에서 이해되는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이다.
버튼 맥: 방랑하는 견유학파적 현자, 전복적인 지혜의 교사
엘리자베쓰 쉬쓸러 피오렌자: 예수는 지혜의 예언자, 평등한 제자직
존 도미닉 크로산: 브로커 체제에 대항하여 치유와 개방된 식탁을 통해 철저한 평등주의를 실천한 사회적 혁명가
마커스 보그: 카리스마적 치유자, 성인, 전복적 현자, 사회적 예언자, 이스라엘의 재활성화를 추구하는 운동의 창시자
유대교: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라”(레 19:2), 예수: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라”(눅 6:36)
리처드 호슬리: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적 혁명가

2) 예수 세미나
[예수 세미나]는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중심이 되어 신약학자 200여 명이 조직한 공동연구 모임으로, 정회원에 속하는 신약학 전공 박사만 76명에 이른다. 이들은 1985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나흘 동안 40명 내지 50명이 참석하여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로 되어있는 모든 기록들을 수집하여, 그 진위를 투표로 평가하여, {5복음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찾아서}(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 –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새롭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학자역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와 {예수의 행적: 예수의 진정한 행적을 찾아서}(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ks of Jesus, 1998)를 출판하여, 전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던진 학자 집단이다. 그 충격은 타임지(1996년 4월8일자, pp. 52-60), 뉴스위크지(1996년 4월8일자, pp. 60-70),  유에스 뉴스 & 월드리포트지(1996년 4월8일자, pp. 47-53)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최근의 보도(Ministry, 1999, Jan.)에 따르면, [예수 세미나], 특히 크로산과 펑크의 저서들을 통해, 미국 교회 교인들 사이에 “예수 붐”이 일어나고 있어, 목회자들이 이 저서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는 그가 1991년에 출판한 책으로서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의 축소판으로서, 이 책 Historical Jesus는 출판된 지 1년 반만에 4만 부가 팔린 책이었다. 크로산 박사는 1950년 나이 16살에 가톨릭 수도회(세르비떼)에 들어가 1969년 결혼을 위해 사제직을 떠나 드폴 대학교의 교수가 된 후 1995년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일생을 바친 학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에 관해 질문하는 물음들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는 특히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이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예수가 세례 요한과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략들과 그 신학적 이유, 예수가 처형된 이유,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에게 무덤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는지, 예수를 매장했다고 기록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부활절에 일어난 일 등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로버트 펑크는 35년간 대학에서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다가 몬태나 대학교에서 은퇴한 학자로서, [예수 세미나]를 설립하고 그 세미나의 결론들을 위의 두 책으로 엮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솔직히}는 그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는, [예수 세미나]에 적극 참여한 75명의 통찰력이 결집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1부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어떻게 우상파괴자 예수가 기독교의 성상/우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2부 “예수의 복음”과 3부 “복음서들의 예수” 즉
“예수에 관한 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비유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부인”들(제사장, 바리새인들, 즉 경건하고 정결한 종교인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외부인들”(병자들, 죄인들, 불구자들, 즉 율법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 뒤바뀌게 되는 것, 즉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증들이라고 설명한다. 둘째로 “복음서들의 예수”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마케팅”하기 위해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 죽음, 부활, 재림, 출생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화적으로 덧칠하였는지를 하나하나 집어내고 있다. 이 책은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이상으로 학문적 정직성을 고집한 책이다.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 – 학제간 연구
최근에 학자들이 제안한 예수상들은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 G. 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 P. Sanders, 1985)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커스 보그(Marcus Borg, 1984)의 “종교적 달인””카리스마적 존재로서 병고치는 자””지혜의 스승””사회적 예언자””운동의 촉매자”와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 1987)의 예수상도 덧붙일 수 있다. 크로산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예수상들의 혼란을 돌파한다.
(1)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 接神종교 이론, 질병과 고통, 주술, 식사, 사회계층론, 저항운동이론 등.
(2)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 브로커체제-지배체제 분석, 노예제 농경사회의 피지배층의 생활, 각종 저항운동,
(3) 예수 전승의 문헌 분석을 통한 미시적 차원: 522개 예수전승의 단락들에 대한 전승층 구분.
(4) 성서와 기독교 전통, 특히 교리의 신화적 언어와 세계관 배후에 놓여있는 체험 탐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관계의 유비 -> 생물학적 유비 -> 형이상학적 유비(보그, {예수의 의미})
(a) 예수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에 대해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롬 1:4), 마가는 “세례”를 통해서(막1:11), 마태와 누가는 “잉태”를 통해서(마 1:20; 눅 1:32), 요한은 “태초”부터(요 1:1-18)라고 주장한다.
(b)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의 근거가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예수의 “동정녀 출생” “부활/승천”을 고백하게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강조점들 –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1) 예수의 사회적 세계: 농경사회, 후견인-의뢰인의 착취체제, 절망의 시대, 100년 동안 33회의 농민저항 시대.
이러한 학제간 연구 방법론에 따른 크로산의 분석에 의하면, 예수운동의 핵심은 1세기 로마제국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을 통한 약탈과 대농장을 중심으로 한 노예경제를 바탕으로 전세계의 상업화, 도시화를 추진했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한국어판 서문(2000년)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세계화, 도시화, 상업화에 맞서서 저항하였다”고 말한다.

(1) “로마의 평화”는 주변부에 대한 폭력과 전쟁을 통한 중심부의 평화였을 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보복을 은폐하는 신화였다.  우선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에서, “로마의 평화”가 허구적인 정치적 선전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위해 크로산은 엘리트층의 문학적 기록이 아니라,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속에 나타난 식민지 농민들의 문서, 즉 예수 당시의 예수와 같은 계급이었던 노동자 힐라리온의 편지를 인용하고, 직조공 트리폰의 일대기를 추적하여, 당시의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생과 무거운 세금, 벌금, 징병제도 등을 분석한다. 이어서 그는 로마제국의 평민들의 고통을 입증하기 위해 [투리아에 대한 추도]에 나타난 일화를 추적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여러 시인들, 즉 버질, 호레이스, 프로퍼티우스, 오비드 등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로마제국의 “보복”과 “공포”를 설명한 다음,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타난 브리튼의 장군 칼가쿠스의 로마제국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로마제국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로마의 평화”라는 허상을 벗긴다. “그들은 약탈, 살육, 강탈을 제국[imperium]이라 부르고, 폐허로 만드는 것을 평화라 부른다.”

