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낙심

인간으로 태어나 삶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낙심될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 3 :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 : 6

수행평가의 이해와 오해

수행평가 정책이 학교현장에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선 수행평가에 대한 교사들의 오해를 줄여야 한다.많은 교사들이 수행평가는 복잡하고 힘들며,수행평가의 결과가 반드시 성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번 특집에서는 교사들의 수행평가에 대한 개념상의 혼란을 줄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 수행평가의 의미를 정리한 글을 게재하였다. 또한 현재 수행평가와 관련하여 일선교사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10가지를 보여주고, 그 오해를 풀기위한 여러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이 글은 지난 8월6일 한국과학교육학회 하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되었던 글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주 —

일반적으로 국가수준의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여러 종류의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 여러 조건 중에서 가장 본질적이면서 기초적인 조건이 바로 그 정책이 의미하는 바의 명료성이다. 만약 정책 그 자체의 의미가 명료하지 않다면 다른 여타의 조건이 다 갖추어진다고 하더라도 그 정책은 자체의 모순이나 혼란에 빠져 성공적으로 시행될 수 없게 된다. 이는 인간의 모든 의도적 행동은 기본적으로 생각(이론)으로부터 발원하며, 생각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정합된 체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행평가 정책이 현장에 성공적으로 정착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따라서 수행평가라는 용어에 대한 개념의 명료화이다.
수행평가라는 개념의 의미가 불분명한 경우, 그러한 개념에 의거한 정책은 복잡한 현실에서 혼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 학교현장에서 수행평가의 시행과 관련되어 제기되는 문제 중의 상당부분은 수행평가의 개념에 대한 혼란에 연유한다.
그러므로 수행평가 정책이 제대로 시행되기 위해서는 수행평가의 시행과 관련되는 사람들(정책입안자, 교육행정가, 교사, 학부모, 학생)간의 수행평가의 개념(의미)에 대한 상당한 정도의 일치된 견해를 공유하는 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수행평가의 의미에 대하여 가능한 한 자세히 밝혀 보고자 한다. 우선은 수행평가의 개념(의미)을 정리,
제시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수행평가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각종 유형의 평가 체제나 방법들이 수행평가의 개념과 어떻게
변별되는지를 기술한다. 다음에는 수행평가와 관련하여 잘못 이해되고 있는 여러 가지 사안들을 기술하고, 각각에 대하여 필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장학교에서 수행평가를 시행하는데에 발행할 수 있는 개념상의 혼란을 다소라도 제거하고자 한다.

수행평가의 이해

수행평가의 사전적 정의

모든 추상 개념들이 그렇듯이 수행평가라는 용어의 경우도 그 의미를 고정된 하나, 또는 몇개의 단어로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언어로서 상정하는 의미는 불완전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복잡하고 추상적인 개념은 어차피 복잡하게 진술될 수밖에 없고, 그리하여 그 개념의 의미에 관한 사람들간의 완전한 일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더구나 그 의미를 토대로 하여 집단적인 행위를 체계적으로 이루어내야 할 상황에서는 동일한 의미의 공유를 위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그 하나의 방법이 우리가 사용하고자 하는 용어에 대한 일종의 사전적 정의들을 설정하고, 그 정의를 수용하는 일이다.

수행평가라는 용어는 일상적 용어가 아니므로 사전에 그 의미가 정의되어 있지 않다. 수행평가라는 용어는 현재 그 의미를 규정해 나가려는 학자들에 의하여 그 의미가 형성되어 가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수행평가에 대해서는 하나의 정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자들의 관점이나 강조점에 따라 그 정의는 달라진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의미의 변용은 어느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정의는 더 이상 의사소통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필자가 수집한 수행평가에
대한 정의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티진스와 브리지포드(1982)는 수행평가를 “새로운 문제나 특정의 과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측정하기 위한 체계적 시도로서 실제 또는 모의상황에서 피평가자들이 나타내 보이는 반응들을 전문가인 평가자가 직접 관찰하고 판단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평가방식”이라고 정의한다. 하텔(1992)은 “피평가자들로 하여금 특정의 산출물을 만들어내거나 구체적인 활동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능력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일 것을 강조하는 평가방식”이 수행평가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편, 메렌스(1992)는 수행평가란 “피평가자의 반응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평가자의 관찰과 전문적인 판단을 특히 중시하는 평가방식”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내 학자의 경우, 박도순(1995)은 수행평가를 “학생 개개인이 처한 ‘상황’이라는 요인을 고려하여 과제 수행과정과 결과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수집 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며 백순근(1997)은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지식이나 기능을 나타낼 수 있도록 산출물을 만들어 내거나, 답을 작성(구성)하도록 요구하는 평가방식”으로 정의하고 있다. 또한 양길석(1999)은 “수행에 근거하여 관찰과 판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가”로 수행평가를 정의하고 이때 수행이란 의미를 “학습과제 및 문제 해결상황에서 학습자가 보여주는 구성적 반응으로서 관찰 가능한 학습자의 행동이나 학습의 산출물 및 그 기록물”이라고 부언 설명하고 있다.

위의 국외 학자들이나 국내 학자들의 정의에서 공통적으로 중시되는 개념들은 ‘과제의 수행’, ‘결과와 과정’, ‘직접적 관찰’, ‘전문적 판단’등이다. 따라서 필자는 수행평가의 핵심적 구성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 이러한 개념들을 종합하여 수행평가란 “평가자(교사)가 피평가자들(학습자)의 학습과제 수행과정이나 결과를 직접 관찰하고, 관찰 결과를 전문적으로 판단하는 평가방식”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수행평가에 관한 정의는 위와 같이 평가의 대상(수행과정 및 결과가 평가의 대상이 됨), 평가하고자 하는 요소에 대한 측정의 방법(직접적 관찰), 측정결과에 대한 평가방식(전문적 판단) 등 수행평가 방식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들이 다른 종류의 평가방식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명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정의된다. 그러나 수행평가는 평가에 동원되는 구체적인 방법들의 범주를 구분함으로써 정의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방식은 물론 수행평가의 다른 중요한 의미들을 종합적으로 포괄하지는 못하지만 복잡한 수행평가의 의미를 간단하고 손쉽게 파악하게 하는 장점은 가지고 있다. 예컨대, 맥타이와 훼라라(1994)의 수행평가 개념도에 의하면 수행평가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택형지필평가(진위형이나 배합형 포함)
이외의 다른 모든 방법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정의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개념도에 의하면 수행평가는 학생들의 선택적 반응 이외의 다른 종류의 반응들, 예컨대 학생들의 구성적 반응이나 특정 산출물, 학생의 특정활동이나 활동의 과정 등을 평가의 대상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평가를 수행평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러한 정의는 수행평가의 본질적 요소들을 포괄적으로 진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만으로 수행평가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복잡하고 추상적인 수행평가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하는 안내적 기능은 잘 감당하는 정의이다. “선택형 평가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 하는 평가”가 수행평가라고 한다면 수행평가는 얼마나 간단하고 쉬운 것인가! 물론 이러한 정의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수행평가의 중요한 부분을 상당 정도는 포함하고 있는 정의이므로, 일반인들에게 우선 간단하게 수행평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사용하는 정의로서는 큰 문제가 없는 정의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평가의 방식(보다 엄격하는 측정의 방식)의 범주로 수행평가를 정의하는 것은 본질적인 정의방식은 아니다. 수행평가의 보다 본질적인 속성은 그것이 학생의 “구성적 반응”의 종류와 수준을 평가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는 점이다. [표 1]의 “구성적 반응”이란 항목 속에 제시된 각종 행위들이 구성적 반응들이다. 그리고 “특정 산출물”이나, “특정 활동”이라는 항목 속에 제시된 행위들도 실은 모두 구성적 반응들이다. 학생들이 연구보고서를 쓰는 것이나 무용을 하는 것, 그리고 토론을 하는 것 등은 모두 구성적 반응의 예들이다. 단지 구성적 반응의 예로서 그 종류나 수준이 다소 다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구성적 반응이란 학생들이 학생 외부에 존재하는 인식의 대상(즉, 공부해야 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머리 속에 받아들여 기억해 놓았다가 다시 기억해 놓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식의 대상에 대한 다양한 지각적 내용들(혹은 정보)을 인식 주체자(학생)가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그들을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구성하여 외부로 방출해 보이는 반응을 의미한다. 최근의 보다 발전된 구성주의 인식론(constructivism)에 의하면 지식의 본질이나 생성과정에 대한 이해는 인식작용의 특징을 구성주의의 관점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할 때에야 비로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수행평가가 재려고 하는 평가의 대상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학생들의 구성적 반응이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학생들이 지적으로 자유롭게 탐색, 추구하여 구성한 결과물, 즉 학생들의 구성적 반응을 토대로 하여 학생들의 성취의 종류나 수준, 또는 발달의 영역이나 수준을 평가하자는 것이다. 선택적 반응은 학생들로 하여금 특정 답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강제로 선택하게 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반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구성할 수 없다. 설사 머리 속으로는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구성된 결과에 대한 자유로운 표출은 억제되어 있다. 모든 구성의 결과는 외부의 타자가 이미 설정해 놓은 소위 ‘정답’이라는 선택지로 수렴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적극적 인식은 억제되고 수동적 인식만 장려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평가에서는 평가의 대상이 기본적으로 학생의 구성적 반응이어야 함을 전제로 한다. 만약 [표 1]에서 구성적 반응을 야기하는 것으로 설정된 평가(측정) 방법이 학생들의 구성적 반응을 유도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평가방법에 의한 평가를 수행평가라고 규정한 정의는 그 정도만큼 오류를 포함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표 1]에 의하면 단답형이나 완성형 평가방식에 의한 평가는 수행평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단답형 문항이나 완성형 문항에 대하여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어
학생들이 이를 외워서 답한다면 그러한 평가는 수행평가의 범주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서술형이나 논술형 문항에 대하여 학생들이 미리 모범 답안을 외워 기계적으로 기술했다면 그러한 반응도 구성적 반응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결과에 대한 평가는 역시 수행평가의 본질에서는 그만큼 이탈되어 있는 것이다.

수행평가와 유사한 용어와의 관계

수행평가라는 용어의 의미를 명료하게 하는 방법은 위에서와 같이 수행평가에 대한 정의들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방법은 수행평가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다른 종류의 용어들과의 관계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본 글에서는 대안적 평가(alternative assessment), 진정한(참) 평가(authentic assessment), 역동적 평가(dynamic assessment), 직접적 평가(direct assessment)라는 용어들과의 차이를 기술함으로써 수행평가의 의미를 명료히 하고자 한다. 대안적 평가란 어느 특정한 평가 체제나 방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주류를 이루는 평가체제와 그 성질을 달리하는 평가체제를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 학교 사회에서 주로 사용하는 평가방법은 선택형 지필평가 방법이다. 따라서 객관식 선택형 평가방식이 아닌 평가방식은 대안적 평가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평가는 현재 현장에서 사용되는 주요 평가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수행평가는 현재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선택형 평가방식에 대한 하나의 대안적 평가방법, 또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선택형 지필평가 방식도 미국의 경우 1940년도 도입의 초기 단계에서는 하나의 대안적 평가방법이었다고 한다.

진정한(참) 평가는 실제 상황에서 수행되는 행위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평가를 의미한다. 학생들의 수영능력을 평가하고자 할 때, 실제 수영장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수영을 하게 하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경우, 그것은 참평가에 해당된다.
학생의 교통질서 의식이나 태도를 평가하고자 할 때 실제 거리에서 학생들이 하는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평가했다고 하면 이는 참평가라고 할 수 있다. 군인의 용기를 전쟁터에서 그가 수행하는 행위를 관찰함으로써 평가를 하는 경우, 이러한 평가 역시 참평가라고 할 수 있다. 수행평가는 참평가를 지향하는 평가이다. 그것은 참평가일 수도 있고, 참평가가 못되는 경우 참평가에 유사하려고 노력하는 평가이다. 영어의 말하기 평가에서 실제로 외국인과 말해야 하는 상황을 설정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말하는 능력을 평가하려는 수행평가는 거의 참평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끼리 말하는 상황을 설정하고, 그 과정을 평가한다면 이는 참평가를 지향하는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역동적 평가는 학생이 이미 학습한 학습의 결과나 이미 완료된 발달의 수준(또는 상황)보다는 학습의 과정 및 현재 진행 중인 발달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학생이 미래에 나타내 보일 학습이나 발달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을 중시하는 평가이다(한순미, 1999).
학생에게서 현재 발달하고 있는 능력이나 곧 발달할 가능성이 있는 능력들은 다른 학생들과의 ‘공동활동’ 상황에서 가장 잘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역동적 평가에서는 협동학습 상황을 특히 중시하고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전개되는 교사와 학생간, 그리고 학생
상호간의 역동적인 관계를 평가의 대상으로 중시한다. 역동적 평가는 또한 학생들의 현재의 능력 뿐만 아니라 교사나 친구들과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의하여 곧 발달하게 될 능력의 종류와 그 수준을 파악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발달의 과정, 즉 문제해결 전략의 사용과정이나 해결 전략의 발달 과정을 특히 중시하는 평가방식이다. 수행평가는 ‘과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역동적 평가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역동적 평가가 학생의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 점에 비해 수행평가는 현재의 상태와 그것의 변화, 발달 과정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전자와는 구분된다.

직접적 평가는 평가하고자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어나 국어에서 말하기 능력이나 체육에서 수영하는 능력을 지필검사를 통해서 한다면 이는 간접 평가이다. 도덕이나 윤리에서 학생들의 교통질서 의식을 평가하고자 할 때 지필검사로 평가한다면 이는 간접평가이다. 이러한 평가방법으로는 사실 우리가 재고자 하는 능력이나 태도를 제대로 잴 수가 없는 것이다. 수영실력은 수영장에서, 영어의 말하기 실력은 실제로 말을 하게 하는 상황에서, 교통질서 의식은 거리의 상황에서 재는 것이 직접 평가인 것이다. 수행평가는 가능한 한 직접적 평가를 지향한다. 직접적 평가가 가능하면 직접적 평가를 하되, 불가능한 경우는 가능한 한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을 가장 타당하게 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직접적 접근을 시도하는 평가방식인 것이다.

수행평가와 유관한 평가관련 용어들과의 관계

수행평가의 의미를 가능한 한 명료하게 하기 위하여 위에서는 수행평가와 동의어로 이해하고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과 수행평가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기술하였다. 이 부분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수행평가와 관계가 되는 여러 평가 관련 용어들이 수행평가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밝힘으로써 수행평가의 의미를 명료히 하고자 한다. 객관식 평가와 주관식 평가, 상대기준 평가와 절대기준 평가(목표지향 평가, 또는 준거지향 평가), 진단평가와 형성평가 그리고 총괄평가, 결과평가와 과정평가, 그리고 실기평가와 포트폴리오 평가 등이 수행평가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기술한다.

가. 객관식 평가, 주관식 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

어떤 사람들은 평가의 종류를 객관식 평가, 주관식 평가, 그리고 수행평가로 구분하기도 한다. 이는 잘못된 구분이다. 객관식 평가란 동일 평가 대상에 대한 복수 평가자들의 평가(채점) 결과가 동일한 평가방식이다. 즉, 평가의 과정에서 평가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평가방식이다. 객관식 평가에서는 또한 응답자의 주관적 반응이 대체로 억제된다. 객관식 평가에서 응답자는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가 없고 오직 출제자의 의도에 맞게, 그리고 출제자가 설정해 놓은 방식의 범위 내에서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가 있다. 객관식 평가의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사지선택형 평가방식(엄밀히는 측정방식)이다. 정답이 4가지 답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항에 대한 학생의 반응은 누가 채점하더라도 동일하게 나온다. 그리고 학생들은 4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외의 어떠한 다른 방식으로도 반응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의 자유로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이러한 특징은 진위형(OX형)이나 연결형같은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주관식 평가란 그 반대로 평가(채점)의 과정에서 평가자들의 개인적 생각이나 판단, 즉 주관이 포함되는 평가방식으로서, 학생의 동일반응에 대한 평가(채점)의 결과가 평가자마다 다르게 나오게 된다. 주관식 평가의 경우, 평가의 과정에 평가자의 주관이 포함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평가 문항에 대한 기계적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즉, 주관식 문항에서 요구되는 올바른 반응이란 획일적인 방식으로 정형화 되어질 수 없는 것들로서 개개의 반응에 대하여 평가자가 질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주관식 평가란 학생들이 자신의 주관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도 있는 평가방식이다. 서술식이나 논술식 문항에 의한 평가방법이 대표적인 예이다. 수행평가는 주관식 평가방식을 택한다. 전술한 대로 수행평가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구성적 반응물(즉, 구성의 결과물)을 평가의 대상으로 한다. 자유롭게 구성되어 자유롭게 표현된, 그리하여 학생들의 주관이 듬뿍 배인 반응들은 주관적 평가로서만 타당하게 평가할 수 있다. 객관식 평가로는 학생들의 구성적 반응을 타당하게 측정, 평가할 수가 없다.

나. 상대기준 평가, 절대기준 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

상대기준 평가(Norm-referenced evaluation)는 교육성취도를 평가할 때에 “집단 내의 상대적인 서열(석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평가방식”으로서 선발, 분류, 배치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방식이다. 절대기준 평가(Criterion-referenced evaluation)는 학생들의 교과별 학업성취도를 평가할 때에 집단 내의 다른 학생들의 성취도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잘 설정된 교수·학습 목표를 준거(기준)로 하여 그 목표의 달성도를 평가하는 방식”을 의미한다(Nitko, 1984).

상대기준 평가에서는 한 학생의 성취 정도를 평가할 때, 집단 안의 다른 학생들과의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서 이루어짐으로 그의 성취가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다른 학생들이 더 잘했다면 그의 성취는 낮은 것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대기준 평가에서는 한 학생의 성취 정도를 다른 학생의 성취 정도와 비교함이 없이, 오직 사전에 설정된 기준(준거, 또는 목표)에만 비추어 평가하기 때문에 집단 내에서의 그의 상대적 성취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개인들은 오직 주어진 교수-학습 목표에 어느 정도나 도달했느냐를 중심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이러한 교수 – 학습 목표나 그 도달 정도에 대한 사전의 평가기준 체계는 일종의 절대성을 지닌다. 즉, 이미 설정된 준거나 기준은 그 기준이 적용된 집단의 성취 수준이나 유형에 상관없이 오로지 기준 자체의 의미에 의해서 집단 구성원을 평가하게 되는 일종의 절대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집단원 전체가 기준 미달이면 그 수에 관계없이 전원 모두 탈락, 또는 실격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절대기준 평가에서는 사전에 잘 정의된 교수-학습 목표를 기준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절대기준 평가를 목표지향 평가(Objective referenced evaluation)라고도 부르기도 한다(Gronlund & Linn, 1990).

상대기준 평가나 절대기준 평가는 교수-학습의 중간과정 단계에서 적용될 수도 있고, 최종 단계에서 적용될 수도 있다.
예컨대, 교수-학습의 중간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다음과 같은 평가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즉, 학생들의 독후감 과제물을 사전에 명료하게 설정한 평가(채점)기준에 의하여 상, 중, 하로 평가하거나 10점을 만점으로 하여 점수를 매겼다면 이는 절대기준 평가의 적용이다. 그러나 30명이 한 집단일 때 독후감 과제물을 30등으로 구분했다면 이는 상대기준 평가를 적용한 셈이다. 이와 같은 경우, 과제물은 30등급으로 서열화해야 하는 상대기준 평가가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절대기준 평가의 경우는 기준(준거)을 명시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른다.

한 학기나 한 학년의 마지막 최종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평가의 상황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만약 중간과정에서 이루어진 평가의 결과들(상대평가이건 절대평가이건 관계없이)을 점수화하여 합산하고, 합산 결과를 토대로 하여 서열(석차)를 매긴다면 이는 상대기준 평가이다. 그러나 최종 평가단계에서 이루어질 등급화(상, 중, 하 또는 수, 우, 미, 양, 가 등의 다른 종류의 등급화)의 기준뿐 아니라 중간단계의 평가 결과들이 어떻게 종합되어 최종단계의 평가에 투입되는가에 대한 기준도 사전에 명료하게 설정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평가는 절대기준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수행평가는 상대기준 평가나 절대기준 평가와는 그 관심하는 측면이 다른 평가방식이다. 수행평가의 주요관심은 평가하고자 하는 대상의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그러한 평가의 대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평가(측정)하느냐와 같은 종류의 문제에 관심을 두는 평가방식이다. 상대 또는 절대기준 평가는 평가(측정)의 결과를 어떠한 방식으로 등급화 또는 점수화하느냐(채점하느냐)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는 평가방식이다. 상대평가는 서열(석차)이 점수가 되는 방식이고, 절대평가는 목표에의 도달 정도가 점수가 되는 평가방식이다. 수행평가의 결과는 상대기준 평가식으로 채점될 수도 있고, 절대기준 평가식으로 채점될 수도 있다. 위의 예처럼 학생들의 실험보고서는 사전에 잘 규정된 기준에 의한 등급이나 평어 등으로 점수화될 수도 있고(절대평가식), 사전에 명시된 기준없이 보고서들 상호간의 비교를 통한 서열로서 점수화될 수도 있다(상대평가식).

한편, 절대평가와 수행평가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는 다음과 같다. 절대기준 평가에서는 교수·학습 목표들이 평가의 기준이 된다.
설정된 목표가 어느 정도나 달성되었는가를 밝히는 일을 평가의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절대평가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수·학습 목표 체계(우리는 그것을 성취기준이라고도 부른다)를 명료하게 설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설정된 목표들이 어느 정도나 어떻게 달성되었을 경우를 합격, 불합격, 또는 상, 중, 하라고 판정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사전에 잘 설정해 놓아야 한다.
이러한 의미의 판정을 위한 등급화 기준을 작성하는 일도 절대기준 평가에서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여기에서 어느 목표(또는 목표 영역)에서 그 목표가 의미하는 바를 학생들이 어느 정도 성취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목표가 의미하는 바, 지식이나 능력 또는 태도 등이 측정(평가)되어야 한다. 이 때 어떤 방식으로 측정·평가하느냐의 문제에서 수행평가가 개입된다. 이때 목표가 의미하는 바를 사지선택형 지필 평가방식으로 측정할 것인가 아니면 논술형 평가방식으로 할 것인가 혹은 토론을 시키고 관찰을 통해서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후자의 방법들이 바로 수행평가식 방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평가를 절대평가와의 관점에서 본다면 수행평가는 “절대평가 체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하위 영역인 ‘측정(평가)방법’이란 영역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인 것이다.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수행평가를 목표와 관련하여 정의한다면 “목표가 의미하는 바를 가장 타당하게 측정·평가하기 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 진단, 형성, 총괄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

진단평가는 수업 시작 전 학생들의 출발점 행동을 파악하기 위한 평가활동이다. 진단평가의 결과는 그리하여 교사의 교수 계획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교사는 처음부터 진단평가의 결과를 고려하여 자신의 수업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이미 세운 계획을
수정하기도 한다. 수업 효과를 높이는데 진단평가는 기여하는 바가 크다. 형성평가는 수업의 과정에서 학생들의 수업 진행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평가활동이다. 형성평가의 결과는 교사들이 자신의 교수 행위를 수정하기 위한 기초 정보로서 활용된다. 교사들은 형성평가를 토대로 교수내용을 쉽게, 혹은 어렵게 수정하기도 하고 진도를 빠르게, 혹은 느리게 나가기도 한다. 형성평가는 교수의 효과를 높이는데 필수적인 장치로서 많은 평가관련 전문가들이 이를 강조하고 있다.

총괄평가는 한 단위의 수업이 끝난 후에, 한 단위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설정된 수업 목표가 어느 정도나 달성되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평가활동이다. 이때 한 단위의 수업이란 한 단원의 수준에서부터, 한 학기, 또는 한 학년 전체일 수도 있다. 한 단위의 기간이 짧은 경우, 그러한 단위 수업에 대한 총괄평가의 성격은 진단평가나 형성평가에 접근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총괄평가의 주 목적은 평가의 결과가 교수·학습 과정에 환류되어 교수·학습의 질을 높이는 것보다는 일정 단위 시간에 걸친 교육행위의 효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하는 데 있다. 수행평가와 이들 평가와의 관계는 간단하다. 수행평가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의 평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평가(측정)의 방법 중의 하나이다. 즉, 진단평가를 수행 평가식으로 할 수 있다. 형성평가도, 그리고 총괄평가도 수행평가식으로 할 수 있다. 진단, 형성, 총괄평가를 시행할 때에 선택형 지필검사로 하지 않고, 수행평가와 관련되는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라. 결과평가, 과정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

일반적으로 수행평가는 학습의 결과보다는 학습의 과정에 대한 평가를 보다 중시하는 평가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수행평가를 강조할 때는 언제나 학습의 과정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그러므로 결과평가나 과정평가의 의미와 그것이 수행평가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결과평가는 학습의 결과를 평가하는 평가방식이고 과정평가는 학습의 과정을 평가하는 평가방식이다. 여기서 결과평가는 앞에서 기술한 총괄평가와 관련된다. 일정 시간의 단위 교수-학습 활동이 이루어진 다음에 그 결과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평가가 총괄평가이므로 총괄평가에서는 학습의 결과가 평가의 핵심이 된다. 중간의 과정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인 결과가 좋았다면, 즉 과정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최종단계에서 처음에 설정된 교수-학습 목표가 달성되었다면 그것으로써 족하다는 가정이 결과평가에는 깔려 있고, 이러한 가정은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최종 결과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바람직한 결과는 대개 바람직한 과정의 산물인 경우가 많고, 과정에 충실하다는 것은 결과와 관계없이 의미있다는 점이 과정평가 설정의 근거가 된다. 특히 교수-학습 상황에서는 과정평가의 결과가 바로 교수-학습의 질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과정평가는 그대로 형성평가와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과정평가의 성격이나 의미를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수학 문제해결 과제를 주었을 때 정답을 맞춘 것 못지 않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했을 때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과정은 다 옳았는데 마지막 답(결과)만 틀린 경우, 결과만 평가할 때는 완전히 틀린 것이 된다. 그러나 보다 타당한 평가는 이런 경우 과정을 고려하여 상당한 점수를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정평가의 의미는 분명하며,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을 평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타당성을 지닌다.