(2) 로마제국은 의뢰인-후견인체제로 연결된 친분중심사회로서, 부패와 불평등,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크로산은 토마스 카니(Thomas Carney)의 고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로마세계가 계급이 아니라 후견인 체제(patronage)에 기초한 사회로서, 사회전체가 의뢰인-후견인의 고리들로 연결된 친분관계의 사회이며, 가부장적 사회로서, 억압과 착취의 사회이며 “부패한 사회”임을 밝힌다. 크로산은 이렇게 된 원인이 로마제국의 경우, 중국처럼 경쟁적인 과거제도나 터키처럼 황실학교와 같은 관리 선발을 위한 공식적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사적인 친분과 추천에 의해 모든 관리를 임명하여, 사회 전체가 브로커로 연결된 체제였다고 지적한다.  후견인 사회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는 “영향력 있는 권력 브로커의 도움을 통해 관직과 이익을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로 이어진 로마 사회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는 족벌주의, 연고주의로 연결된 철저한 불평등 사회였으며,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이러한 브로커 관계는 현대의 종속이론에서 제3세계의 엘리트들과 중심부의 엘리트들의 관계처럼, 착취와 억압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3)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로서, 토지세만 생산물의 2/3에 달했던 극도의 착취구조였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였다.  크로산은 농경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도시의 극소수 지배계급과 농촌의 대부분의 소작농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였고, 제조업은 소규모의 수공업 단계에 불과하여 지배계급의 재산 축적은 토지 임대와 세금, 그리고 대부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석한다. 그는 먼저 오늘날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당시의 평균수명과 세금제도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전 시기에는 출생하는 아이들의 거의 1/3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거의 60%가 죽고, 스물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75%가, 마흔 여섯 살 때는 90%가 죽었다. 3%만이 예순 살이 되었다”(Carney, 88). 한편 세금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세금으로 뽑아낸 자원들은 대부분행정가들에게 재분배되었는데, 이들은 큰 토지로부터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자들이었다. 세금징수는 보통 세원(稅源)을 까먹는 방식이었다. 기껏해야 세원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세원을 개발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며, 흔히 세원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사실상 그들 이전의 원시사회의 엘리트들이나, 그들 다음의 산업사회의 엘리트들이 차지했던 것보다 더욱 큰 몫을 차지하였다”.
크로산은 이어서 게하르트 렌스키의 농경사회의 아홉 계층 이론을 통해, 당시의 별도의 계급이었던 통치자는 사실상 자기의 세력 범위 안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당한 소유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과, 그 다음의 지배계급은 보통 인구의 1% 정도였지만, 대부분의 농경국가의 국가 수입의 적어도 1/4 정도를 받아, 지배계급과 통치자는 모두 그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신하계급은 대개 인구의 5%로서, 서기관들과 관료들로부터 군인들과 장군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정치적 엘리트를 위해 봉사”했다고 본다.  상인계급은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몇몇 경우에는 정치권력도 갖고 있었으며, 사제계급은 농경사회에서 마지막 특권층으로서, 예를 들어, B.C.E. 12세기의 이집트에서는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으며, C.E.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다고 지적한다. 크로산은 이들 상층계급이 각종 세금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필수품조차 빼앗아감으로써 농민들을 철저히 착취하였음을 입증한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의 반세계화 운동을 유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주로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비판적으로 주석하는 가운데,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 주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33 차례의 반로마, 반귀족 농민저항과 반란을 유형별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장 폭력투쟁을 벌인 의적들, 하느님의 폭력에 의존한 천년왕국적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들, 주술사, 혁명가와 반란자들의 저항에 관해 그는 사회적 출신계급과 이념, 전략, 로마의 대응에 관해 자세하게 해명한다. 그는 우선,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직전의 천년왕국적 기대와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B.C.E. 160년대의 천년왕국적 완성에 대해 치솟았던 비전은 그 이후에 매우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경건한 사람들의 시대는, [희년](Jubilee) 23:27에 그려진 대로, “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모세의 언약](Testament of Moses) 10:1에 약속된, “악마”도 “끝장나지” 않았으며,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니엘7:27의 “영원한 나라”는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녹 1서 90:33의 동물들의 묵시(Animal Apocalypse)에 극적으로 그려진 것, 즉 모든 양들과 짐승들, 새들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그들이 모두 순하게 되고 그의 집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주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OTP 2.102; 1.931; 1.71). 그 대신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우선 마카비 형제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로마인들의 지배였다. 그래서 묵시종말적 비전, 천년왕국에 대한 꿈, 그리고 초월적인 희망은 계속해서 새로 기록되었고 다시 읽혀졌다.
유대인들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또 다시 희망을 바라보았다. 참담한 아이러니(irony)는 다니엘 7-12장의 천년왕국적 소망이 천사들을 기다렸으나 결국 하스몬 왕가를 보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시편]도 주님 메시아, 즉 다윗의 아들을 기다렸으나, 그 대신에 나타난 것은
지긋지긋한 헤롯, 즉 안티파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 대한 비전들이 인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아 계속해서 나타나고, 또 다시 패배하고 또 다시 되풀이되는 비전들을 조롱하기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옳다. 그 비전들은 완전한 정의에 대한 희망을 계속 살아있게 함으로써 작은 이익들을 수단과 방법으로 성취하고, 전략과 전술들을 서서히 고통 가운데 깨닫도록 만든다.
그 이상적 나라에 대한 희망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완전히 꺾였으며, 로마제국조차 자신이 그 이상적 나라라고 자칭하고, 유대인들조차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바만 야수트](Bahman Yasht, Eddy 343-349)에 나오는 천년왕국적 비전과 다니엘 2장과 7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적 비전(Collins 1984a:21-26)은 세계의 패권이 네 차례 바뀌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 둘 모두의 과거 역사에 대한 묵시적 회고는 미래 역사에 대한 예언처럼 꾸며져 있다. 그 페르시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네 왕국들은 아시리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구원자 왕 아후라 마즈다와 페르시아 민족이 회복한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그 네 왕국들이 바빌로니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천군천사들의 주인인 야훼와 유대 민족이 찾은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의 회복도 아니었고, 유대인들의 회복도 아니었으며,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제국은 자체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 세계적 패권의 순서를 수정하여 이용했다. 카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는 C.E. 30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C.E. 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유대인 저술가조차도, 비록 마지못해 했을지라도, 로마가 그 다섯 번째 제국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인들에 대항하는 종교정치적 예언 [네번째 시빌의 신탁](The
Fourth Sibylline Oracle)은 아마도 B.C.E. 3세기 초에 비유대인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C.E.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시킨 후, 어느 유대인 저자가 이 신탁을 수정하였다. 네 제국에 대한 원래의 신탁(4.49-101)과 그 후의 묵시종말적 완성(4.173-192) 사이에, 로마의 패권에 대한 묘사가 후대에 삽입되었다(4.102-172)…. 그 다섯번째 왕국은 야훼의 우주적 신정통치와 신실한 유대백성들의 설욕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인들을 대신한 로마인들의 제국이었다.  묵시종말적 심판과 천년왕국적 완성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크로산은 이처럼 묵시종말적 희망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농민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참고 견디는 계급이지만,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의 농민들이 로마 총독부와 성전으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착취당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아왔는데, 특별히 로마제국 시대에 그처럼 많이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 이유는 농민들이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천민계층이 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 농민들은 거의 5백 년 동안이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 밑에서, 즉 페르시아인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류코스 왕조, 그리고 이제는 로마인들 밑에서 그처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언제나 이중으로 세금을 물어야만 했다. 즉 외국의 제국들에 대해, 또한 성전에 대해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만 했다. 또한 언제나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셀류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극심한 종교정치적 도발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 반란은 하스몬 가문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는데, 하스몬 가문은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에 속하였던 제사장 가문으로서 귀족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제까지의 저항들과는 매우 다르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피터 브런트(Peter Brunt)의 표현처럼, “66년의 반란은 이방인 지배자들에 대항한 것만큼이나 동족(同族) 가운데 지주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항한 것”(14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간의 사회 및 정치 윤리의식을 갖고, 유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인들이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무자비하게 세금을 부과했고, 생존 차원에 머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식된 박탈감이 있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정상적인 빈곤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핍절(乏絶)과 극빈 상태로 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렌스키의 사회 계층화 이론에 따르자면, 농민계급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결하고 비천하며 소모적인 계급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크로산은 이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과연 정확히 무엇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농민계급을 ‘정상적인’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인식된 박탈감, 그리고 감소로 인한 박탈감에 빠트려, 결국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고,  마틴 굿맨, 메이건 브로쉬, 빅터 체리코버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원인이 부채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선, 메이건 브로쉬(Magen Broshi)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헤롯 왕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왕이 벌인] 사업들 가운데 적어도 20개의 사업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당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운 것들이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그 나라가 전례 없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상당한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31). 그러나 마틴 굿맨이 지적하였듯이, 비록 “그 효과가 유익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부자들뿐이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몰랐던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이득도 없었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고통을 겪었다.  유대의 경제는 투자한 자본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충분한 사업이 없었으며, 부유한 귀족들이 새로운 제조업이나 장거리 무역에 돈을 투자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대신에 그들은 재산을 토지나 대부(貸付)에 투자했다”(1982:419-421). 부자들이 재산을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결국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일일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악했던 것은 대부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크로산은 여기서 로마제국 당시 부자들의 대부업을 통한 농민들의 부채문제가 율법 조항, 즉 동족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조항(출 22:25; 신 23:20)과 안식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면제시켜야 한다는 조항(신15:1-8)을 어떻게 회피하였는지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금지조항이 있었다(출22:25; 신 23:20). 물론 사람들이 이 조항을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싶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투자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빅터 체리코버(Victor Tcherikover)가 지적했듯이, “무이자(無利子) 대출, 특히 옥수수에 대한 무이자 대출은 성서의 율법보다 오래된 것이며, 이런 대출은 고대 근동지방의 많은 농경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이자 대출은 때때로 이자를 갚는 대출보다 채무자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이자 대출이 대개 단기간의 대출이며, 그 약정한 기간 내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Tcherikover et al. 1.35-36). 다시 말해서,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보다 단기간에 갚지 못할 경우 무거운 벌금을 물림으로써 더욱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1장에서 사래우스가 트리폰에게 예탁-대출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틴 굿맨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그러한 무이자 예탁-대출에 관해 말하면서, “만일 채무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채권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대신에 고마워하는 친구를 얻는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지나서 상환할 경우에는, 흔히 그럴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지만,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에 나타난 벌금은 20%의 이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조항은 매우 쉽게, 또한 매우 큰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두 번째 난관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해결책은 더욱 중요하였다. 신명기 15:1-8에 따르면, 유대인들 사이의 모든 빚은 일곱째 해(안식년)가 되면 면제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15:9-11은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채권자가 대출을 거부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다가올수록 채권자들은 돈을 빌려주기를 더욱 꺼려하였기 때문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더욱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해결책은 차압 동의서(prosbul)였는데, 이것은 심지어 일곱째 해 동안에도 아직 갚지 않은 대출금을 법정으로 하여금 상환받도록 허락하는 문서였다. 그들은 성서의 율법이 일곱째 해에 개인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지만, 법정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해결책을 처음 도입 것이 위대한 랍비 힐렐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는 B.C.E. 1세기 중엽부터 C.E. 1세기의 첫 10년대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 마틴 굿맨은 “힐렐이 실제로 차압 동의서를 만든 것과 관련이 있던, 아니면 없던 간에,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는  이런 제도가 네로 황제 초기에, 아마도 법정의 지지를 받아,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1982:422)고 말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임박하게 되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는 문제는 힐렐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왜 이 문제가 그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대에 해결되었는가? 만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싶지만 빌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부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싶지만 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차압 동의서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부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런 제도를 원했던 것은 정확히 그들이 대부업에 투자할 만큼 과잉 재산이 많았던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일곱째 해가 다가와도 돈을 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지만, 그 법이 바뀐 것은 부자들이 그런 제도를 더욱 원하게 되었던 때였다. 즉 C.E. 1세기가 시작되기 전후에 힐렐이 이런 제도를 주창했던 아니했던 간에, 부자들로서도 이런 제도가 절실했기 때문에, 법이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예수 당시의 가장 큰 사회적 모순이며 “유대 사회가 속속들이 ?게 된 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동안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유입된 과잉 재산이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 즉 극심한 빈부격차로서, 부자들의 막대한 잉여재산을 통한 대부업의 결과로 농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되어, 결국 농민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유대-로마 전쟁 초기에 “요세푸스가 인솔했던 의적 군대와 그를 지원했던 그 지방의 농민들은 그 지방의 수도들이었던 셉포리스나 티베리아스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도시들에는 세금에 대한 사정(査定)과 빚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2) 비정치적 예수상에서 정치적 예수상으로 200년 전에 이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이 세상의 나라”로서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된 것이며, 예수의 처형도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여,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를 비정치적 인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 즉 이 세상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행동에 의해 곧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올 것을 예상하였던 인물로 간주하여, 예수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물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셋째로는 현대 신약학이 개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여, 예수가 개인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지,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적인 견유철학자 전통에 서서 개인의 생활방식에 관해 말한 현인으로서 간주하는 입장도 이런 개인주의적 이해의 연장이다.
넷째로, 현대 신약학자들이 주로 유럽과 북미의 백인 남성 중산층 출신으로서 교회와 관련된 기관에서 교수직에 있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의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아래로부터의” 시각, 학자들의 현장이 신학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학제간 연구와 교차문화적 관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어, 예수 전승을 재조명하게 된 결과, 오늘날 예수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물, 즉 사회적 생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회적 비전을 제시한 “정치적”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3)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에서 사회적 혁명가, 체제전복적 지혜의 스승 (자생적 견유철학자)으로 요하네스 바이스-알버트 슈바이처-루돌프 불트만 이후의 묵시종말론적 합의가 1980년에 와해되었다. 묵시종말적 예언자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오실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 초대교회의 고백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금식하는 세례요한(fasting John)과 잔치하는 예수(feasting Jesus)의 전략적 차이: 현재적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였으며, 그의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전략은 당시의 착취체제의 심장을 겨냥한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a peasant Jewish Cynic)였다. 그의 농촌 마을은, 견유철학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었던 셉포리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도시와 충분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저지대 갈릴리의 농촌 마을들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전략은 그 자신에게 암묵적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명시적이었던 전략으로서,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free healing and common eating)를 결합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권력의 위계적이며 후견인 체제를 당연시하던 것을 단번에 부정한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전략이었다. 예수 자신이 단순히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브로커로 해석되지 않도록, 그는 항상 옮겨다녔으며, 나자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었고 중보자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기적과 비유, 치유와 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며, 사람들 서로 간에도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하였다.
(2) 하나님 나라: 브로커 없는 나라, 성가신 자들과 천민들의 나라 크로산은 예수의 사회적 비전이었던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가난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의 당시 용법을 추적하여, 하느님 나라가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였음을 밝힌다. 하느님 나라는 천민들의 나라였다는 말이다.
예수는 충격적인 역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Poor)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Destitute)에 관해 말했다. 이런 사실은 루가 6:20과 마태오 5:3 모두의 배후에 있는 말씀복음 Q의 그리스어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들에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페네테스, 즉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프토코이, 즉 극빈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 가난이 아니라 거지 신세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농민들이나 장인 계급의 하느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자들, 천민들, 소모계층의 하느님 나라를 말했던 것이다.
크로산은 또한 겨자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누룩의 비유, 진주의 비유 등을 들어 하느님 나라가 성가신 자들의 나라임을 규명한다.
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 식물이 속담처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해서 1 미터 정도의 작은 관목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겨자는 원치 않는 장소에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특별히 원치 않는 경작지에 새들이 꼬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과 같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잡초와 같은 것도 아니라, 얼얼한 맛을 지니고 있으며 경작지를 망쳐놓을 위험성이 있는 겨자 식물과 같다는 말이다. 즉 그 나라는 단지 조금만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주의 깊게 통제된 적은 분량만을 원하는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3) 성전의 상징적 파괴
예수 주변에 병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회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다수 소작농들이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림으로써 병에 걸리게 된 것이지만, 제사장들은 개인적인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가르치고, 병이 나을 경우 그 몸이 깨끗해진 것을 제사장이 선언하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제물을 바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브로커 노릇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성전과 자비심을 상실한 제사장들은 근엄한 얼굴로 벼룩이 간마저 빼먹는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을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고 본다. 크로산은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성전 사건을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연결시킨 점이라고 논증한다.  그 대답은 마르코 11:15-19에 있는데, 이 구절은 흔히 성전 정화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파괴이다.  소용없는 무화과나무가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성전도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 그 행동은 물론 성전을 물리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상징적 공격이다. 그 행동은 성전의 재정적, 희생제사적, 예배적 기능을 “중단”시킴으로써 성전을 “파괴시킨” 것이다.

III.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목회적 의미

한국사회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의 “組暴 국가”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비합리성, 비민주성, 배타성, 수동성, 레드 콤플렉스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다(박노자, 최상천, 김진호). 또한 교회는 타계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특히 연고주의가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교회 역시 지역교회의 계층화로 인해 사회적 연고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합리성, 민주성, 개방성, 능동성을 위해 공헌할 수 있으며, 연고주의 극복 가능성의 길을 열어준다.

(1)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는 아니다(예: 몰몬교. 통일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현대 이후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루돌프 불트만).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성인들의 정직한 물음들을 불신앙의 소산이라고 간단히 치부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종교적 무지의 해결자가 아니라, 종교적 무지의 원천이 되어왔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은 역사학, 문화인류학, 본문비평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예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없었으며,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세미나]의 공동작업의 결과 때문이다. 최근의 예수 연구는 기독교의 뿌리를 역사적 예수 위에 바로 세우게 한다.

(2) 최근에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젊은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함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즉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재림,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등,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넌센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이런 전통적 교리들에 파묻혀 있던 예수를 발굴하여,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특히 이런 전통적 교리들의 신화적 언어들과 세계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예수의 모습 위에 덧칠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준다는 의미에서, 전근대적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교회의 합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3)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왔다. 이것은 예수가 보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바라본 결과이며, 예수가 믿으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믿은 결과였다. 크로산과 펑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손가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가 보라고 가리킨 것(하나님 나라)을 보라고 말한다. 예수를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진정한 인간 예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예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수동태로 되어 있어 우리의 신앙도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니이체의 지적대로 교회가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노예의지를 가진 자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버린 원인이 바울의 구원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교회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신화를 믿은 것에서부터 예수의 실천(제자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구체적 길을 제시한다.

(4) 예수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 개입을 믿고 기다렸던 묵시적 종말론자로 이해되어 왔다. 슈바이처 이후 최근의 샌더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세상의 종말을 가르치고 그 종말을 믿고 준비하도록 가르쳤으나, 그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의 종말론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슈바이처). 그러나 크로산과 펑크, 보그는 모두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의 역사참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의 믿음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의 수동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능동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5)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수퍼맨”처럼, 외계로부터 이 지구에 기적적으로 출생하여 활동하다가 죽은 후에 다시 외계로 돌아간 “외부적 구원자”일 경우, 그런 외부적 구원자를 믿는 사람들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이 되는 반면에, “내부적 구원자”일 경우에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신자들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펑크는 소위 “예수의 보혈에 의한 代贖的 구원의 교리”({잃어버린 복음서}를 쓴 버튼 맥 교수에 따르면, 대속의 교리는 히브리 전통에서는 저주였으며, 그리스 전통에서만 군인들이 도시국가를 ‘위해’, 즉 “남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를 폐기하고, 묵시종말론적 요소들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6) 예수는 당시 끼리끼리 노는 브로커 사회에서, 그 브로커 체제의 심장을 겨냥하여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실천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병자들과 천민들을 품어 안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연고주의를 타파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는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의 핵심적 동사(“들어””축사하고””떼어””나누어주었다”)는 예수가 주인과 하인의 일, 남성과 여성의 일을 모두 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오늘날 매우 배타적인 집단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들에게 더욱 겸손하게 관용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불상이나 단군신상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기독교인들이 “내부인들”이라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지 못할 “꼴찌”들이 될 운명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계도처의 분쟁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종교가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요소라기보다는 여전히 전쟁과 증오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북한의 기아현실과 남한의 고실업과 고용불안 사회 속에서, 크로산과 펑크의 책은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수영등록했다

휴가 나와서 첫날에 수영장에 등록했다.

수영장은 멀지도 않았다. 난 영스포렉스 밖에 몰랐는데, 친구가 알려줬다.
흐음.. 도당고등학교 수영장이 있다는 얘기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래서 거기에 휴가 나오자 마자 등록했다.

저녁 7,8시는 직장인들로 꽉 찼다고 한다. 원래는 매월 25일에서 30일까지 신청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번엔 어찌된 일인지 신청을 받는다. 사람이 다 차질 않아서 인것 같다.