그러나 예컨대, 교사는 문제해결을 위한 계획수립 과정, 계획된 대로 조사활동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 보고서 작성 및 결과 보고과정과 토론 등 전 과정과 결과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진술에서 의미되는 ‘과정’은 앞의 ‘과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이 경우, 문제해결의 전 과정을 평가한다는 것의 의미는 앞의 경우보다 분명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제기되는 ‘과정’이란 개념의 불명료성은 과정평가라는 평가행위에 혼란을 야기시킨다. 후자의 경우 ‘과정’이란, 문제의 제기에서부터 문제가 종결되기까지의 전 시간 동안에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활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경우 하나의 과정을 구성하는 시간적 단위는 몇 시간일 수도 있고, 몇 주간일 수도 있으며, 몇 달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적 단위 시간 안에서 발생하는 활동(행위)의 종류 역시 몇 가지 활동으로부터 수십 수백 가지 활동들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과정’의 성격이 이와 같이 복잡한 경우 ‘과정평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으며, 만약 과정평가가 상식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전 과정”을 다 평가하는 것이라면 과정평가는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과정’을 시간적 개념으로 파악하자면 연속적이다. 그리고 활동으로 파악하자면 특종 활동들의 연결들이다. 연속적인 흐름의 모든 순간들이 다 평가의 대상은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연속적 흐름으로서의 과정 중에서 ‘특정 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활동들 모두가 다 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서 ‘특정한 활동’들이 선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평가라고 해서 ‘전 과정’을 다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과정 중 중요한 일부를 선택하여 평가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어떤 시간과 어떤 활동이 과연 평가의 대상이 되는가를 결정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과정을 구성하는 시간과 활동의 단위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쪼개어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인 것이다. 과정평가의 성격을 규정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과정평가의 결과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과정평가의 기본 성격을 형성평가적인 것으로만 한정한다면 과정평가의 결과는 어디까지나 교수-학습 과정의 개선을 위한 정보로서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행과 같이 과정평가를 중시한다는 전제 하에 여러 과정을 평가하고, 그 결과를 점수화하여 총괄평가 점수에 포함시키는 것은 과정평가의 형성평가적, 성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개념적으로 과정평가의 정의를 형성평가적으로 내린다면 위와 같은 평가방식은 더 이상 과정평가가 아닌 것이다. 교수-학습의 여러 과정에서 평가를 하고 결과를 점수화하여 총괄평가에 포함시키는 것을 과정평가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평가는 하되(이 경우 평가란 관찰하고 해석하며 판단하는 행위) 점수화하지는 않고 교수의 행위를 개선하기 위한 자료로서만 활용하는 것만을 과정평가라고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수행평가가 이러한 의미의 결과평가 또는 과정평가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즉, 수행평가는 하나의 측정·평가의 방법으로서 결과평가나 과정평가에 모두 관계된다. 수행평가는 결과평가의 하나의 방식으로서 채택될 수 있으며,
과정평가의 한 방법으로서 채택될 수도 있다. 수행평가가 결과평가나 과정평가를 다 포함하고, 특히 과정평가를 중시하는 평가방식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결과평가나 과정평가가 교육평가에서 다 중요한 평가의 방식들인데 그러한 평가를 시행하는 하나의
방식, 그러나 가장 중요한, 그래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하는 평가방식이 수행평가인 것이다.

마. 실기평가 및 포트폴리오 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

실기평가만이 수행평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포트폴리오 평가만이 수행평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기평가나 포트폴리오 평가와 수행평가와의 관계는 논의가 필요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즉, 실기평가나 포트폴리오 평가는 앞의 [표1]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수행평가의 기법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포트폴리오 평가는 수행평가의 대표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수행평가는 아닌 것이다. 실기평가나 포트폴리오 평가를 했을 경우 모두 우리는 수행평가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수행평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에도 학교 현장에서는 이미 교과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실기평가를 실시해 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는 이미 수행평가를 시행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수행평가란 것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실기평가를 해 왔음으로 우리는 이미 수행평가를 시행해 온 것이며, 따라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수행평가 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수행평가의 범위는 넓고 그 심도는 깊다. 극히 부분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의 수행평가도 있고, 전체적이고 본격적인 수준의 수행평가도 있다. 단순한 실기평가에 의한 수행평가는 전자에 해당되고, 복잡한 포트폴리오 평가에 의한 수행평가는 후자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가 해왔다는 수행평가는 극히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수행평가이었으나 앞으로 우리가 지향하는 수행평가는 교육의 질적 향상에 의미있게 기여할 수 있는 수준높은 수행평가인 것이다.

수행평가에 대한 오해

현재 수행평가와 관련하여 현장의 많은 선생님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들을 10가지 정도로 정리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수행평가는 복잡하고 힘들어서 현재의 여건 하에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평가방식이다. 따라서 수행평가는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한 다음에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오해

수행평가에 대한 위와 같은 생각은 현재 현장의 많은 선생님들이 가지고 계신 거의 보수적인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옳은 생각도 아니다. 부분적으로 옳고, 부분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그러나 수행평가가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될 수도 있는 평가방식이라면 위의 생각은 옳은 생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의 현장에서는 특정 교과목, 예컨대, 체육, 음악, 미술과 같은 교과에서는 이미 수행평가가 시행되어 왔으며, 그 이외의
교과에서도 교사에 따라서는 수행평가를 부분적으로 실천해 온 경우도 있다. 물론 그러한 수행평가가 완전한 수준에서 전면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지만 불완전한 상태로나마 이미 시행되어 왔다는 사실은 위의 생각이 반드시 옳은 생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평가를 완전한 수준에서, 그리고 전면적으로 시행하려고 한다면 현재의 여건에서는 그 실행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수준에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시행하려고 한다면, 그 실행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평가의 시행이 현재로서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위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수행평가의 실시와 관련하여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리자는 것보다는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수행평가를 착실히 시행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수행평가의 시행을 보다 본격화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일일 것이다.

2.수행평가는 모든 학교에서,모든학년,모든교과, 그리고 교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내용 영역(모든 단원)에 대하여 시행되어야 한다는 오해

위에서 제시한 국가 문서들의 내용(“교과학습발달상황의 평가는 선택형 지필평가와 수행평가로 구분하여 실시한다”)에 의하면 수행평가는 일단 시행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모든 학교, 학년, 그리고 교과에서 수행평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특정 교과의 모든 단원 영역에 대하여 수행평가를 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는 않다. 특정 교과의 어느 영역을, 어떠한 방법으로, 얼마나 자주 평가(수행평가)할 것이며, 수행평가의 세부기준(배점)이나 반영비율, 성적처리 방식과 결과의 활용방법 등은 모두 교과협의회에서 학교와 교과의 특성을 고려하여 자율적으로 계획하고, 단위 학교의 성적관리위원회와 학교장이 이를 단위학교의 실정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결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와 같이 국가 수준에서는 수행평가 실시와 관련된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단위 학교에 위임한 셈이다. 물론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강제 의무사항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단위 학교에 위임되어 있다. 그리하여 여건이 어려운 학교에서는 최소로 할 수 있다. 예컨대, 여건이 가장 열악하여 한 교사가 약 1000명
정도의 학생에 대하여 수행평가를 하여야 할 경우, 1학기 또는 1년에 단 한 번만 가장 수월한 형식(단답형이나 완성형 또는 간단한 서술식 등으로)으로 수행평가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형식적인 수행평가는 수행평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다 타당한 조치는 이러한 상황(수행평가가 의미있게 시행되는 일이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하에서는 수행평가를 시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책을 공식화 하는 일이다.

3.모든 수행평가의 결과는 점수화되어 학생의 최종 성적을 산출하는데 포함되어냐 한다는 오해

평가의 결과를 활용하는 방식에 따라 평가는 진단평가, 형성평가 그리고 총괄평가로 구분될 수 있으며 수행평가는 이 세 가지 평가 방식에 다 같이 사용될 수 있다고 전술한 바 있다. 모든 수행평가의 결과를 점수화하여 최종 성적을 산출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수행평가의 결과를 오로지 총괄평가의 성격으로만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수행평가의 결과는 총괄평가뿐만 아니라 진단평가와 형성평가에도 얼마든지 사용될 수 있다. 오히려 형성평가에 더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즉, 학생의 최종 성취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사의 진행되는 교수 행위와 학생의 진행되는 학습 행위를 보다 효율적인 방향으로 수정하는데 적절한 정보를 얻기 위한 평가, 즉 형성적 평가의 목적으로 더욱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점수화 하는 것, 그리고 점수화 하는 것만이 평가라고 잘못 인식하여 왔다. 따라서 점수화하지 않는 것은 평가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물론 점수화하는 것이 평가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평가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또한 성적에 포함되지 않는
평가, 즉 학기말이나 학년말 성적 합산에 포함되지 않는 평가(점수화)는 평가가 아니거나 평가의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점수화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평가일 수 있고, 합산되지 않는(성적에 포함되지 않는) 점수화나 평가가 오히려 더 중요한 평가인 경우도 있는 것이다. 수행평가의 결과 역시 얼마든지 점수화되지 않을 수도 있고, 최종 성적에 포함되지 않는 형식으로 시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그러한 평가가 오히려 더 중요한 평가인 것이다. 수행평가의 결과를 어떠한
방식으로 점수화하는가는 학교의 결정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4.수행평가는 결과보다는 오히려 과정을 더 중시하는 평가다. 그러므로 수행평가에서는 수업의 모든과정이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오해

교육의 평가에서는 학업 성취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도, 그리고 학업 성취의 과정을 평가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과정에 대한 평가를 특히 중시하는 것은 그 동안 평가가 너무 결과에만 치우쳐 왔고, 과정에 대한 평가를 소홀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결과 평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의 일정한 시간 단위 안에서 이루어진 종결(결과)이라는 것은 그보다 긴 시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긴 과정의 특정부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평가는 어떤 의미에서는 과정평가의 한 부분이므로 이 두 종류의 평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수행평가에서는 이 두 종류의 평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수행평가에서는 결과보다도 과정이 더 중시된다는 믿음은 올바른 믿음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과정에 대한 평가는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과정에 대한 평가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앞으로 과정에 대한 평가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과정을 평가한다고 수업의 모든 과정을 다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평가보다는 수업인 것이다. 수업의 결과와 과정을 바람직하게 운영해 나가기 위해서 평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가는 수업을 돕는다는 전제하에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교육행위인 것으로서 평가를 위하여 수업을 희생한다는 명제는 성립될 수 없다. 앞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과정이란 시간이나 활동의 연속적인 흐름이다. 시간이나 활동의 흐름 중에서 어느 순간, 어느 활동을, 그리고 어느 정도의 빈도를 평가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은 평가하는 주체가 결정해야 할 의사결정의 문제다. 그러므로 수행평가가 과정을 강조한다고 해서 수업의 모든 과정이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5.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성적을 산출하기 위해서 지필식 평가와 수행평가를 병행해서 실시하여야 한다는 오해

이러한 생각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생각이다. 첫째는 지필식 평가와 수행평가는 배타적으로 이분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필평가의 어느 형식, 예컨대 서술형이나 논술식 지필평가는 중요한 수행평가 방식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이 구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문제에 논리적으로 포함되는 문제로서 지필식 평가가 그 자체 내에 수행평가적 방식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지필식 평가만 하더라도 수행평가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는 별도의 다른 종류의 수행평가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택형 지필검사를 평가방식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면, 이 방식은 우리의 정의상 수행평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수행평가는 하여야 한다는 지침에 따라 선택형 지필검사 이외의 다른 종류의
수행평가 방식, 이를테면 서술형이나 논술형, 연구보고서나 실험결과물 제출, 포트 폴리오 방법 등을 사용하여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6.객관식 선택형 평가방식은 학교 교육적 상황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평가방식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볼때 객관식 선택형 평가방식은 모두 수행평가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오해

그렇지 않다. 객관식 선택형 평가방식이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바람직하지 않은 평가방식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선택형 시험이 가장 적절한 평가방식일 수도 있다. 예컨대, 한 학기에 10권의 책을 다루고, 학기말 시험에 그 10권의 책 내용 전부에서 골고루 시험문제를 내며, 평가의 주 목적이 학생들이 그 10권의 책 내용 중 중요한 개념들이나 개념들 간의 관계를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 또는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면 가장 타당하게 평가하는 방법은 선택형 평가방식인 것이다. 즉, 이러한 평가상황에서 중요한 평가의 대상은 ‘기억하고 있는 지식의 양과 종류’이다. 지식을 많이 기억한다는 것이 필요없는 일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물론 지식을 기억하는 것만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을 때는 문제가 있지만 지식의 기억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성취 정도를 평가하는 것 또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형 시험을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은 아닌 것이다. 선택형 시험이 필요한 경우는 선택형 시험으로, 수행평가 방식이 필요한 경우는 수행평가 방식으로 즉, 상황에 적절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상태는 선택형 시험과 수행평가를 병행하는 것이다. 선택형만 고집하는 것도, 수행평가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도 바람직한 평가방법은 아닌 것이다.

7.수행평가는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새로운 평가가 법이라는 오해

최근에 수행평가라는 용어가 널리 확대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수행평가라는 평가방식은 기존의 평가방식과 완전히 새로운 어떤 또 하나의 새로운 평가방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미 앞에서 전술한 바 대로 수행평가라는 용어는 최근에 새롭게 쓰이고 있으나 그 용어가 의미하는 종류의 평가기법은 특정 학교나 교과에서 그리고 특정 교사들에 의하여 이미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컨대, 서술형, 논술형 평가는 수행평가의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평가방법은 수행평가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행평가 방식의 일부 기법으로서 서술형, 논술형 평가 방법이 이미 사용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최근 시행하고자 하는 수행평가 방식에 새로운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수행평가적인 방법을 이미 사용해 오고 있기는 했지만 최근에 논의되는 수행평가 방식은 그 범위나 심도에 있어서 기존의 평가방식을 휠씬 초과하는 평가방식이다. 예를 들면 ‘포트폴리오식’ 평가방식은 수행평가의 대표적인 방법으로서 이러한 평가방법은 수행평가라는 용어가 새롭게 소개되면서 우리의 학교 현장에 도입된 평가방법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포트폴리오 방식만이 수행평가라고 말하기도 한다(물론 잘못된 생각이지만). 그리고 수행평가는 특히 과정을 중시하는 평가라는 점에서 기존의 평가방식과는 다른 것처럼 보이나 기존의 평가가 과정을 무시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실천의 과정에서 소홀히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수행평가가 완전히 새로운 평가방식은 아니지만 수행평가라는 용어를 도입하면서 그에 따른 새로운 평가방법이 도입된 것은 사실이다.