아침에 7시까지 가야하는데, 과연 일어날 수 있을지.
초저녁에 일찍 자서 지금은 잠이 오질 않는다. 그래도 아침을 위해 자야한다.

아~ 한달간의 수영 강습!
새로운 것에의 도전!
난… 도전한다.

도전하는 이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했다.
나 = 도전하는 이 = 아름다운 나

ㅡㅡV

판단

쉽지가 않다.
사랑인가 아닌가?
그런 판단은 있어서는 어떤 인간에게라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사랑에 대해서든 다른 어떤 일을 하든간에 지나친 고민은 일을 그르치고 망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감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내가 사랑하는건가? 라는 생각을 쉬이 해 버리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낀다. 약간의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친근감 정도를 사랑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 버리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위에 시선 때문에 놓치지 않을 기회를 버리는 거 같아서 항상 도전한다. 곧 그 도전은 단순한 호감을 사랑으로 착각했다는 결론을 내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야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하는가 중단해야하는 가의 기로에 서 있을 때보다 더 큰 결단력을 요구한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가. 과연 한 사람을 책임 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지 않더라도 그 사람을 책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열정과 패기가 있는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채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무책임하다.

난.. 대체 어떤 놈인가.

힘들어서.. 죽을 지경…

은 아니다…

하지만 집중이 안된다는게 내 최근의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왜냐구? 공부하는 중이잖아. 그래서 그런거야. 굉장한 고민거리 아니겠냐?
머리속에 들어왔어야 할 단어들은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말야.

휴우… 힘들다.

대박이다.

휴우… 어떻게 10월 말하고 11월초에 나란히 서울 지방직하고 경기 지방직이 같이 공고될 수가 있는거야!

흐으… 이래서 준비된 자에게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는건가?

난 왜이리 떨리는지 모르겠다. 꾸준히 하던 운동도 그만하고 머리를 질끈 동여메구! ㅎㅎ… 좋아! 그 동안 못했던거 정신 차리고 난 해낸다!

아잣! 지금부터 딱 2달이다! 2달안에 뭐든 못하겠어? 안그래! 국어, 영어, 한국사, 행정법 총론, 행정학 개론, 교육학 개론! 과락만 안 맞으면 이번엔 된다! 아잣! 자신있게 하자!

cansmile!@ 넌 할 수 있어!

반사적이익과 공권의 차이

일단 공권(公權)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게요.
공권은 사권에반대되는 말입니다. 즉 사권이라고 하면 사인에 대하여 가지는 권리죠.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가져갔을 때 소유권반환청구권이있지요. 그리고 돈을 빌려줬다면 그 돈을 갚으라고 할 수 있는 채권이 있지요. 이렇게 사인에 대하여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권리가 사권입니다. 그럼 공권은? 네 바로 국가와 공공단체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공권입니다. 예를 들면공무원으로 일을 해서 그 보수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재판을받을 권리, 평등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부당하게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 등등 입니다. 이러한 권리는 헌법이나행정법상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반사적 이익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에 멋진 동상을 하나 세웠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동상이 너무 멋있어서 그 동상을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집 근처를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 옆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 상인은 그 집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모이게 되자 덩달아서 자신의 가게의 매상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 상인은 매우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집에 있던동상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상인의 매출이 낮아집니다. 그럼 그 상인은 그 사람에게 다시 동상을 설치하라고 요구할 수있을까요? 그 집 사람은 그 상인이 잘되라고 자기 집에 동상을 세웠을까요?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요즘 신행정수도 이전 뭐 이런소리 많이 나오는데, 행정수도를 저기 충청도 어딘가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 도시의 사람들이 많은 혜택을 누립니다. 땅값도오르고 가게도 많이 생기고, 인구도 늘어났습니다. 행정수도를 다른 곳으로 다시 옮기려고 합니다. 그 주민들은 옮기지 말라고요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 혹은 국가가 자기의 특정 목적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했는데 그 사람 또는 국가가 본래 목적으로 두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되는 경우, 그것을 반사적 이익이라고 합니다. 좀 이해가 가십니까?

공권은 권리이고 국가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리를 침해하면 손해배상이라든지 하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반사적 이익은 애초에 그 이익을 받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것입니다.

6000 힛!

ㅡㅡ… 또 이런다. 나.. ㅡㅡ..

오늘은 줄넘기 하는데 왜 이리 와리가리 하는 사람들이 많은건지 모르겠어.

웬 인라인 스케이트 타러 온 넘들도 있었구, 대대장님 순찰과 함께 중대장, 지원대장까지 다 왔다 간거야. 우우… 정말이지.. 방해꾼들이 너무 많아. 내일은 근문데 일찍 잘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오늘 어쨌든 중요한건 6천번 했따는데 5천번까지는 안 힘들게 했는데 6천번을 향해 가는데 왜 이렇게 힘에 부치는 건지 모르겠더라구.

후우~ 어쨌든! 6천번 하고 나니까 86.5Kg 이던 체중이 85.5Kg까지 떨어진거야! 아싸 한시간 15분 하고 1Kg 줄었구나 하고 좋아했는데 글쎄 물 먹구 나니까 200g이 늘어난거야. 더블 머그컵 한 잔의 물이 이렇게 많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건가 하는 의문이 생기더군.

흐흐.. 어쨌든 85Kg대에 접어드니까 기분 너무 좋은거 있지. 내일 출근해야하는데 과연 제때 일어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1Kg이나 줄어버린건 일시적인 탈수현상일텐데 내일 근무 후에 할 때는 충분히 물을 먹어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더군!

호오.. 어쨌든 85Kg대에 접어들었다 이거야! 희망이 보인다! 12Kg만 더 빼쟈!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12.7Kg말이야. .ㅡㅡ… 700g은 하루면 빠진다구!

밤에 야식만 안 먹으면 그렇겠다는 얘기지 뭐.. ㅡㅡ.. ㅎㅎ ㅡㅡV

우헤헤헤헤

힘들다.
왜이렇게 힘든거야.

뭐 별로 다른날보다 한 것도 없고 그런데 괜스레 힘이 들다.

오늘도 계속 하는데 힘이 더 드는거 같아서 말야.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지.
이렇게 몇달을 하면 살이 쏘옥 빠지다 못해 빼쌱 마를 거 같은데 말야. ㅎㅎㅎ
그러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쳐다볼까?
저 독한 넘 봤나라고 할까? 아니면 우와 대단하다 이럴까..

뭔가 목적이 있다는건 목표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거야.
2단 넘기 23개!! 안 끊기구 23개! ㅋㅋㅋ…
2단 넘기로 하면 아쥬 죽인다는데 말야. 5천개 유지하고 그거 끝내구 2단 넘기 연습 돌입이다.
2단 넘기는 중심 잡는게 관건인거 같아.

안 하다 또 하려니.

매우 힘들다.

5천개 말여. 어제 짜증나기도 하고 힘도 들고 해서 3000개로 마무리 지었더니

오늘 만땅 채우느라 힘드네..

처음에 한 100개 정도 하니까 왼쪽 다리에 쥐도 나려고 하고 말야.

ㅎㅎ… ㅡㅡ…

오늘 한창 줄넘기를 하고 있는데 말야 아파트 어느 동인지는 모르겠구 하여간 한 아주머니가 쓰레기 버리러 오셨길래 인사드렸더니 전 보다 살 많이 빠진거 같다며 몇 키로그램 빠졌냐고 물으셔서 9키로요.. 하는데 얼마나 뿌듯한지..

일단 뭐 빠진 체중을 말하긴 했는데 말하고 나서 조금 찔리더라구.. 휴가 가서 찐거 빼구 말해야하는데 말야.

게다가 줄넘기만 해서 빠졌냐는 후속 질문에도 뻥치구 말야.

사실 몇달 뛰고 걸어서 5Kg 빠진건데.. ㅋㅋㅋ

그 옆에 딸정도 되어보이는 걸이 있었는데 나를 보고 따라해야할 거 같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어야 할 거 같던데.. ㅎㅎ

이궁.. 덥다.. 얼른 샤워하장!

오늘 700g 빠졌다. ㅎㅎㅎ

아까 줄넘기 하기 전에 87.9Kg이었는데 하고 나서 재어 보니 87.2Kg이넹!!

아잣! 2만번해서 한달에 15키로 뺀다는거 거짓말 아닐거 같아.

흐으~ 조금씩 빠진다는거..

행복이야!

조금씩 빠지는거.. 오늘 체중 쟤 봤어.. 물론 홀딱 벗구 쟸지..

다이어트인의 한 사람으로서 옷 무게라도 줄여보고 싶어서 말야!

그랬더니 이게 웬일! 86Kg대에 접어 들었지 뭐냐! ㅋㅋ

좋아 좋아~!

내가 조금 더 빠지면 올 누드 찍어서 올릴게~ ㅋㅋ

오늘은!

쉬었다.

운동을 쉬었다.

줄넘기 5천번… 쉬고 싶어 쉬었다. 뭐 굳이 핑계거리를 만들자면 누군가가 찾아와서 엄청나게 어둡게 찍은 사진을 밝게보정해 달라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귀찮아 대충해버렸다. 나머지는 스코피에서 알아서 보정해 보내줄것이라는 생각이다!

흐음… 어떻게 생각해? 이런 대충주의 삶이 나에게 얼마나 악영향을 줄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그래.. 악영향을 미칠 거 같아. 후훗..

한 번 극복하면!

쉽다고 하는 말! 그 말! 이전에도 몇 번이나 내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제대로 느껴보질 못했다.

극복에 대한 기쁨 또한 그다지 느껴본 일이 없었지만!
줄넘기 사건을 통해 나는 느꼈다. 그리고 느끼고 있다.

하루 5천번! 땀을 충분히 흘릴 수 있는 양의 횟수이다.
내 몸은 흠뻑 젖어서 노폐물을 모두 배출할 수 있을 정도의 운동을 필요로 했었나보다.
운동하고 나서 몸이 굉장히 개운하기 때문이지.

ㅎㅎ… 좋아! 하루에 몇 백 그람씩 줄어간다는 기쁨! ㅋㅋ

아~! 싸! 죽을 힘을 다해!!

경축!!

5050hit 돌파!~!~!!~~!

무슨 얘기긴… 이 글이 올라온 곳의 제목을분류를 정확히 확인 하라구!
무슨 얘기 일거 같은지 다시한번 생각해 봤어?

내 얼굴! 지금 장난 아니야!!
줄넘기 목표 수량 채우니까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거든!!
게다가!
운동하는것에 이런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다는거 새삼 느꼈거든!! ㅋㅋ
좋아! 이제 5천번을 30분 내로 하자!
5050번 하는데 52분 걸렸으니까 대략 1초에 0.618번씩 한 셈이거든? ㅋㅋ

물론 실례라는건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표현을 안 할 순 없지 않은가?
난 가끔 그런다. 곁에 애인이 있어도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낀다.
난 진짜 그런적이 있었다.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무안해 할 걸 알면서도 표현한다.

그러면 물어온다. 난 대답할 수 없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가 있음에도 난 외로움을 느낀다. 기댈 곳이 없는 직장을 잃은 가장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미안해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게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사람을 붙잡고 싶어도 지금 당장은 헤어져야 그 마음의 풍랑이 잔잔해 질 듯한 무시할 수 없는 그 기분이 사랑의 종말을 가져오기도 한다.
난… 그런 놈이다.
이런 내가 싫다고? 그냥 바람둥이들의 특성이라고?
뭐라고 말하든 나에겐 상관없다. 이게 나고.. 이런 나를 사랑해 주고 내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갈수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난.. 기다려주는 그를 기다려 줄 수 있는 남자니까!

[펌] 아침까지 푹 자는 수면 생활법

수면 트러블 해소법||

몸 안의 시계에게 잠 잘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운동, 목욕, 아로마 테라피. 그리고 천연 수면제 역할을 하는 음식으로 잠을 부른다.

초저녁에 30분 가량 가벼운 운동

잠자기 5시간 전 간단한 운동이 숙면에 도움이 된다. 줄넘기, 훌라후프, 조금 빠른 걸음으로 30분쯤 걷는 운동이 적당하다. 저녁식사 후 무리한 운동은 자율 신경을 흥분시켜 오히려 잠을 쫓는 역효과가 나기 때문이다. 운동 후 근육의 릴랙스를 위한 샤워는필수.

수면, 기상 시간은 매일 일정하게

수면을 제대로 못 취했어도 아침에는 같은 시간에 일어난다. 수면, 기상 시간이 불규칙하면 생체 시계가 혼란스러워져 밤에 잠이 안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주말이나 휴일을 몽땅 잠에만 투자 하려는 생각은 절대 금물. 한두 시간만 더 자는 것으로 충분하다.

새벽에 깨지 않게 눈가리개를…

우리 뇌에는 빛에 맞춰 생리 작용을 조절하는 생체 시계가 있는데 여름에는 일찍 해가 떠 새벽 숙면을 방해한다. 침실에 들어온훼방꾼이 생체 시계의 스위치를 켜는 것이다. 커튼을 치거나 눈가리개를 해서 밤으로 인지하는 시간을 늘리면 아침까지 푹 잘 수있다.

둥글레차 한 잔이 천연 수면제

둥굴레와 야생 대추의 씨를 말린 산조인은 중추 신경계를 진정시키는 작용이 뛰어나 피로를 풀어 주고 불안감을 해소해 졸음을 유발.둥글레차는 시판 티백으로, 산조인차는 두 컵 분량의 물에 백합 20g과 볶은 산조인 40g을 넣고 2시간 달인 후 걸러서마신다.

야식은 치즈 바른 크래커와 우유

저녁 식사는 늦어도 잠들기 두 시간 전에. 흰쌀밥에 무, 양배추, 상추, 쑥갓 반찬이 좋으며 디저트로 멜라토닌이 풍부한 바나나를먹는다. 배가 고파서 잠이 안 오면 우유, 크래커, 아보카도, 땅콩 버터를 바른 식빵 등 트립토판이 들어 있는 음식으로 요기한다.


잠으로 인도해 주는 아로마 요법

아로마 정유는 긴장을 완화시키는 ‘클라리 세이지’, 흥분을 진정시키는 ‘샌들우드’, 걱정거리를 잊게 하는 ‘베르가모트’, 잠자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기지 않게 하는 ‘로만 카로마일’로 선택한다. 아로마 램프를 사용해 흡입하거나 향초를 태우면 효과가 있다.

더우면 왜 잠을 못 이룰까?

열대야에는 밤에도 기온이 25℃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렇게 외부 온도가 너무 높으면 체내의 온도 조절 중추가 발동하면서 중추 신경계가 흥분하게 되고 그 결과 각성 상태로 이어져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들지 않는 것이다.

또잠이 들더라도 자주 깨거나 깊은 잠을 자지 못해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피로감이 가시지 않은 채 하루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더운 날씨로 인한 불면증이 계속되면 집중력이 떨어지고 졸음에 시달리게 돼 일상 생활에 지장을 받게 된다.

침실 환경 만들기

여름에만 사용하는 전용 침구 들여놓고, 실내 온도와 습도 조절해 쾌적한 침실로 만드는 간단한 노하우가 꿀잠을 잘 수 있게 돕는다.

삼베나 모시 소재 침구로 바꾸기

여름철 침구로는 땀 흡수, 발산이 빠르고 청량감을 주는 마나 삼베, 모시가 제격. 그러나 피부에 닿는 감촉이 뻣뻣하고 구김이 잘가는 단점이 있다. 이게 싫다면 부드러우면서 시원한 감촉의 인조견이나 면을 오톨도톨하게 가공한 지지미 원단 침구가 권할 만하다.

실내 습도는 60% 내외로

습도가 높아 피부가 끈적거리는 여름. 하지만 날 덥다고 선풍기나 에어컨을 켜 두면 실내 습도는 순식간에 30~40% 이하로 내려가건조해진다. 잠 잘 오는 실내 습도는 55~65% 정도. 수분 방출이 많은 벤자민, 고무나무 등의 화분을 갖다 놓으면효과적이다.

여름 침실 온도는 22~25℃

더위 때문에 생긴 불면이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단연 실내 온도 낮춰 시원하게 하기. 선풍기와 에어컨을 적절히 활용한다. 그러나밤새 켜 놓을 경우 전기 소모도 문제지만 호흡기를 건조하게 해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1~2시간 이내로 타이머를 설정해 놓는다.

아예 거실로 잠자리 옮기기

좁고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침실 대신 넓고 커다란 창이 있는 거실을 아예 침실처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 요만 깔아도 괜찮지만접이식 간이 침대, 소파 베드가 유용하다. 아이들이 있는 집이라면 피서지에 온 듯한 기분이 들게 텐트를 치는 것도 좋겠다.


침대 패드로 대나무 자리를…

대나무와 참나무로 만든 자리는 나무 자체의 성질이 차가워 더위를 잊게 한다. 요즘 제품들은 두께가 얇고 크기가 작아 침대 위에깔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또한 촘촘하게 엮기 때문에 살에 잘 배기지 않으니 아이들 침대에 깔아도 아프다고 징징대는 일은 없을 듯.

덥게 느껴져도 커튼은 꼭 친다

여름에 커튼을 떼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커튼은 침실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고, 이른 아침의 햇살을 가려 주는 고마운존재. 얇은 노방 소재라도 커튼은 꼭 달아야 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불평하기 전에 커튼을 제대로 치는지를 먼저 생각하도록.

원문 : 네이버 블로그 > 가슴앓이

으하하하.. 2500회 돌파!!

우움.. 벌써 어제 저녁이 되어버렸네!!

ㅎㅎ… 2500회의 줄넘기를 성공해 냈다 이 말씀이야!!

이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웃고 넘길 사람들도 있겠지만.. 직접 해 보라구.. 2500번이 쉬운가!

적잖이 힘이 들 것이야. 그런데 얼른 자야하는데.. 음…

내일 지각하면 엉망이다. ㅡ.,ㅡ

죽어가는 뇌를 자극하라

Brain TRainning 80

어제 이 책이 누군가에 의해서 부대로 들어왔다. 일단 부대에 있길래 들고오긴 했는데,

아침에 이 책을 찾느나 책 주인이 난리를 했다는 소릴 듣고서야 내일 갖다주겠노라고 얘기했다.