8.수행평가는 어떠한 방법으로 시행이 되든 기존의 선택형 평가방식보다는 더 바람직하다는 오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잘못 이루어지거나(즉, 타당성이 결여되거나) 형식적으로 시행된 수행평가는 섬세하고 사려깊게 고안되어 실시된 선택형 평가방식보다 교육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행평가라고 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며, 기존의 평가방식보다 더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좋은 평가, 바람직한 평가란 무엇보다도 우선 평가의 목적에 적합한 평가이어야 한다. 평가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다면, 그것이 아무리 본격적인 수행평가 방식으로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바람직한 평가는 아닌
것이다. 목적과 관련이 없거나, 혹은 목적과 관련이 잘못 맺어진 상태에서 이루어진 수행평가는 그렇지 않은 선택형 평가보다도 오히려 낮은 수준의 평가방식일 수 있다. 만약 어느 특정 교과서에서 평가의 중요한 목표가 학생들의 폭넓은 기본개념에 대한
이해라고 하면 이 경우는 선택형 시험이 평가방식으로서는 한 가지 제목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학생들의 생각을 전개해야 하는 논술형 방식보다는 더 타당하고 의미있는 평가방식인 것이다.

9.수행평가는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 외국의 평가 방법으로서 국가(교육부)가 이를 강제로 도입,적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오해

전술한 바와 같이 수행평가를 본격적으로 완전한 수준에서 시행하려 한다면 우리의 현실 여건이 이를 감당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현재 여건 하에서는 수행평가를 전혀 실시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육의 여건이 현재보다도 훨씬 열악한 지난 날에도 신념있는 교사들은 나름대로의 수행평가를 실시한 적이 있다. 사실 수행평가의 실시문제는 정도의 문제이지 양극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평가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오해이다. 수행평가가 외국에서 수입한 평가방식이라는 생각도 맞는 생각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 고려나 이조 때부터 시험으로서 수행평가 방식이 사용되어 온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시를 짓거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등 문·무과 인재를 등용하기 위한 과거시험의 방식은 바로
수행평가 방식의 전형적인 예들이다(백순근,1999). 물론 수행평가라는 용어를 생성시키면서 평가와 관련되는 산만하고 광범위한 요소들을 체계화하여 우리의 평가관행을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서양의 교육 선진국들이었다.
그들은 객관식 선택형 평가방식만으로는 교육평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음을 철저히 느끼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못된 평가관행을 개정해야 한다는 절실한 인식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거의 모든 교육적 평가상황에서 수행평가 방식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수행평가의 적용이나 확대여부는 교육의 본질을 구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보편적인 평가방식이지 지역의 특수성에 따라 변별적으로 선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10.수행평가의 비율은 높을수록 바람직하다는 오해

수행평가를 무조건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최근, 특히 시·도교육청 평가와 관련하여 수행평가의 비율은 높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수행평가의 비율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시행의 비율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에의 반영비율이다. 이 두 종류 중 어느 경우도 수행평가의 비율이 높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특히 수행평가 시행의 비율이 너무 높으면, 교사들에게는 물론 학생들에게 과도한 부담이 된다. 특히 교사들이 경쟁적으로 수행평가 실시와
반영의 비율을 높인다면, 그리하여 학생들이 적정한 시간 내에 적정한 방법으로 수행평가적인 과제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이러한 종류의 수행평가는 결과적으로 오히려 반교육적 현상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된다. 학생들은 과제를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대신 하게 되고, 때로는 친구의 과제 수행물을 훔치거나 그대로 복사하거나, 혹은 여럿이 과제물을 서로 분담하여 하는 등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역효과가 순효과를 압도하게 된다. 또한 내실있는 수행평가를 제대로 하자면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많이 발생한다. 수행평가는 선택형에 비해서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장점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수행평가는 도구개발이나 채점을 위한 노력, 시간, 경비가 많이 들며, 객관성과 신뢰성 확보가 어렵고, 개발된
검사의 반복 사용이 용이하지 않다(부재율,1999). 이외에도 수행평가를 실시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많은 난점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평가를 강조하는 이유는 지필식 선택형 평가만으로는 평가의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수행평가를 강조하는 것이지 모든 경우에, 그리고 학습의 모든 과정에서 수행평가만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현상과 마찬가지로 수행평가의 경우도 현실과 여건에 적절해야 한다. 우선 교사가 수행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학생들이 할 만한 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육적으로는 아무리 바람직하다고 하더라도 비용,효과적인 측면에서 그 효율성이 너무 낮다면 이러한 평가방식을 무리하게 고집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언제나 적정의 수준, 중용을 찾는 지혜가 요청되는 것이다.

출처 : 허경철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구약 예언서 이해

차준희 편저, 구약 예언서 이해, 서울:한국신학연구소, 2006

이번 학기 예언서 과목에 부교재로 기록되어 있던 책인데, 학기 초반에 시간이 있을 때 잠깐 읽어두었으면 괜찮겠다 싶은 두께로 예언서에 대한 이러 저러한 자료들이 정리되어 있는 논문들을 모아놓았다. 물론 편저자의 논문도 함께 들어 있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로 나뉘는데, 아모스, 호세아, 미가와 같은 후기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스스로 원해서 예언을 하게 되지 않았고 야훼로부터 반강압적인 예언 지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두 번째 파트 편저자의 논문에서 예언서 연구사에 대해 적혀 있는데 지금 머리에 남는 것은 예언자들은 제의적 예언자들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과격성’을 띈 그들의 예언을 왕국 소속 제사장들이 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단 지금 반 정도 읽었는데, 오늘 이거 다 읽고 화요일에 있는 과제 마저 준비해야겠다. 화요일에 발표 수업이라는 압박을 주말동안 견디어 내야 한다.

이번학기는 두 과목을 제외하고는 전부 발표가 있다. 조별 발표이든 개별 발표이든간에 이전 어떤 학기들보다 정신없는 학기가 될 듯하다. 아~ 이제 4학년이라 그냥 편하게 시간표 만들어 놓았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 이제 점수도 다 채웠는데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이 과목들이 내게 있어 충분한 도움과목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요엘이 약속했다?

필자가 필요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저런 책들을 섭렵하던 가운데 최복태의 알기쉬운 신학이야기가 발견 되었다. 이 책은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책인데 전반적으로 신학에 대한 지식을 두루 쉬이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이는 책이다. 그런데 초반을 읽고 있다가 이런 부분을 발견했다.

120문도가 오순절 다락방에서의 성령 체험을 기록한 후의 부분인데,

이러한 광경을 보고 어떤 이들은 저희가 술에 취한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베드로는 군중에게 술 취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자 요엘이 약속했던 성령의 역사라고 증언했다(사도행전 2:16, 21)1

위의 색이 다른 부분이 문제인데, 요엘이 약속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엘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성령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 가지고 뭘 따지고 드느냐 지은이에게 악감정이라도 있는 것이 아니냐 하시는 분이 계실까 적어두지만 이 부분을 문제 삼는 것은 이 책의 지은이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학생들과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이 무엇인지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쓴 것이기 때문이다.2

이에 관해 베드로 사도의 증언이 담긴 성경 구절을 함께 적어 두자면,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3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4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5
이 일은 하나님께서 예언자 요엘을 시켜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6
No, this is what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7
But this is that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8
but this is what was spoken of through the prophet Joel:9

오해라는 것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시작되어 그것이 해결되기 전에는 그 골이 깊어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 아울러 이 책이 초판인 것을 감안하고 다음 판에서는 이런 사소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이 수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최복태 지음, 알기쉬운 신학이야기, (서울 : 크리스챤 헤럴드, 2007), pp. 38-39.[]
  2. Ibid, p. 10.[]
  3. 개역한글[]
  4. 개역개정[]
  5. 공동번역[]
  6. 표준새번역[]
  7. NIV[]
  8. KJV[]
  9. NASB[]

English

뭔가 수업시간에 풀어보라고 준 종이인데, 웬지 어딘가 어색하다고 느껴지는건 왜인가.

1. 주어 + 동사

가. 바람이 불었다.
The wind blew.
나. 해가 떴다.
The sun rose.
다. 학기가 시작되었다.
A semester started.
라. 우리는 먹고 마신다.
We eat and drink.

2. 주어+동사(phrasal verb)
가. 그녀가 돌아왔다.
She come back.
나. 불이 나갔었다.
The light go out.
다. 그가 일어섰다.
He stand up.
라. 내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
My computer break down.
My computer out of order.

3. 주어+동사+부사(동사 수식)
가. 이 약은 감기에 잘 듣는다.
This medicine worked good.
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The wind blew powerful.
다. 문이 아주 쉽게 잠긴다.
Door locked good.
라. 그들이 다시 모였다.
They gather again.
마.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했다.
We talk face-to-face.

4. 주어+동사(be)
가. 신은 존재한다.
God be.

5. 주어+동사(be)+부사
가.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
Nobody is here.
나. 다른 사람들은 저기에 있다.
Other is there.

6. 주어+동사<be>+형용사/명사
가. 그녀는 매우 고집이 세다.
She is mule-headed.
나. 수영은 좋은 운동이다.
Swimming is good sports.
다. 우리 제품은 큰 성공이었다.
Our product is coup.

7. 주어+동사<be>+전치사+명사
가. 영어 수업은 오전에 있다.
English class is in the morning.
나. 회의는 월요일에 있다.
Conference is on Monday.
다. 콘서트는 7시이다.
Concert is at 7 o’clock.
라. 그는 도서관에 있다.
He is on the library.
마. 강연은 705실에서 있다.
A lecture is on Room 705.
바. 그녀는 부산 출신이다.
She is from Pusan.
사. 나는 ABC 회사에서 왔습니다.
I am from ABC Corporation.
아. 우리는 휴가 중이다.
We are on vacation.
자. 이것들은 할인 판매되고 있다.
This is on sale.
차. 이 편지는 너에게 온 것이다.
This letter is for you.

8. 주어+동사<be>+동사ing
가. 그의 일은 컴퓨터를 수리하는 것이다.
His work is repairing computer.
나. 그의 직업은 책을 파는 것이다.
His job is selling books.
다. 중요한 것은 승인을 얻는 것이다.
The importance thing is getting a acceptance.
9. 주어+동사<be>+to+동사
가. 나의 목표는 수학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My goal is to show ability in mathematics.
My goal is to display ability in mathematics.
나. 그녀의 계획 중의 하나는 내년에 아기를 낳는 것이다.
One of her plan is to have a baby next year.
다. 시급한 문제는 원조를 늘리는 것이다.
The urgent problem is to increase aid.

10. 주어<to+동사>+동사<be>
가. 이 나라에 사는 것은 편하다.
To live this country is convenient.
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좋다.
To study hard is good.
다. 다음 달에 그녀와 결혼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To marry her next month is a glad feeling.
To marry her next month is a delightful feeling.

11. 주어<동사ing>+동사<be>
가. 공부하러 외국에 가는 것은 좋다.
Going abroad to study is good.
나. 그를 칭찬한 것은 잘 한 일이다.
Complimenting him was good.
다. 그녀와 헤어진 것은 내 실수였다.
breaking up with her was my mistake.

게임 – 숫자와 4칙을 한번씩만

이번에 어떤 행사에 스텝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행사 중에 게임을 하는 시간이 있다. 어제(8일)는 각 게임의 진행자를 뽑고, 필요한 준비물 중에 협조가 필요한 물건에 대해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다들 각자 소속되어 있는 팀원들과 회의를 하거나 준비하기 위해 각 처소로 흩어졌는데, 필자가 속해있는 팀은 별다른 준비사항이나 회의할 내용이 없기 때문에 메인팀에 합류하여 각 게임에 필요한 문제를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여러 문제들 중 4개의 1자리 숫자로 10을 만드는 게임의 문제가 있어서 프로그래밍해서 해결하면 되겠다 싶어 본인이 하겠다고 하여 집으로 가지고 왔다.

이 게임의 진행방법은 1~9까지의 한 자리 숫자 4개를 진행자가 제시하면 그 사이에 4칙 연산자(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넣어 숫자에 연산자를 대입한 결과값이 10이 나오도록 하면 되는것이다. 숫자와 연산자는 한문제 내에서 각각 한번씩만 사용이 가능하다.

7 2 1 5

라는 숫자가 주어졌다면, 답은

7 2 + 1 * 5

가 되는 것이다.

프로그래밍을 시작했고, 숫자와 연산자를 구하는 부분까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숫자와 연산자를 구한 뒤에 계산하는데서 발생되는데, 임의의 연산자를 구해서 숫자와 합쳐서 출력하는데는 별 무리가 없었지만, 이 연산의 결과가 10인가 아닌가에 따라 결과를 출력하느냐 아니면 연산자를 다시 임의로 배열하여 연산의 결과를 만드는가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거 꽤 복잡하다. 그래서 무식하게 4개의 겹치지 않은 숫자와 사이에 넣을 연산자를 겹치지 않게 5천개 생성하여 CSV형식으로 만들어저장하였다.

그리고 자동필터로 결과가 10인것만 골라내었다. 대략 100개 가까이 나오는군.

아~ 그 후로 몇 번인가 더 수정을 해보고 다른 자료들을 찾다보니 문자형식의 변수 내용이 계산식일 때 계산해 내는 함수를 만들어 놓은것을 찾아내서 적용해 봤더니 계산이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10인것만 골라 출력하도록 바꾸어서 해결봤다는 말씀!

결과를 보고 싶으신 분은 이 링크를 누르시라, 주소창에 t=다음에 숫자를 넣으면 결과의 갯수, f=다음에 넣으면 계산한 숫자의 갯수를 정할 수 있다. r=은 결과로 나올 값을 정한다. 기본은 50개 결과를 나오도록 했고, 4개의 숫자로 계산하도록 만들었고 10이 결과가 되도록 만들었다.

James Commentary : The Anchor Bible

1:1
   Greeting :: 인사말

1:2~18
       Patience in the midst of afflictions :: 고통 가운데 인내
       2~4
           Afflictions lead to steadfastness and perfection :: 고통은 신념과 이상을 이끌어낸다
       5~8
           Wisdom obtainable through prayer to God :: 지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얻을 수 있다
       9~11
           Riches nothing over which to boast :: 부자는 더이상 자랑할 수 없다.
       12~18
           Perserverance in tribulations produces blessedness; :: 고난 속의 인내는 복 있는자를 낳는다.
           God is not the cause of tribulations, but man’s own lust. :: 하나님은 고난의 원인이 아니다. 인간의 고유한 욕망이다.
1:19~27
   The importance of being a door of the word :: 말씀의 문이 되는 것의 중요성

2:1~13
   The impropriety of currying favor with the rich ::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의 부정
2:14~26
   The worthlessness of a faith not practiced :: 행하지 않는 믿음의 무가치

3:1~12
   The danger of a poisoned tongue :: 유독혀의 위험
3:13~18
   True wisdom involves humble living :: 지혜는 겸손한 삶을 필요로 한다.

4:1~12
   The combativeness of the receipients :: 수용자의 싸움
4:13~17
   Business ethics :: 사업윤리

5:1~6
   judgement on the unrighteous Rich :: 부정한 부자에 대한 심판
5:7~11
   Patient waiting for the Lord’s return :: 주의 귀환을 기다리는 인내심
5:12~20
   Manual of disciple :: 제자의 편람
      12~13
           No swearing, but praying, singing :: 맹세하지 말고 기도하고, 찬양하라
      14~18
            The healing of the sick :: 병든자의 치료
      19~20
             The salvation of apostates :: 배교자의 구원

SNS란 무엇인가?

노무라종합연구소 2011년 Web 2.0 – Roadmap라는 별주부뎐님의 포스팅을 살피다 보니 SNS라는 생소한 단어가 보여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는데, terms나 wikipedia에서는 정의된 것이 없었다.
네이버 검색을 통해 찾아낸 것은

Social Network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망으로 둘만의 관계 뿐만 아니라 여러 가능한 모든 관계를 일컫는 말

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돕는 서비스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검색해 보니 관련 내용들도 꽤나 많네요

각주 표기법

1) Ibid. (Ibidem = in the same place)
바로 앞의 註에서 다루어진 문헌을 다시 인용할 때 사용한다.
우리말 문헌에서는 <上揭書>, <앞책>, <같은책>, <앞글> 등의 용어를 쓴다.

2) Op. cit. (Opere Citato = in the work cited)
앞에 다루어진 문헌을 다시 언급하려 하는데 중간에 다른 주가 끼어있을 경우에 사용한다.
우리말 문헌에서는 <前揭書>, 혹은 <앞에 든 책>으로 표시한다.

3) 기타
Ibid., op. cit. 이외에도 Idem(the same), Loc. cit.(loco citato =in theplace cited)도 쓰이지만 요즈음은 라틴어 용어를 잘 쓰지 않는 경향이므로 앞에 나온 것을 다시 언급할 때는 저자명과서명의 주요단어로 간략하게 표시하는 방식이 좋다.

op. cit. 또는 전게서의 용법

op, cit.는 라틴어 poera citato의 약어로서 ‘인용된 작품에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앞에인용된 저자의 저서를 다시 인용하고자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말의 전게서에 해당된다. op. cit.를 사용해야 하는 경우에는저자의 성만을 인용하고(한서의 경우는 저자의 전(全) 성명을 명기한다.) 콤마(,)를 찍고 op. cit.에 밑줄을 긋는다.다음에 면수가 다른 경우에는 이를 명기한다.

op. cit.를 사용해야 되는 경우, 특히 동일한 저서의 동일한 면수인 경우에는 Loc. cit.(전게문)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두 가지 경우가 다 허용된다.

Loc. cit.는 라틴어 Loco citato의 약어로서 ‘인용된 장소에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 :
1) G. O. Stahl, Pulic Personal Administration(N. Y. : Harper & Brothers, 1956), p. 87.
2) Morstein F. Marx, Administration State(Chicago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p. 31.
3) Seahl, Loc. cit. 위의(각주 1)의 동일 저자의 동일한 면수를 나타낸다. 이때 op. cdt.를 사용할 수도 있다.
4) Ibid., p. 19. (각주 3)의 저서를 의미한다.
5) Marx, op. cit., p. 47. 중간에 다른 참고문헌 주가 삽입되었으므로 op. cit.를 사용하고 또한 면수도 달라졌다.
6) Ibid., p. 53. 바로 위의(각주) 저서를 의미한다. 또한 면수가 다르므로 면수를 표시하였다.

Ibid. 대신에 상게서, op. cit. 대신에 전게서, loc. cit. 대신에 전게문을 사용할 수 있으나 어떤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

대공중관계(Public Relations)

아거님의 GatorLog의 스타벅스 파드캐스트가 남긴 교훈을 읽다보니 대공중관계(Public Relations)라는 용어가 있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광고와 홍보의 관계에서 홍보(publicity)라는 개념을 기록한 바 있는데, 그것과 대공중관계라는 용어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PR이라는 것을 단순히 개인의 존재를 홍보(알리는 행위)하는 것으로 나타내고 자기 PR의 시대라는 식으로 사용 했는데, PR을 홍보와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단지 알리는 행위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니 멋지게 표현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PR이란 바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람들과 바람직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GatorLog

니치 마케팅(Niche Marketing)

니치 (niche) 는 ‘틈새’ 를 뜻하는 말로 니치 마케팅은 소규모의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전략이다. 대부분의 제품들은 소비자가 오른손잡이일 거라는 가정을하고 만들어 낸다.그러나 대략 전체 인구의 10%정도는 왼손잡이라고 한다. 왼손잡이들이 이용하기 편하게 가위를 생산해서 판매한다면 전체 10%인 왼손잡이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시장의 틈새를 찾아 소규모의 특별한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니치 마케팅은 다양한 업종에서 색다른 아이디어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니치 마케팅

시편의 문학 장르

제6 장 시편의 문학 장르

20세기초에 궁켈(Herman Gunkel)은 우선 시편의 관용어, 형식적 구조, 그리고기능을 해석함으로써 시편을 크게 다섯 형태로 분류하였다.

  1. 찬양시(hymns)
  2. 개인 탄식시(individual laments)
  3. 개인 감사시(individual thanksgiving songs)
  4. 공동체 탄식시(communal laments)
  5. 제왕시(hymns for kings)

이러한 다섯 가지 양식 외에도 보다 덜 보편적이거나, 형식을 규정하기가어려운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다. 그것들은 공동체 감사시(communal thanksgivingsongs), 순례자의 노래(songs of pilgrimage), 축복과 저주'(blessings andcurses), 지혜시(wisdom poetry), 의식시(liturgies: 다른 문학 유형들로부터끌어 온 단편들을 의도적으로 결합시켜 예배를 위한 하나의 단위로 만든 것),그리고 ‘혼합 유형 또는 혼합시'(mixed types; 제의와 무관한 시편들을 융합시키고자유롭게 합성한 것) 등이다.

갓월드(Gottwald)는 시편의 다양한 유형을 다음 네 가지 유형으로 대별한다음에 다시 세분화된 형태를 제시한다.

  1. 탄식과 탄원 장르(Lamenting and Entreating Genres)
  2. 찬양과 감사 장르(Praising ana Thanking Genres)
  3. 실연(實演)과 연출 장르(Performing and EnactingGenres)
  4. 교훈과 명상 장르(Instructing and MeditatingGenres)

I. 탄식과 탄원 장르

1. 개인 탄식시

1)신체적 질병, 심리적 고통, 또는 사회-정치적인 억압과 배척을 당하는익명의 인물(표제의 자료에 언급된 구체적 인물은 제외한다)은 거친 표현으로그의 고통을 묘사하고, 때로는 결백함을 주장하게나 죄를 고백하며, 야웨께그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탄원한다. 간혹 도움을 바라는 울부짖음이 상달되고구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다. 이 장르의 세부적 하위 부분들에대해서는 다른 명명법이 종종 사용된다.

2)결백을 표현하는 탄식시는 “허위 고발당한 피고의 기도문”으로, 죄를 고백하는탄식시는 “참회시”로, 그리고 현재 당하는 고통보다는 조만 간에 닥쳐올 고통을시사하는 탄식시는 “보호시”로 각각 불린다.

3)개인 탄식시와 공동체 탄식시 사이의 차이점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시편에서는”나”라는 주어가 공동체를 대변하는 화자일 수도 있고, 또 본래는 개인 탄식시였던것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공동체 탄식시로 변화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4)이와 마찬가지로, 개인시들 중 어떤 것들이 탄식시인지 혹은 감사시인지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것은 탄식시가 사실상 “감사를 미리”표현할 정도로 확신에 차서 구원을 상징적으로 예기하고 있는 반면, 감사시는과거의 고통에 대한 보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5)개인탄식시의 일반적 구조(Anderson, 73-74)

  1. 하나님을 부름
  2. 불평
  3. 신뢰의 고백
  4. 탄원
  5. 확신의 말
  6. 찬양의 서약

해당 시편 : 3; 5; 6; 7; 9-10; 13; 17; 22; 25; 26; 28; 31; 35; 36; 38;39; 40; 42-43; 51; 54; 55; 56; 57; 59; 61; 63; 64; 69; 70; 71; 77; 86;88; 94; 102; 109; 120; 130; 140; 141; 142; 143

시편 3편

<구조>

1-4절 야웨께 구원을 요청함(하나님을 향한 탄원)
5-7절 구원에 대한 확신(하나님에 대한 신뢰)
8절 제의적 축복(혹은 찬양)

시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많소이다
시 3: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시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자니이다
시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
시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 3:6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2. 제왕의 개인 탄식시

포로기 이전의 다윗계 왕이 적어도 10편의 시에서 주제로 나타난다. 그 이외의다른 시편에서도 암암리에 언급되고 있다. 전체를 왕의 탄식에 할애하고 있는시편은 거의 없지만, 왕의 탄식어투가 적어도 세 편의 시에 포함되어 있다.

해당시편: 18:4-6; 89:46-51; 144:1-11

시편 144:1-11

<구조>

1-2절 개회찬양
3-4절 덧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고백함
5-8절 신현현과 하나님의 중재를 요청하는 후렴구
9-11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신뢰

시 144:1 나의 반석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
시 144:2 여호와는 나의 인자시요 나의 요새 시요 나의 산성이 시요 나를건지는 자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피난처 시요 내 백성을 내게 복종케 하시는자시로다
시 144:3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시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 144:5 여호와여 주의 하늘을 드리우고 강림하시며 산들에 접촉하사 연기가발하게 하소서
시 144:6 번개를 번득이사 대적을 흩으시며 주의 살을 발하사 저희를 파하소서
시 144:7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큰물과 이방인의 손에서 구하여건지소서
시 144:8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 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시 144:9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열 줄 비파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 144:10 주는 왕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자시요 종 다윗을 그 해하는 칼에서구하시는 자시니이다
시 144:11 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저희 입은 궤사를 말하며그 오른손은 거짓의 오른손이니이다

3. 공동체 탄식시

1)기근, 역병, 사회경제적 억압, 또는 군사적인 재난으로 인해 고통 당하는공동체가 모여서 단식하고 탄식하며 희생제사를 드린다. 비록 공동체 탄식시가관련 재앙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개인탄식시의 구조와동일하다. 불편은 대개 “우리”라는 형식으로 전개되지만, “나”라는 화자가 공동체를대표하며 탄식할 때도 있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 볼 때, 공동체 단식기간중에도 개인 탄식시가 아울러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공동체탄식시의 일반적 구조(Westermann, 57-68)

  1. 하나님을 부름
  2. 불평
  3. 하나님의 과거행위에 대한 회상
  4. 탄원
  5. 하나님의 응답
  6. 찬양을 위한 서약

해당 시편: 12; 44; 58; 60; 74; 79; 80; 83; 85; 89; 90; 108; 123; 126;137; 144.

시편 12편

<구조>

1절 A: 야웨께 도움을 요청함(탄원)
2a-3 B: 하나님께 기도
4절 C: 악한 자들의 말
5절 C’: 하나님의 말씀
6-7절 B’: 합창단들의 응답
8절 A’: 현실에 대한 탄식(탄원)

시 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없어지도소이다
시 12:2 저희가 이웃에게 각기 거짓말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말하는도다
시 12:3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시 12:4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의 혀로 이길지라 우리 입술은 우리 것이니우리를 주관할 자 누구리요 함이로다
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시 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 12:7 여호와여 저희를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영토록 보존하시리이다
시 12:8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도다

4. 개인 확신시

궁켈인 “청취 확신”(the certainty of a hearing)이라고 일컬었던 탄식시의한 부분이 시편 기자가 처한 곤경과는 거의 관계없이 어느 한 시편 전체의 내용이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야웨로부터 오는 구원을 예기하며 그것을 확신에 찬어조로 선포하기 때문에 이것들은 종종 “신뢰시”(trust psalms)라고 불려진다.

해당시편: 4; 11; 16; 23; 27; 62; 121; 131

시편 11편<구조>

1a절 하나님에 대한 신뢰
1b-3절 거짓 친구들의 충고
4-6절 주님을 신뢰하게 된 동기
7절 야웨를 찬양함(신뢰 및 의지)

시 11: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시 11:2 악인이 활을 당기고 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
시 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시 11: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시 11: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강포함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미워하시도다
시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시 11: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뵈오리로다

5. 공동체 확신시

개인의 탄식시에 상응하는 공동체 확신시가 있다.

해당 시편: 115; 125; 129

시편 125편

<구조>

1-3절 야웨에 대한 확신(신뢰)
4-5절 의인을 향한 구원 요청

시 125:1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같도다
시 125: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시 125:3 악인의 권세가 의인의 업에 미치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으로 죄악에손을 대지 않게 함이로다
시 125:4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시 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II. 찬양 및 감사 장르

1. 찬양시 혹은 선언적 찬양시

1)하나님 찬양시 또는 찬미시는 신의 위엄을 기리거나 찬양하라는 말로 시작되고끝맺는다. 찬양시의 중심부에서는 자연과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야웨의속성과 행위가 묘사된다. 찬양시와 감사시는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차이점이 있다. 찬양시가 하나님의 선하신 권능의 보편성과 지속성이라는 측면을노래하는 반면, 감사시는 특정한 고통으로부터 최근에 구원받은 것에 관해 말한다.