ㅎㅎ… 근데 처음 읽는데 흥미가 당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들에게 넌 머리는 좋은데 공부하지 않아서 성적이 좋지 않은거다 라는 얘길 몇번 즘 들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초반부에서는 이 말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준다.

이것 말고도 여러가지 내 흥미를 끄는 여러 문단들이 있는데, 뒤에 여러가지 문단들은 책 사서 보고 내가 지금 읽은 부분 중에서 마음에 드는 부분만 몇개 올려 본다.

흔히들 “저 사람은 머리가 좋다”라든가 “저 사람은 머리가 나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아니다. 뇌를 두고 천재와 둔재를 따질 수 없다. 즉 좋은 두뇌도 없고 나쁜 두뇌도 없는 것이다. 사실 머리가 좋다는 것은 머리가 유연하고 부드러우며, 시야가 넓고 의욕이 있으며, 발상을 전환할 수 있고 호기심이 강하며, 감동을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며, 생명을 존중하고, 그리고 건강한 것을 말한다. 요컨대 심신이 모두 건전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흐흐.. 특히 주황색이고 두껍게 칠해진 부분이 마음에 든다. 쩝… 이전의 내 모습이었기때문이다. 감동을 잘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간혹 울어버리기도 하기 때문에.. ㅡㅡ.. 남자로서는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않다만.. 감동할 때는 감동 팍! 팍! 해 줘야지!! 아니 그러하오!! ㅋㅋ

자꾸 뇌를 자극해줘야 늙어가면서 죽어가는 (뇌세포들을 살리진 못하지만 계속 늘려가면 보상 받는거아니겠어? 힘들어도 자꾸 자극 해주자… 포기하는 것…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것은 뇌의 활동을 정지시키는 지름길이라는게 이책의 내용이다. 뭐 80개나 되는 힌트를 담고 있다고 하니 한번 읽어 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2천번? 그 까이거~!

우어.. 한 이틀 쉬었더니 몸무게가 도로 불은거 같은 기분이야.

후후.. 어쨌든 오늘의 이슈는!!

또 다시 줄넘기 2천번 돌파!!

축~ 축~ 축하해죠~~ ㅋㅋㅋ

ㅡㅡ… 뭐.. 그래두 체중은 변함 없다.

오늘은 88.6Kg~

점점 빠지구 있다구 생각하자! 아잣! 아잣!

난 빠져나가구 잇어! 으흐흐흐~ 죠오~~~아!

상황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이 말에 All in!! 맞아. 사람은 상황 때문에 비굴해 지기도 하고, 나약해 지기도 하고, 비열해 질 수도 있는 존재야. 어떤 상황 때문에 자기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했을 때가 전혀 없다고 한다면 당신은 거짓을 말하는 거라구!

그짓말쟁이!

솔직히 말해서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올 인이라는 거 공감이라는 말인거 알지? 그냥 공감이 아니라 절대 공감말이야.

내 상황이 어떻길래 이렇게 난 변해야만 했을까!

난 옛날의 내 모습 중 얼마만큼 변화했을까? 정말… 웃겨.. ㅋ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건 좋지만 드라마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너스 베티 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실제 자신을 그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착각할 수도 있다구! 자기 남편이 죽어가는 모습도 외면한 채 말이지.

난 어떤 상황에서도 비굴해 지거나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거라고 자신하며 살았었거든!? 그런데절대 명령과 복종을 해야 하는 이 상황에서는 비굴해질 수 밖에 없어. 할 말도 못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구. 물론 내가일하는 이 곳도 할 말은 할 수 있도록 많은 변화를 거쳐왔지만 그래두 대상관죄라는게 적잖이 사람을 비굴하도록 만드는데 충분한후속 조치가 따르거든.
내가 밖에 나가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알아? 밖에서는 자기가 할 말 할 수 있다는거지. 뭐 다를거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보기엔 다르다구! 이해해?

어쨌든 지금 난 그렇게 생각한다우. ㅋㅋ

이구.. 머리 아프다. 아직두 머리가 후끈거려.. 생각을 하면 열량이 소모 된다는거 순간적으로 깨달아 졌어. 등까지 훅훅 볶으며 땀이 삐질 삐질 하는걸~ ㅋㅋ

다들 잘 자라구~

난 뭔가를 볼 때마다…

들을 때마다1 뭔가를 얻으려고 하지.

그래 사람들은 뭔가를 얻기 위해 삶을 살아가잖아. 자신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한 걸음 두 계단 이루어 나가고 있는거야.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면 좋겠지만 생각이라는게 항상 있었던 것도 아니구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내 생각을 했었던 것도 아니니까 말야.

오늘 하지원이 앙드레김을 만나는 연예가 중계의 작은 코너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앙드레 김이 하지원에게 물었어.

이상이 되는 형이 있냐

그랬더니 하지원이 대답했는데 그 중에서 자기는 솔직한 남자가 좋다고 하더라.
나… 솔직하다.. 너무 솔직해서 때로는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기도 하고 그렇거든..
근데 지금은 솔직하지 않아. 어느정도의 가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으며, 사람들을 속이기도 하지.

그 속인다는 행위는 대부분 거짓말이라는 행위야.

훗.. 거짓말.. 사실 거짓말이라는거 어렸을 때부터 조금씩 해 왔어.
그땐 진짜 두려움에 의한 어쩔 수 없는(어쩔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거짓말이었거든..
대략 그 때의 거짓말들은 두려움에 의한 거짓말이었거든. 뭐… 어린 시절에 거짓말 한 두번 쯤은 다 해 봤잖아. 안그래? 아..ㅇ…아닌가? 아님 마는거지 왜 화를 내구 그러냐!! 버럭!!

어쩄든 쓸데 없는 지방 덩어리들이 많이 생겼는데, 내가 하려던 말은 이전 여자친구에 대한 거야.
바로 전(이라지만 벌써 2년이 다 되어 가네…)에 사귀 던 여자친구… 그녀에게는 거짓말이라는거 하고 싶지 않았어. 그 만큼 사랑했었구,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었지.

내가 사랑에 대해 뭘 몰랐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 아직도 사랑이라는거 이해하기 힘들고, 별로 믿고 싶지 않은 추상적대상이야. 사랑이 추상적인 개념이라는거 다들 알잖아. 확실하지 않은 두루뭉실한, 어떤 정의를 확실하게 내릴 수 없는 것 말야.

이구.. 자꾸 빗나가네.. 어쨌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실한 남자를 원하는 하지원… 난 그녀의 바램대로 내 바로 전 그녀에게 했었거든? 솔직했어. 모든 것을 거짓없이 말해 줬지.

나란 인간에 대해서 말야.

근데 그것에 질려 버린거 같아. 그건 내 추측일 뿐이야.. 다른 이유들도 없다곤 말 못하겠어.
휴~ 어쩌다가 이런 얘기까지 나왔는지 모르겠다.
ㅎㅎ… 나 이만 줄일게.. 추접해 지려고 하는거 같아.

  1. 사실 듣는 것엔 약해… 오래 듣지 않아도 금방 졸아버리거든… 뭐 내 생활 습관이 새벽에 잠을 많이 안 잤기 때문이거나 지나치게 집중해서 머리가 과부하 걸려 그런 것일 수도 있는거지[]

모나리자 스마일

모나리자 스마일의 그녀가 주연으로 나온다.
흐음… 그녀가 누구냐구?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끝내 거부하지 않는 역할로 나오는 그녀징.. 누구갔어? ㅡㅡ

Julia O’Hara Stiles(줄리아 스타일스) 얘기하는 거야.ㅎㅎ… 난 참 특이한 여성관을 가지구 있어.

편하고 털털하고.. 뭐 그런 여성들을 좋아해. 물론 그녀는 이쁜이지. 글쎄..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해 보진 않았지만 느낌이거든. 대외적으로만 나타내는 성격이나 외향일 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내 남자친구는 왕자님이라는 영화는 영국의 왕자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응큼한 목적을 가지구 미국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으로 사건이 시작되지. 물론 그 왕자는 사고뭉치에 왕권계승자라는 소명의식 따윈 그다지 없는 인물이지.

그런데 말이야. 그 왕자가 수 많은 스캔들을 내고 다녔던 인물이고, 미국에 간 이유가 미국 여자의 가슴을 쉬이 볼 수 있다는 환상을 쫓아서 간 것이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거든?

그건 뭐냐면! 그는 사랑에 빠졌다는거야!진짜 사랑! Real Love!!!

글쎄.. 그런게 있을진 모르지만 극중에선 그런 사랑을 하게 되지.. ㅋ

모나리자 스마일 포스터, 여인네들이 서로 바라보다
Julia
Julia O’hara Stiles

근데 이 영화 보면서 네가 되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너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라는 대사에서 내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어.

내 처지라는게 별거 있나? 문제가 되지 않을 걸 혼자 고민하고 있는 우매한 나를 탓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ㅋㅋ 어쨌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뭐.. 어쨌든 줄거리 얘기해 주는거 매우 싫어하는 나로선 더 이상의 많은 줄거리를 얘기해 줄 순 없지만 마지막에 왕자는 여왕의 자리에 앉게 될 지도 몰랐을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너를 기다릴 수 있어, 니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될 때까지 말야.
후훗..

줄넘기 다이어트

▶ 효과만점인 저비용 고효율 운동

“줄넘기는 간단하고 단순한 운동이지만 적은 비용과 좁은 공간에서도 짧은 시간에 최대의 운동효과를 누릴 수 있는 사계절 만능스포츠입니다. 줄넘기 운동은 강한면과 경쾌한 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데 강한 면은 우리에게 강인한 투지와 용기를 길러 담력과자신감을 주고, 경쾌한 면은 부드러운 사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하여 순환기관을 활발하게 해줍니다. 곧, 건전한 인격형성의길잡이 역할을 줄넘기가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라고 손형구 교수는 말한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줄넘기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등 편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뛰어난 운동효과를 제대로 아는이 또한 많지가 않아 안타깝다는그는 어느 운동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줄넘기 운동도 제대로 알고 숙지하는게 중요하다며, 숙달될수록 동작이 민첩해지고 운동효과도커지기 때문에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많은 운동량을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줄넘기야말로,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적극 권장할만하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하루에 섭취하는 에너지 중에서 일상 생활 이외에 운동으로 소비시켜 주어야 하는 열량은 하루에 약 250∼300킬로칼로리.평보걷기로 치면 90분(4킬로)정도 걸어야 하고 속보로는 60분(6킬로)정도, 조깅으로는 30분정도 소비되는 양이지만 줄넘기운동으로는 10∼20분 정도, 장년층은 5∼10분 정도 하면 300킬로칼로리 정도를 소비하게 된다.

분당맥박수도 130∼180회를 기록하는 강도높은 운동으로 각자의 운동량에 따라 틀리지만 숨이차고 조금힘이 든다면 그것이 자기에게맞는 운동의 강도라고 볼 수 있다. 5분의 줄넘기 운동은 1.5킬로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것과 같은 운동량이 되며 심패기능 향상은물론 순발력, 민첩성, 하체 근력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크다. 하지만 노약자나 관절 환자에게는 맞지 않으므로 주의하여야 한다고당부한다. 그럼 줄넘기 운동을 함으로써 얻게되는 효과에 대해 알아보자.

▶ 지방제거.위장병에 좋은 전신운동

줄넘기 운동은 가장 자연스럽고 운동량이 풍부한 전신운동으로 발목, 장단지, 무릎, 허리 등 강도높은 자극으로 각 신체의 기능을 강화시켜 남자에게는 균형적인 신체를 만들며, 여자에게는 아름다운 몸매를 가꾸어 준다.

혈액순환과 호흡기능을 왕성하게 하고 식욕부진, 위장병에 뛰어난 효과가 있으며 매일 10분내지 20분씩 계속하면 피하지방이 제거되고 건강한 육체를 만들 수 있다.

▶ 심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고 지구력을 길러준다

줄넘기 운동은 리드미컬한 작은 도약의 연속운동으로 뼈의 증골세포에 자극을 주어 청소년의 성장을 촉진하고 성인들의 골다공증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손과 발의 타이밍이 맞아야 하는 협응성 운동이므로 순발력, 유연성, 민첩성, 지구력등 고도한 신체지배력이 길러지게 된다.

산소를 많이 흡수하게 되어 그 산소가 뇌세포로 들어가 뇌의 자기 수정기능을 강화시켜 정신건강을 증진시켜준다. 이로 인해 정신질환인불안,초조,근심이나 두통,현기증 등의 증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풍부한 레크레이션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스트레스 해소에도 효과적이다.

▶ 다양한 줄로 자신에게 맞는 운동 선택이 중요

줄넘기 운동은 무엇보다도 리듬, 밸런스, 타이밍 운동이기 때문에 줄넘기의 선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보통 1회선1도약의 줄넘기를 가볍게 할 때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오래뛰기라든지 다회선뛰기와 같은 차원 높은 뛰기를 할 때는 줄의길이나 줄의 굵기 등에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특히 기록을 요하는 경우라면 줄넘기의 특성을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더욱 좋은조건의 줄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줄의 재질은 속이 비어 있지 않은 PVC제의 맑고 투명한 통줄이 좋으며 겨울에는 내한성이 있는 부드러운 줄이 좋다.

굵기로는 1회선 2도약이나 1도약과 같은 가벼운 뛰기에 있어서는 4.5mm∼5mm (초보자, 무게가 있어 잘 돌아감), 시간뛰기와다회선뛰기에 있어서는 4mm∼4.5mm (줄이 굵거나 무거우면 공기의 저항을 많이 받고 몸에 무리를 주어 오래 뛸수 없음), 긴 줄넘기에 있어서는 5.5mm~6mm (무게가 있어야 회전력을 얻어 잘 돌아감), 더블 덧취 1인 뛰기, 2인 뛰기에 있어서는 4.5mm~4.8mm (가늘면서 무거워야 함)가 적당하다.

또한, 줄넘기 손잡이의 길이는 길수록 줄의 회전력이 커서 빨리 돌아가므로 특히 초보자나 어린이들은 손잡이가 길어야 배우기 쉽다.손잡이의 끝부분을 잡았을 때 앞부분에 5cm정도의 길이가 있어야 돌리기 쉽고 짧으면 되돌려 뛰거나 엇걸어 뛰기에서는 손잡이 끝이몸에서 가까우므로 돌리기 어렵다. 손잡이 길이는 최저 15cm∼21cm정도가 이상적이다.

손잡이의 굵기는 유아 및 초등학교 저학년은 18mm∼20mm, 고학년 20mm∼22mm, 중고생 및 일반은 22mm∼25mm 정도가 좋다.

줄의 길이는 각각의 뛰기 방법이나 뛰는 사람의 숙달도, 자세, 습관 등에 따라 달라 질 수 있겠으나 모든 뛰기 동작에 있어 가장알맞은 줄의 길이를 안다는 것은 기능 습득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 줄이 너무 길면 팔 전체를 이용하여 돌리게 되므로 자세가불안정해지고 쉽고 너무 짧으면 발이나 머리에 걸려 잘 돌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초보자는 줄의 중앙을 한 발로 밟았을 때 양쪽줄끝의 길이가 명치 정도면 알맞고 점차 숙달될 수록 조금씩 줄여 나가는 것이 좋다.

▶ 기본자세

양발모아 뛰기(1회선 1도약) 
양발모아 뛰기(1회선 2도약)체력향상용으로 적당하다.

앞으로 흔들어 90도 뻗쳐뛰기 
복근이 강화되고 몸의 유연성이 길러진다.

번갈아 2박자뛰기 
장시간 뛰는데 가장 적합하다.

▶ 줄넘기운동의 기본자세 및 유의점

  • 얼굴은 턱을 가볍게 앞으로 당기듯 정면을 향한다
  • 몸을 너무 많이 앞으로 굽히거나 뒤로 젖히지 않는다
  • 팔꿈치는 동체에 붙인다
  • 손잡이의 위치는 허리의 위치에 둔다
  • 무릎의 탄력을 이용하여 손목으로 가볍게 돌린다.
  • 무릎은 펴고 발끝은 지면을 향하게 한다
  • 너무 높이 뛰지 말고 반드시 발의 앞부분으로 착지한다.
  • 전체적으로 율동미가 있어야 한다
  • 한번 뛰어 두 번 넘을때는 무릎을 펴고 히프를 내밀지 않는다
  • 신발은 딱딱하지 않은 쿠션이 있는 것이 좋다
  • 점프를 할 때 두발을 앞으로 뻗으면서 뛰거나 뒤로 너무 많이 굽혀 뛰면 발바닥 전체가 땅에 닿아 관절에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몸에 힘을 빼고 양발을 모아 수직으로 가 볍게 점프한다
  • 준비운동과 정리운동은 반드시 한다.

내용출처 : http://cafe.empas.com/herbdietgo/pds/b5/read.html?asn=52¬ice=0&pno=1&oby=2&odir=0&fd=0&bt=21&ac=56&rurl=list.html

하지 말아… !

흠.. 어른들은 어려서부터 하지 말라는 말씀들을 많이 하신다.

머리 염색을 예로 들자면 말이지.
어려서는.. 그러니까 학생때에는 나중에 대학교에 가서 해도 늦지 않아라던가
성인이 되면 니 마음대로 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니?라는 말로 일단 미루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거나 성인이 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물론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크게 뭐라고 하진 않는다.
졸업을 하거나 나이가 한 살 두 살 쯤 더 먹는다면 확실히 달라진다.

니가 애니?
정말 황당하다. 이런 반복속에 틀은 만들어져 가는 것이고, 우리들은 그 틀에 맞추어져 간다.
철 들었다
라는 말은 틀 안에 있는 것에 익숙해 졌다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다.

맞지 않아?

철이 든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어른들이 그들의 어른들때부터 만들어져 왔던 그 형식에 익숙해 진 상태를 철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난 그런게 싫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어떤 틀을 가지게 된다. 세상이라는 틀을 가져야 하고 자신의 시각이라는 틀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쉬이 그렇게 형식에 치우치거나 메이고 싶지 않다는게 내 생각이다.