2)”찬양”이 찬양시와 감사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담론(discourse)임을강조하기 위해 베스터만(C. Westermann)은 찬양시를 “서술적 찬양시”(descriptivepraise; 하나님을 그의 존재와 그의 활동 전체로 찬양하는 시 형태)로, 감사시를”선언적 찬양시”(declarative praises; 하나님의 백성과 개인을 위한 그의 구원활동을 찬양하는 시 형태)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기타 찬양시들은 전쟁 후에낭송하기 위한 “승리 찬양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배자들을 위한 “순례자의노래”, 그리고 해방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어느 “정규 축제”와 연관된 것으로사료되는 찬양시로 분류된다.

3)찬양시의 구조(Anderson, 121-122)

A. “찬양하라”는 부름(요구)
B. 찬양해야 할 이유(동기)
C. 회상(송영 및 고백)

해당 시편: 8; 19:1-6; 29; 33; 95:1-7; 98; 100; 103; 104; 111; 113; 114;117; 135; 145; 146; 147; 148; 149; 150

시편 8편

<구조>

1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
2절 원수를 잠잠케 하신 하나님
3-8절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
9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

시 8: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시 8: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내가 보오니
시 8: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 8: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시 8: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
시 8: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것이니이다
시 8: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1-1. 시온 찬양시

어떤 찬양시들은 야웨에게 질 수밖에 없는 원수들이 공격하거나 위협하는,그러나 난공불락인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성에 거하시는 분으로 야웨를 묘사한다.궁켈은 이러한 찬양시들을 장차 올 구원의 날에 대한 종말론적 언급으로 간주하였다.모빙켈은 이 제의적 드라마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은 공동체의 토대에 대한 야웨의현재적 재보증이라고 보았다. 두 학자 모두는 이러한 시온 찬양시들이 난공불락의거룩한 산을 신의 보좌로 보는 고대 가나안의 신화에 나타나는 주제들과 일치한다고보았다.

해당시편: 46; 48; 76; 84; 87; 122

시편 46편

<구조>

1-3절 창조주 야웨에 대한 찬양
4-7절 예루살렘에 대한 찬양
8-11절 하나님에 대한 찬양

시 46: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 46: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시 46:3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시 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 46:5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 46:6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녹았도다
시 46: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46:8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찌어다 땅을 황무케 하셨도다
시 46:9 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불사르시는 도다
시 46: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 46: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리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피난처시로다

1-2. 야웨의 왕권 축하 찬양시

약간의 찬양시들은 야웨 하나님의 만국통치를 주장하고, “야웨께서 왕위에오르셨다!”는 제의적 외침을 포함하고 잇다. 모빙켈에 의하면 이러한 “희망”의찬양시는 제의현장에서 경험되어지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주로 가을 신년축제에서 연출되었다.

해당 시편: 47; 93 : 96 ; 97 ; 99

시편 47편

<구조>

1-4절 박수치며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
5-6절 나팔소리와 함께 등극하시는 하나님
7-9절 열방의 왕이신 하나님 찬양

시 47:1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시 47:2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시 47:3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
시 47:4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시 47:5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중에 올라가시도다
시 47:6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시 47:7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시 47:8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 47:9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2. 익명의 개인 감사시 또는 선언적 찬양시

이 장르의 구조에는 감사드리라는 초청, 과거의 고난에 대한 설명, 야웨께서고통 당하는 자를 구하셨다는 선언, 그리고 때로는 맹세의 표시로 희생제를드리겠다는 성명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일반 찬양시의 축복과 찬양 요소들이포함될 수도 있다. 감사시가 낭송된 개인 감사제에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보다큰 회중이 참여하였다.

해당시편: 30; 32; 34; 41; 52; 66; 92; 116

시편 52편

<구조>

제목 에돔인 도엑에 대한 소개
1-5절 거짓말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6-9절 정직한 사람의 하나님 신뢰

[다윗의 마스길(wisdom words),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시 52:1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시 52: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 도다
시 52: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시 52:4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 도다
시 52:5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뽑아 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
시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시 52:7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이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 52:8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시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3. 제왕 감사시 또는 선언적 찬양시

제왕감사시 혹은 선언적 찬양시는 특정한 적의 이름을 보여주지 않고 “원수”혹은 “열방”등의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느 왕이든 군사적 승리를거둔 후에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 같다. 한 공동체의 감사시에서 왕이개인적 감사를 드린다(시 118:5-21).

해당 시편 : 18(=삼하 22장)

시편 118:5-21

<구조>

5-9절 피난처 되신 야웨
10-16절 열방의 포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
17-18절 병고침을 받은 것에 대한 감사
19-21절 구원주 야웨께 감사

시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답하시고 나를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시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내게 어찌할꼬
시 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 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시 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시 118:10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 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끊으리로다
시 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시 118:13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시 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시 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권능을 베푸시며
시 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시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시 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다.
시 118:19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시 118:20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시 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4. 공동체 감사시 또는 선언적 찬양시

공동체의 고난이 극복되었을 때, 공식적인 감사절이 지켜졌는데, 이 때 공동체감사시가 낭독되었고, 아울러 개인 감사시가 낭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큰데,이는 민족적 축제에 어울리는 양상이었을 것이다.

해당시편: 65; 67; 107; 118; 124; 136

시편 67편

<구조>

1-2절 하나님의 길을 만방에 알리도록 청원함
3-5절 민족들이 야웨를 찬양하게 함
6-7절 복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

시 67:1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비취사(셀라)
시 67:2 주의 도를 땅 위에,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시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하소서
시 67:4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시 67:5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하소서
시 67:6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주시리로다
시 67:7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III. 구연과 연출 장르

궁켈이 말하는 몇몇 소수 장르들과 일부 제왕시들이 제의행위를 서술하거나묘사하는 유형의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이러한 시들의 유형을 자세하게 분류하기는어렵지만 대체로 다음 유형들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1. 제왕 의식시

이러한 시들 가운데 몇 몇은 왕의 ‘대관식’이나 연례적으로 왕의 즉위를축하하는 경축행사와 관련되어 있다. 백성(흑은 그들의 대표자)과 하나님이왕을 3인칭으로 말하는 것이 이 시들의 특징이다. 시전 45편은 왕의 “축혼가”(marriagesong)이고 시편 101편은 야웨와 공동체에 충성을 다짐하는 “제왕 맹세시”인데,아마도 즉위 시에 사용한 서약일 것이다.

해당시편: 2; 20; 21: 45; 72; 101; 110; 132:11-18

시편 20편

<구조>

1-2절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한 왕에 대한 소개
3-6절 제물에 대한 축복과 하나님의 응답을 위한기도
7-9절 왕의 승리에 대한 제사장의 확신

시 20:1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너를 높이 드시며
시 20:2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시 20:3 네 모든 소제를 기억하시며 네 번제를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셀라)
시 20:4 네 마음의 소원대로 허락하시고 네 모든 도모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 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시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응락하시리로다
시 20:7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자랑하리로다
시 20:8 저희는 굽어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
시 20:9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부를 때에 왕은 응락하소서

2. 입례와 행렬 의식시

시편 15편과 24편은 야웨의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자격에 관한 물음과응답을 내포하고 있는데, 아마 성전에 다가오는 예배자들과 성전 경내에서 응답하는제사장들 사이에서 암송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네 편의 시들은 그것들을지은 목적이 예배식 행렬 중에 부르기 위한 것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해당시편: 15; 24; 68; 118; 132

시편 15 편

<구조>

1절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 소개
2-5a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세
5b 성전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한 축복

시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시 15: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시 15:4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훼방치 아니하며
시 15:4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시 15:5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

3. 심판 또는 권고 예언 신탁

예언적 담화의 구조와 관용구로 표현된 비난 또는 질책이 몇몇 시편들에서뚜렷하게 나타난다. 궁켈은 이 시편들이 예언자적 이상에 영향을 받은 비제의적텍스트들이라고 추정하는 반면에, 모빙켈은 제의 예언자들이 의식의 정규 순서로회중에게 선포하며 직접 인용하였던 “의식시”(Liturgies)로 간주하였다.

해당시편: 14; 50; 53; 75; 81; 95:7d-11

시편 14편

<구조>

1절 서론(어리석은 자에 대한 비난)
2-3절 부패한 세상에 대한 비판
4-6절 죄악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심판
7절 구원처가 되는 시온(하나님에 대한 찬양)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 즉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하나도 없도다
시 14:4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시 14:5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계심이로다
시 14:6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되시도다
시 14:7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 이 기뻐하리로다

4. 축복시

축복시는 때때로 찬양시와 감사시에서 나타난다. 이 외에도 전적으로 축복으로만이루어진 시들이 있고, 시편 134편의 경우에는 성전 근무 제사장들이 야웨를찬양하라고 외치는 호소문 뒤에 예배자에 대한 축복이 첨부되어 있다.

해당시편: 128; 133; 134

시편 134편

<구조>

1-2절 야웨에 대한 찬양
3절 창조주 야웨의 축복

시 134:1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2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 지어다

IV. 교훈과 명상 장르

1. 지혜시와 율법시

시편 가운데 지혜문서의 일반적 특징들을 보여주는 시들이 상당수 있다 그특징들이란 (1)”지혜”, “야웨 경외”, 수신자 호칭으로서의 “아들”과 같은 핵심어들,
(2)질의응답 기법, 숫자를 사용한 말들, 지복(至福)선언(“…한 사람은 복되어라”)과같은 수사학적 장치들,
(3)단호한 어조의 가르침과 경고
(4)부당한 고통, 악한 부자, 경건한 자에 대한 신의 인도와 보호, 생명에이르는 순종과 죽음에 이르는 불순종의 두 길에 대한 집중적 관심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시들 가운데 시편 1편과 19편 7-14절 및 119편은 율법을지혜의 구현 자체로 보고 있으며, 성실한 율법준수를 지혜로운 생각과 행위의본질로 아낌없이 찬양하고 있다(시편 37편과 112편은 동일한 등식을 보다 암시적으로표현한다). 이러한 시들은 모두 분위기가 반성적이고 교훈적이며(reflexiveand didactive), 특히 “율법시”는 텍스트에 대한 집중적인 학습과 명상을 전제로한다(여기에서 텍스트란, 정경으로 인정된 토라와 기타 문서들은 물론이고,시편 자체도 포함한 것이다).

또한 다른 장르들에 속하는 시편 속에도 지혜 요소들이 널리 산재되어 있다는것은 매우 인상적이다(예: 32:1-2; 6-7, 10; 34:11-22; 36:1-4; 78:1-4; 90:3-12;92:5-15; 94:8-15; 111:10). 이제까지 주석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비제의적 합성물로간주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러한 시들의 작가들인 “현인들”이 제의 예배에의참여에 무관심하였거나 반대하였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된다.

시편 1편

<구조>

1-3절 의로운 자(복이 있는 자)의 길
4-5절 악인의 길
6절 결론

시 1:1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못하리로다
시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2. 역사시

세 편의 장시(長時)들은 하나님이 현재 북왕국을 제외하고 유다만을 당면과제로취급하는 것에 대한 확신과 권고와 정당화를 꾀하기 위해 이스라엘 초기 역사의여러 국면들을 고찰한다. 시편 78편은 지혜 교훈으로 소개되고, 반면에 역사시형태의 다른 두 편은 찬양시로 간주된다.

해당시편: 78; 105; 106

시편 78편 1-17절(비교. 신 32장)

<구조>

1-11절 율법을 거역한 이스라엘(지혜문학 영향)
12-16절 하나님의 구원역사(출애굽 사건)

시 78:1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시 78:2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시 78:3 이는 우리가 들은 바요 아는 바요 우리 열조가 우리에게 전한 바라
시 78:4 우리가 이를 그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 능력과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 78: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우리 열조에게 명하사 저희 자손에게 알게 하라 하셨으니
시 78:6 이는 저희로 후대 곧 후생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그 자손에게 일러서
시 78:7 저희로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아니하고오직 그 계명을 지켜서
시 78:8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시 78:9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시 78:10 저희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 율법 준행하기를 거절하며
시 78:11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를 잊었도다
시 78:12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을 저희 열조의목전에서 행하셨으되
시 78:13 저가 바다를 갈라 물을 무더기 같이 서게 하시고 저희로 지나게하셨으며
시 78:14 낮에는 구름으로 온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셨으며
시 78:15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 같이 저희에게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시 78:16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 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시 78:17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

신명기 32장 1-16절

신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신 32:2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 비로다
신 32: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돌릴지어다
신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
신 32:5 그들이 여호와를 향하여 악을 행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흠이있는 사곡한 종류로다
신 32:6 우매무지한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너를 얻으신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너를 지으시고 세우셨도다
신 32:7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신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열국의 기업을 주실 때 인종을 분정하실 때에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민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신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
신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신 32: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신 32: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 32:13 여호와께서 그로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신 32:14 소의 젖 기름과 양의 젖과 어린양의 기름과 바산 소산의 수양과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우셨도다
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출처 : 박종수 교수 홈페이지시편연구시편의 문학장르

시편의 케리그마

<![CDATA[

출처 : 숨쉬는 사람마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1강 시편의 케리그마 – 시편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김이곤 교수(한신대/구약학)