사람들은 날 보고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이런 생각이 행동이나 말에 녹아 나는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난 이런 내가 너무 너무 좋다. 틀에 얽메이지 않으려는 모습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두 한 두살 먹어가다 보니형식이라는 것에 메이기 시작한다. 용기라는 것이 점점 업어지고, 자신감이라는게 점점 없어져 간다. 그러면서 동시에 틀 안에..형식에 따라 편히 살고 싶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게될것이다.

우우.. 졸립다.이제 정말 자야겠다.

여러분들도 좋은 밤 되시길~

줄넘기 2000번 넘게 하다..

오오~ 대단한 일 아닌가!!

….아닌가…?

아니면 마는 거구.. 어쨌든 오늘 아침엔 근무 후에 잠자러 왔다가 씻기 전에 천번 조금 넘게 했고, 저녁에 중대장님이 밥 사줘서 그거 먹구나서 집에 왔는데 땀이 삐질 삐질..

그래서 컴 앞에 앉아서 이래 저래 하다 보니 9시를 넘어서서 10시가 다 됐더라구..

그래서 뭐 어쨌겠어! 일단은 나갔지!

어두워진 아파트 앞 주차장은 그야말로 내 세상..
사실 티셔츠 빨기 귀찮아서 말야 러닝셔츠만 입구 바지 입구 줄넘기 하거든!!그래서 어두워야 나에겐 좋은거지!!

하하… 어쨌든 천번을 목표로 했지..
당근 천번을 넘어섰고, 게다가 중간에 숫자를 5백번했는지 6백번 했는지 헛갈려서 한 일이백번은 더 한거 같아. 후후… 우우… 오늘 너무 무리한건지도 모르겠다. 졸리웁다.

ㅎㅎ… 그래서 오늘 체중은!!

89.0 Kg!! ㅎㅎㅎ

감격이야! 저녁 면류로 먹고도 90Kg 미만이라는게 너무 행복해!!
아잣! 조금씩 난 변해가는거야!

어느 교행인의 말쌈~

난 지금 밖에 나가서 밥 먹고 살아보려구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오늘 그 카페에 일탈과 해방을 위한 공간이라는 메뉴가 있어 둘러 보다가 한 분이 자신의 현 모습이 너무 모자라고 부족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후배와 비교된다면서 하소연 하는 글에 답글을 달아 놓으셨다.

읽다가 괜찮아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번 올려 봤다.

우땨~?!

좋아?

속상해요~

저는 학원에서 강사 생활을 하면서 교육행정직을 준비하려구 하는 사람이예요.
생각만큼 일하면서 공부하는게 쉽지가 않아서. 1과목두 제대루 본적이 없죠.

그런데, 넘 넘 속이 상해서요.
얼마전에 교회에서 사람들이랑 밥을 먹은적이 있는데, 저보다 1살 어린 여자후배한명이랑 동갑인 친구 한명이랑, 1살많은 오빠랑 밥을 같이 먹는데,….

여자후배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예요.
별루 말을 해본적이 없어서 밥 같이 먹는건 처음이었는데,

전 비싼 양식집보다는 친구들이랑 분식점을 가는 스타일인데, 그 후배가 TGIF에 가자구 해서, 속이 (위장병이 있어서) 무척 좋지않았지만 가게 되었죠.

평소에 그런기분 느껴본적 없는데, 그 후배의 평소의 화려한 옷차림하며, 시계가 얼마다..그리구 자기는 차를 보구 남자를 고른다.
모든 말들이 저에겐 너무나 주눅이 들면서 너무너무 초라하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제 동기는 현대차연구원인데, 나보구 몇시에 출근하느냐구 물어서 오후3시에 한다구 하니까 무척 부럽다구 하더군요.
그러자 그 후배가 대뜸 “오빠!연봉이 차이가 나잖아요.?’하는거예요.
그말이 지끔까지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난..난..나름대루 열심히 살았는데, 교대두 충분히 갈수 있는 실력이었는데, 우리때는 교대를 선호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너무 무능하고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어요.

상처줄려구 한말이 아닐텐데, 저에겐 왜 이리 큰 상처가 될까요?
그 후배를 너무 싫어하는 제 마음이 더 괴롭습니다.
나 가진것 없어두 나름대루 괜찮다구 생각하면서 살았는데, 공부도 전혀 되지 않고, 속만 상해요.~
몸두 않좋구ㅠㅠ.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내 주머니에 몇 푼 적게 들어있다고 그 만큼 불행한 것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자신이 정한 그 정신적이 크기만큼 불행함을 느끼게 되겠죠

인생 성공의 척도는 스스로 정하는 걸 껍니다.
무언가 해냈다는 긍지 혹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중요한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누군가와 비교하고 어떻게든 그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기필코 증명해내야 사는게 행복한 사람도 있죠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삽니다.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만 가진다면 그건 정말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일이 될지 모르죠

문제는 물질이냐 정신이냐의 선택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물질은 어느정도 자신의 불편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열등과 좌절의 늪에서 허덕일 필요는 없겠죠

그 여자분이 선생님이라고 하셨죠?
저는 일선교행입니다.

저는 비록 선생님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근무함에 있어 매일매일 조심하며 삽니다.
혹 나의 잘못된 버릇이 아이들의 미래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나는 충분히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있는가 아이들이 지켜야하는 급식잔반처리나 좌측통행 복도에서 뛰지 않기를 나는 잘 지키고 있는가 너는 해야하고 나는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은 늘 착해야 하고 어른은 때때로 착하면 된다.
좀 억지 같습니다

예전 천상병이라는 시인이 자주 출판을 맡기던 ‘답게’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답게…
우리는 어마어마한 역할과 지위에 홍수속에서 순간순간 자신이 해야할 행동과 말투에
신경을 씁니다.

어쩌면 그 초등학교 여선생님은 참으로 그 사람답게 행동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으로서가 아니라 아직 나이가 어린 그저 아이들에게 지혜보다는 지식을 밀어넣는데 급급한학교에서 근무를 하다보면 너무나도 존경받아 마땅한 선생님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지금 당신은 어느 지위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습니까?

학원선생님으로서
공무원수험생으로서
누군가의 딸로서
누군가의 언니와 누나와 동생으로서
선배로서 후배로서
장차 이 나라의 교육행정에 한 몸을 바칠 헌신적인 공직자로서
답게 행동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슬픔과 좌절에 빠져
누군가의 비수돋친 한 마디에
신음하며 괴로워 하고 계십니까?

선택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건승하세요

한 낮의 더위는 초 저녁의 선선한 바람으로

여긴 말야 강원도 산골이라 그런지 열대야라는 말이 있냐고 되물을 정도로 시원한 곳이지~

내가 여기에서 지낸지 3년이 넘어서 4년째에 접어드는데 그 동안 엄청 더웠고 요즘도 적잖이 더워서 내 숨통을 금방이라도 끊을 듯하다구. 그래서 낮엔 웬만하면 여기 저거 돌아다니고 싶지 않다는게 내 맘 속에 늘상 자리 잡고 있지.

하지만 세상 살이란… 다시 말해서 돈 벌이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 돈을 주는 주체에게 그 만큼의 일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아무리 일 안해도 나오는 돈이라지만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괜스레 있는게 아니라구!

그래두 군용차 타구 여기 저기 다니는거 정말 괴롭쥐~ 흐흐… ㅡㅡ… 에어컨도 없는데다가 더위를 식힐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곤 창문을 열어두는 것인데 비가 오면 그것도 적잖이 괴롭다구. 비가 온다고 더위를 식히지 않을 순 없으니 비로 인해 내 옷이 젖더라도 창문을 활짝 열어둬야 한다오. ㅋㅋ

우우.. 말이 어떻게 저렇게 돼 버렸는진 모르겠지만 말야.
여긴 낮엔 숨통이 금방이라도 콱 막혀버릴 듯이 덥지만 밤이 되면 발원지를 알 수 없는 시원한 바람들이 내 몸의 열기를 싹~ 날려준다우~ ㅎㅎ

에이미 로섬이라는 군..

투모로우 보면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저 여인은 누구인가 굉장히 궁금해 했었다. 에이미 로섬이라는 86년생 여배우라는군.

흐음.. 뭐 오늘 병사들 데리구 와서 집에서 영화 상영을 했었는데 뭐 나름대로 지루한 영화란다.

난 사실 이런 영화 좋아하는 편이다. 저예산 영화이든 블록버스터 간에 뭐 어쨌든 영화는 거의 다 좋아하는 편이다. 사람들은 어떤 영화는 망했으니까 보지 말자 라는 말을 종종하곤 한다. 하지만 망한 영화라고 배울 점이 아주 없진 않다. 뭔가를 얻으려는 노력이 그 망한 영화에서 얻을 수 있게 한다.

물론 가끔 정말 진짜 보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영화도 간혹 있긴 하다. 얻을 거 전혀 없는 것들 말이다. (웬지 촬영 스텝들만 잔뜩 고생한 듯한 영화를 말하는 것)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의 시각의 차이를 매우 많이 경험한다. 나랑 친한 친구들 2명을 포함한 3명은 각 각 한 영화에 대해 냉담하거나 엄청나다는 반응을 보였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런것이다. 영화 뿐만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난 영화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