Ⅰ. 문제제기와 방향        

시편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 많은 호기심으로 둘러싸여 있다. 왜냐하면, 시편은 심오한 신앙생활의 경건성을 자극, 충동하여 우리의 경건 전통을 매우 예리하게 조율(調律)해 주는 기능과 특성을 가진 책으로서, 그 어떠한 학문적 연구에 의하여서도 이러한 시편의 전통이 헝쿨어지지는 않는 영원한 경전적 가치를 가진 책으로 인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또한 경건 전통의 순진무구(純眞無垢)함을 넘어가는, 이른바, 철저한 비평학적 분석을 통하여 해석되어야 하는 책으로서, 단순한 신앙적 통찰과 시적(詩的) 영감에만 맡겨 둘 수 없는 학구적 연구를 요청하는 책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월터 부르그만(W.Brueggemann)이 적절하게 지적해 준대로, 시편은 경전의 그 어느 책보다 더, 비평학 이전적(pre-critical)해석1)과 비평학 이후적(post-critical)해석 “모두”를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요청하는 책이다.2) 즉 시편은, 실제로, 그 어떠한 비평학적 분석에 의해서도 결코 동요하지 않는 케리그마적(복음 선포적)해석을 해 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비평학도 시편이 지닌 “영성”(spirituality)을 삭감시킬 수 없는, 이른바, “성서 속의 성서”(M. Luther)요 “영혼의 해부학”(J. Calvin)이며, 또한, “축소판 성서신학”(a biblical theology in miniature)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책이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3)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시편연구는 시편해석사 전반(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현대의 역사비평학자들과 신문학비평학자들의 공시적[synchronic]해석에 이르는 해석사 전반)을 향하여 과감히 자신을 열어 놓는 성서연구여야 한다고 하겠다. 우리에게 “해석사 전반”을 문제삼으라고 요청한 우리 시대의 대표적 성서학자는 브레버드 S. 차일즈(Brevard S. Childs)이다. 그에 의하면4), 해석사 전반에 관한 진지한 고려는 성서 본문을 설명만 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성서 본문의 내용과 진지하게 씨름하도록 요구하여 감히 교회로부터도 신학적 충동을 이끌어내며 마침내는 흔히 “매혹적 성서해석법으로 간주되어 온 알레고리의 유혹”도 능히 지양할 수 있는, 이른바, “필요충족한 기독교 신학”(a fully developed Christian theology)의 입장에 서서 성서를 읽게 하고 또 해석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편 연구의 경우, “해석사 전반의 요청”이란, 일종, 절대적 요청에 가깝다. 즉 시편은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히브리 종교, 유대교, 기독교의 예배의전, 기도, 찬송, 교훈 등이 모두 그것에 기초를 두었던 책이란 점에서 그렇다. 시편 해석의 역사는 18세기 이전의 비평학 이전을 비롯하여 18세기로부터 20세기 초 헤르만·궁켈(Hermann Gunkel)의 양식사적 비평학 이전과 그리고 그 이후로 크게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5)

18세기 이전의 비평학 이전적(Pre-critical) 시편해석은 문자적 응용, 그리스도론적 유형론, 알레고리적 해석 등으로 성격지을 수 있으며, 그것은 주관적인 영적 통찰력에 주로 의존하였으며,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편시의 문학적 특징을 고려하는 연구가 시작되었다(Cf. J.G. von Herder 의 Vom Geist der hebräischen Poesi, 1783과 R.Lowth의 De Sacra Poesi Hebraeorum, 1753). 그러나, 다윈·헤겔의 역사주의적 철학원리에 영향받은 율리우스·벨하우젠(J.Wellhausen)의 종교사학적 시편 연구는, 오경 연구에서처럼, 시편시들의 저작자를 규명하는 문제와 각 시편 시들의 연대를 결정하는 문제(B.Duhm; C.A. Briggs, et al)에 집중하였다.6)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비록 시편 시들의 사상들을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7)에 의하여 주관적인 판단을 함으로서 시편의 저자에 대한 전통적 견해가 갖고 있는 결정적 오류(시편에 나타나는 “다윗의 시” 모두를 다윗의 저작으로 보는 견해)를 바로 잡기는 하였어도, 그러나, 시편시들의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데에는 결정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역시, 시편연구의 결정적인 이정표(里程標)를 세운 학자는 헤르만 궁켈(H.Gunkel, 1862-1932)이었다. 그의 시편 연구 방법론인, 이른바, 시편시들의 유형사(history of types) 연구는 시편시들이란 그들의 제의적(祭儀的) “삶의 자리” (Sitz-im-Leben; life-setting)에 따라 자신의 문학적 장르(genre)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시편시의 형성 현실을 규명해 내는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즉 시편시들은 그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예배환경 – 제의 환경 – 에서 형성, 발전되었다는 것이다.8) 그의 동시대의 시편 연구가인 모빙켈(Sigmund Mowinckel)도 또한 동일한 입장을 취하였으나, 예배의식(제의)적 배경을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제의사적 연구”에로 치우쳐 버렸다.9)이 방향으로 시편연구를 심화하여 간, 후크(S.H.Hooke)와 엥그넬(I. Engnell)의 제의 의식 편향적 연구는 그러나, 구미 신학계로부터 집중적인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궁켈의 시편연구는 자기 이후의 시편연구 방법론들을 비평학 이전의 모든 시편주석방법으로부터 현대 성서비평학적, 학문적 연구에로 근본적인 전환을 하게 만들기는 하였어도, 비평학적 주석과 교회의 실제적 신앙 사이의 갭(gap)을 매꾸라는 신학적 요구를 충족시키지는 못하였다. 즉 궁켈의 양식분류방법이 지닌 취약점을 지적하고 또 세미한 개정을 하는데 까지는 갔다고 하여도,10) 폰 라트(G. von Rad)조차도 그의 “응답의 신학” (Israel before Yahweh: Israel’s answer)11)을 통하여 비록 하나님과 이스라엘(인간) 사이의 “대화문학”(a dialogical literature)을 기초한 대화신학 같은 것을 제안하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 “대화의 원리”가 무엇인지는 결코 밝히지 못하였다.

더욱이 베스터만(C. Westermann)의 탁월한 시편연구는, 매우 흥미롭고도 또 주목할만 하게도, 시행착오적인 시편신학을 내어놓기까지 하였다!! 그의 본격적인 시편 연구서는 1961년 「시편의 하나님 찬양」(Das Loben Gottes in den Psalmen, 이 책의 영역본, The Praise of God in the Psalms은 1965년에 출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났으나, 그러나, 그는 여기서 “탄원시”를 포함한 시편시의 모든 양식을 “하나님의 찬양”으로 일원화하는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그 책이 출간된지 16년이 지난 뒤, 1977년에 그는 “하나님 찬양”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탄식”을 비롯한 인간고에 관한 제(諸) 탄식이 지닌 신학적 의의와 그 의미를 발견12)하고는 「시편의 찬양과 탄식」(Lob und Klage in den Psalmen, 이 책의 영역본 Praise and Lament in the Psalms는 1981년에 출간)이라는 제목의 개정판을 내어놓기에 이르렀던 것이다.13) 이것은 제 3 세계 신학의 의의에 대한  발견과 제 1 세계 신학의 신학적 자기반성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궁켈 이후의 “시편신학”이 가야할 방향에 대한 서구 신학의 시행착오적 모순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궁켈 이후의 시편신학의 과제는 “궁켈의 접근방식에 신학적 해석을 첨부하는 방식”이14)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신학적 해석이 중심적으로 첨가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즉 앞으로의 시편 해석학의 과제는, “부르그만”(W. Brueggemann)이 적절히 지적하였듯이,15) 모빙켈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다원적(pluralistic)이고 다양한(diversified)것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베스터만(C.Westermann)의 참회적 반성과 이에 대한 부르그만(W.Brueggemann )의 적절한 반응에 의하면, 이미 폰 라트(G. von Rad)가 오래 전에 불완전하게나마 예시한 데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 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대화적 언어교류(a dialogically verbal exchange between God and humanity)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제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16) 이러한 경우, “탄원시” 연구가 그 출발점이 될 것으로 보이고 그 구성 골격은 하나님의 역사적 행위(Actio Dei)에 대한 시인(詩人: “나” 또는 “우리”)의 (a)신학적 응답 (하나님을 향한 탄원), (b)심리적, 인간학적 응답 (시인 자신의 고난에 대한 탄원), 그리고 (c)사회적 응답 (원수에 대한 탄원)을 중심할 것이다.17) 좀 더 간결한 도식은, 부르그만(Brueggemann)이 제안한 것과 같이,18) (a)하나님의 축복을 보장받은 만족스러운 인간 삶의 응답으로서 “방향제시” (orientation; 기쁨, 즐거움, 아름다움[선함], 하나님의 신실함심,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통치법의 노래) → <권리 상실의 고통이 주는 충격> → (b)”방향감각상실” (disorientation: 혼돈과 질곡의 노래) → <탄원 … 놀람, 그리고 희망과 구원 희구의 절규에 의한 충격) → (c)”새로운 방향제시” (new orientation: 놀라운 새 삶을 경험한 감격의 노래) … <찬양과 감사의 노래>라는 (a)→< >→ (b)→< >→(c) … < >의 구조를 띨 수 있을 것이다.

II. 시편의 케리그마 발굴 작업들  

이상의 개괄적 관찰을 기초로 하여, 시편시들이 담고 있는 케리그마를 찾아내는 다음의 여러 다양한 길들을 따라가면서 시편 신학 수립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이 작업의 본론에 해당된다.

1. 시편의 저작 동기를 묻는 일  

시편해석의 근본 목적은 그 시편 시들이 어떤 “동기”로 노래 불리워지게 되었고 그리고 그 노래들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예배 환경 속에서 어떤 용도로 사용 되었으며, 또 그 노래가 그 예배 공동체에게 무엇을 전하고 무엇을 공유할려고 하였는지를 밝혀 내는데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시편시들은 저작자들이 하였는지를 밝혀 내는데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시편시들은 저작자들의 시적 감정을 서정적(抒情的)으로 표현, 묘사하려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저작자들이 그들의 신앙 환경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과 대화한 것을 노래로서 표현하고 또한 그것을 예배 공동체(제의[祭儀] 공동체)에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나누어 공유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지고 모여지고 보존된 것이기 때문이다.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길이 열리자 시편 연구가들은 우선 히브리시들의 정신 세계가 무엇이고 그 히브리시들의 문학 현실이 무엇인지를 먼저 묻기 시작하였다.

그렇게하여 나타난 첫 학문적 연구의 모습은 시편시의 문학적 특징을 살피는 일이었다. 로버트·로우드(Robert Lowth)의 “히브리시의 평행법”(De Sacra Poesi Hebraeorum, 1753)에 관한 연구는 가장 초기의 학문적 시편 연구의 모습이었다.19) 이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것은, 시편의 히브리시들이 가진 독특한 특징인데, 그것에 의하면, 히브리시들은 구절체들이 둘 또는 셋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 구절체들 사이에서는 마치 그네가 흔들리는 것 같은 반복 평행의 진동(振動)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 점은, 놀라웁게도, 시편시들의 케리그마를 발견해 내는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그러면서도 매우 중요한 한 도구를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즉 시편시들은 반복어법적 평행법을 통하여 스스로 그 읽는 자들에게 해석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본문 해석의 궤도 이탈을 방지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 산문체로된 기타 다른 성서 본문보다는 시편 본문이 케리그마 발굴을 더욱 용이하게 하고 동시]]

>

잭 웰치의 경영 비법



잭 웰치의 경영 비법되시겠다. 제네럴 일렉트릭(GE)의 CEO이며,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운답니다.

줄여봅시다

잭 웰치의 경영 비법
·10% 실적 미달성자들을 위해 사서 고생 말라
·협상할 때는 자신의 카드를 전부 꺼내고 시작하라
·젊을 때 찾아오는 위기는 두려워 말고, 즐겨라
·경제 잡지는 비즈니스에서 언어와도 같은 존재다
·모두가 어느정도의 급여를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의사결정 땐 생각은 길게 하고 관리는 짧게 하라
·기업은 가치가 있어야, 도덕성을 실추시키지 말라
·리더십을 키우려면 대중 연설을 많이 하라

-당신의 책을 보면 슬로언경영대학원에서 쓰는 경영 교재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슬로언경영대학원의 교재에서는 whatto do strategy, analysis, mechanism, system 을 중요시 하는데비해, 잭 웰치는 에서 howto make it, connected to people를 강조했던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GE같은 큰 회사를 운영하게 되면 CEO가 모든 직원들의 업무를 전부 파악할 수 없다. 큰 회사일수록 그런것보다는 사람을관리하는 게중요하게 된다. 인재는 CEO가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전세계에 있는 종업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효율적으로 일할수 있도록 하는것이 CEO의 역할이다. 물론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에 대한 평가 방식이 중요하다. 하지만상당수 사람들이 평가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나, 실제로 (인력 평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뛰어난 사람을 찾아서최상의 팀을 꾸린 후 새로운 일을 그들에게 줘서 즐겁게 일을 하고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CEO가 할일이다.

– CEO가 되기를 원하는 비즈니스 스쿨의 학생들이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지금 CEO가 되고자 하는 자신이 전세계의 뛰어난 인재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정확한평가를 내리고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그러기위해선 생각한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고, 일과 사람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런인간적인요소가 충분히 갖춰져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 GE가 택한 혁신적인 급여 체계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급 여, 보상 등은 회사와 종업원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급여를 책정하는 기준을 선정하는 것은매우어렵다. GE 같은 경우 얼마나 자신의 직무를 잘 수행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의 예년 실적을 토대로 급여를 책정한다.예산에의해서 급여의 상한선을 제한하여 놓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급여, 보상 등의 지급은 투명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모두가어느정도의 급여와 상여를 받는지 알아야 한다.

– 당신은 상위 20%는 인상을, 중위 70%와는 협상을, 하위 10%는 회사를 떠나라고 통고했다. 혹시 이로 인해 발생했던 부작용은 없었나.

모든 시스템이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직에서 일할 때 구성원들에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의무가 있다. 그건 남들처럼열심히일하고 남들만큼의 성과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츠 경기를 보면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이 (아무리 슬럼프에빠져도)매년 어느 정도 수준의 성적은 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회사 역시 마찬가지다. 조직의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필요없는 직원은)과감히 자를 수 있어야 한다. 10%를 차지하는 실적 미달성자의 실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서 고생하지 말라는얘기다. 그리고 상위20%의 급여를 인상해 줄 때는 객관적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근거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투명성이 훼손되어선 안 된다.

– 중위 70%와 협상할 때는 어떻게 임했나.

협상을 할 때는 테이블에앉는 순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전부 말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협상이 한결 빨리 끝나게된다. 자기가 갖고 있는 카드를협상 테이블에 전부 올려놓음으로써 상대방을 완전히 무장해제 시킬 수 있어야 한다.

– 기업의 CEO로서 중요한 의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시간 배분은 어떻게 했나.

아마도 가장 골똘히 생각하는 부분 중 하나가 그것일 것이다. ‘5년이나 10년 후에 (지금 추진하는 일들이) 어떤모습일까’를예측하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생각은 길게 하고 관리는 짧게 하라는 다소 모순되는 원칙이 바로 리더가 가져야할덕목이다. 이런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리더가 필요한 것이다. 미래의 일을 예측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정기적으로 오랜시간을 가지고 고민한다. 때로는 회의를 통해 아이디어를 수집하기도 했다.

– CEO 재임 시 당신의 역할모델이 있었나?

(역 할모델이 있었다기보다는) 멘토들이 많았다. (지금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학교를 떠난 후 지금 여러분 주변에 있는모든사람들이 멘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부하나 후배가 멘토가 될 수도 있다.

– 당신의 경험담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가 처음 CEO가 되었을 때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CFO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가 열정적으로 일하는모습과회사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은 당시 나로선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포천 지와 같은 경제잡지도 좋은 멘토가 될 수 있다.경제지는비즈니스에 있어 언어와도 같다. 이런 매체를 통해 다양한 상황 케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고, (내가 현재처한) 상황을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른 유사한 사례들을 통해 비즈니스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빠르게변하고 있다.형식에 구애받기 보다는 성과를 향한 빠른 실천이 중요하다.

– 기업 내 팀장급의 젊은 매니저가 위기의 상황을 맞았다. 어떻게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지 조언해 달라.

당 신이 젊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리스크에 부딪치라고 말할 거다. 위기라는건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 나중을 위해서도 리스크에 많이 도전해 보고, 실수도 많이 해봐야 하는 것이다. 위기를 즐길 수있어야한다는 얘기다. 무엇이 두려워서 주저한단 말인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하고, 즐겨라.

– 요새 일주일 단위로 업무 평가를 하고, 주급을 주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일이 성과로 나타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일하는사람 스스로잘 생각하고, 결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Work flexibility(업무 유연성)를 예로 들어보자. 이는 회사매뉴얼이나브로셔에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자기가 일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경영자가) ‘일에 유연성을가미하고 싶으면,그 유연성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논리를 펼 수도 있지만, 이건 아니다. 결국일이란 것은 성과에따라 평가되는 것이다. 추후 성과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으면 된다.

– 기업 윤리가 도마 위에 올랐다. 어떻게 하면 기업의 도덕성이 향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기업이란 것은 가치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아더 앤더슨과 엘런 같은 대기업들이 도덕성을 잃어버렸을 때 그 기업의 가치가현격히떨어지는 모습을 보았다. CEO들은 기업 가치가 상실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기업의가치가 토대가 되어 기업 문화가 자리잡아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당신은 어떻게 CEO가 될 수 있었나.

레그 존스 전임 회장은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회사를 성장시킨 주역 중 한 명이지만 회사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선변화가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회사 분위기를 혁신하기 위해 선택한 사람이 당시 45살이던 나였다. 그로서는 큰결단이었다.

– 세계적으로 중국, 인도 등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미국 경제, 특히 제조업의 미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미국의 제조업은 꾸준히 하락세에 놓여져 있다. 이젠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산업발달에 힘써야 할 때이다. 어느 나라나 만들 수 있는 평범한 제품을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 리더십도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나.

물론이 다. 유전적으로 리더십이 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리더십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신감이 있다면 누구나 발휘할 수있는것이다. 때문에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선 자신감을 기르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 건 자신감을키우는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나 역시 큰 도움이 됐다. 수백 번도 더 연설을 했던 것 같다.

– 당신은 리더십이 뛰어난 CEO로 평가받는다. 리더십을 기를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나.

내가 CEO에 올라서고, 전임 회장이 어딘가로 떠나버렸다. 갑자기 나에게 많은 일이 주어지게 됐다. 어쩔 수 없이 많은일을 하게됐고, 이런 저런 일들을 수행해 가면서 자연스레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런 게 바탕이 되어 리더십을 기를 수있었던 것같다.

– 능력 있는 사람이 승진을 못 했을 때 당신은 어떻게 위로해 주나.

난 직접 그에게 전화를 하고 찾아가서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만약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승진한 이유를 알고 있다면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가장 좋다.

– 당신은 그 동안 많은 것들을 일궈낸 성공한 CEO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여성이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살았던 시대에는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점이 지금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지금 보면(CEO는아니더라도)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나보다 훌륭한 여성CEO들도많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출처 : <Economic Review>

줄여봅시다

젊을 때 찾아오는 위기는 두려워 말고, 즐겨라는 말이 어쩐지 제게 하는말 같아서 공감이 갔습니다. 웬지 나이 들어서 이 자리를 빼앗기면 어쩌나하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처럼 계산적인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위험부담은 없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거든요. 물론 위기가 닥쳐오면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은 합니다만, 쉽지가 않습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리스크에 부딪히라는 그의 말은 제게 어떤 제게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잭 웰치가 대답한 그가 CEO가 된 경위(?)에 대한 답변도 참 마음에 듭니다. 보수적인 전임 회장이 자신의 보수적인 성향을 바꾸기보다는 그 자리에 걸맞는 잭 웰치를 후임자로 정했다는 것에서 전 회장의 그 회사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기도하고, 소속된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되어지도 합니다. 상반된 모습으로 어떤 경영자들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불법도 서슴지 않는 그들이 있지요.

마지막으로 여성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 중에서 자신의 살았던 시대에는 불가능하지만 현 세대에서는 가능하다는 말에 대한 것인데, 아직도 수 많은 곳에서 여성을 자신의 우위에 두지 않으려는 남성들의 생각을 조금 더 개선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는 꽤나 개방적인데, 사실 능력에 따라 사람이 사람의 상관인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성을 상급자로 둔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더 키워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뭐.. 이것도 적지 않이 남성우월성향의 발언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광고와 홍보의 관계

광고와 홍보는 기업이나 제품이 외부(공중1)에 알려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기업이나 제품에 대한 알리는 데 필요한 비용의 지불 여부와 알리는 행위를 하는 주체를 통해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기업에서 기업이나 제품에 대해 매체에 알리는 행위들은 광고에 해당한다. 홍보는 알리는 주체가 달라지는데, 신문, 방송, 인터넷 매체, 교육기관 등에서 특정 기업이나 제품을 알리는 목적이 아닌 그들이 목적하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업에게 요청하는 자료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다. 홍보효과를 위해 기업은 홈페이지 등에 자사에 대한 정보 또는 관련 자료들을 정보로 제공한다.

참고한 글 ::

홍보(Publicity)는 기업, 정부, 단체, 조합, 정당 등이 언론사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한 보도를 하게끔 보도자료 및 기타 편의를 제공하는 활동이다.

광고와 달리 판매가 아닌 정보제공이나 교육이 목적을 이루고, 기사화됨으로써 매체의 일부를 무료로 사용하는 것이고, 기사화되는내용을 홍보 주체가 직접 통제할 수 없고, 그 내용이 기사화 됐을 때 독자나 시청자는 홍보 주체를 확인할 수 없다.

출처 : 네이버 용어사전

퍼블리시티[publicity]
신문 ·잡지 등의 기사나 라디오 ·방송 등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광고 ·선전하는 것을 말한다. 광고는 광고주가 매체를 통하여 자기의 기업이나 신제품에 대하여 유료로 광고 ·선전하는 방법인 데 비하여, 퍼블리시티는 광고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무료로 매체측의 계획에 의하여 내용의 표현 등이 자유롭게 기사화되는 선전 방법이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광고를 광고하는 것, 바로 광고의 퍼블리시티 전략입니다. 광고가 방영되기도 전에 광고가 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써 시청자,소비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이죠.

출처 : <20> 북한 무용수 조명애 효과는?

광고의 기본개념-1
광고의 기본개념-2
저작권… 그런데 퍼블리시티권은?

  1. 공중 : 기업목적 달성을 위해 실질적 또는 잠재적으로 이해관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는 집단을 말한다.이것은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나 분야에 따라 금융공중(financial publics), 매체공중(media publics),정부공중(government publics), 시민운동공중(citizen action publics), 지역공중(loclapublics), 일반공중(general publics), 내부공중(internal publics)으로 분류될 수 있다.[]

디마케팅(Demarketing)

기업이 일정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마케팅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이것은 목적에 따라 공익을 목적의 디마케팅, 수급조절을 위한 디마케팅, 이미지 향상을 위한 디마케팅, 규제회피를 위한 디마케팅, 수익제고를 위한 디마케팅의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적인 마케팅의 의도와 달리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억제되도록 만들기도 한다.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법력 아래 경영이 이루어지는 곤란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제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소비자의 수요가 공급보다 많은 경우의 초과수요 상태를 말하며, 여름철 피서지 인파와 같이 갑자기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일시적 마케팅활동이나 현상을 의미한다. 마케팅 관리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촉진활동의 축소나 가격인상, 모델 변경 등으로 일시적 도는 영구적으로 수요를 저지하는 마케팅활동을 펼칠 수 있다.
출처 : 마케팅, 하대용, (서울 : 貿易經營社, 2006), p. 20.

기업들이 소비자에게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들의 상품을 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모두 디마케팅이다. 될 수 있으면 많이 사도록소비자를 유도해야 하는 것이 기업인데 오히려 사지 말라고 하다니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기업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이런 마케팅을 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의도하는 바가 있다.

출처 : 한국 네슬레가 디마케팅(Demarketing)에 실패한 이유에서 재인용

기업들이 자사의 상품을 많이 판매하기보다는 오히려 고객들의 구매를 의도적으로 줄임으로써 적절한 수요를 창출하고, 장기적으로는 수익의 극대화를 꾀하는 마케팅전략이다. 수요를 줄인다는 점에서 이윤의 극대화를 꾀하는 기업의 목적에 어긋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흡연은 폐암 등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된다’, ‘지나친 음주는 간경화나 간암을 일으킨다’와 같은 담배·술의 경고문구 등이 바로 디마케팅 기법에 해당하는데, 소비자보호나 환경보호 등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함으로써 기업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려 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고객을 밀어내는 마케팅, 즉 돈이 안 되는 고객과는 거래를 끊고 우량고객에게 차별화된 서비스를 제공해 인력과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은 극대화하려는 모든 유형의 마케팅 기법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① 금융기관이 거래실적이 별로 없는 휴면계좌를 정리하거나 채무 규모가 적정 수준을 넘은 고객의 거래 및 대출한도를 제한하는 마케팅 ② 온라인 게임업체가 청소년 회원에게 부모의 동의를 얻은 시간에만 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③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가 유료 회원제로 전환하거나 휴면계정을 삭제하는 경우 ④ 백화점이 우량고객에게 별도 제작한 선물을 하거나 감사 서비스를 실시하는 경우 ⑤ 맥주 회사가 고급 브랜드를 일정한 업소에만 선택적으로 공급하는 경우 등이 모두 디마케팅 기법의 예(例)에 속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디마케팅>

우리는 자기 자신 이외에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상위 20%의 고객이 기업 수익의 80%를 올린다는 ’80/20 법칙’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고객들을 좀더 세분화해 보면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상위 20%의 고객이 수익의 80%를 만들어내며, 그 바로 아래 40%의 고객은 수익의 30%를 창출한다. 반면 하위 40%의 고객은 이익은커녕 오히려 수익의 10%를 까먹는다. 따라서 VIP들을 관리하는 귀족마케팅과 함께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전략이 바로 하위 고객들을 잘라내는 디마케팅이다. ‘디마케팅(Demarketing)’은 필립 코틀러가 1971년에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정기적으로 고객과 건실한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기업이 수요를 의도적으로 줄이려는 마케팅 활동을 말한다.

출처 : 개인 블로그 <디마케팅> 소개

 

파레토 법칙(분석)

이탈리아 80%의 자산이 20%의 인구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는 이탈리아 경제학자 Vilfredo Pareto의 연구 결과로서, 이를 경영학에 최초 적용한 사람은 Josept M. Juran이다. Juran 박사는 양적 경영보다는 질적 경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많은 고객을 붙잡아두기 보다는 매출에 도움이 되는 적은 수의 고객을 유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파레토 법칙(Pareto principle)은 ‘전체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을가리킨다. 예를 들어, 20%의 고객이 백화점 전체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만큼 쇼핑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이 용어를사용한다. 2대 8 법칙라고도 한다.

출처 : 위키 대백과 <파레토 법칙>

관리력이 일정한 경우에 가급적 효과가 높은 부분에 중점적으로 투입하기 위한 분석방법. 관리력의 대상을 A·B·C 등의 존(zone)으로 나누어서 분석하고, 그중에 서 결과의 90%를 좌우할 것으로 생각되는 A존에 중점적으로 손을 쓴다. 예를 들면 100개의 거래선 중에서 자사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곳은 10개(A존)에 불과하다고 할 경우, 관리력을 이 A존에 가중해서 배분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개발자인 V.파레토의 이름을 따서 파레토 분석이라고 한다.


출처 : 야후 용어사전 <파레토 분석>

이태리 경제학자 Vilfredo Pareto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파레토 법칙(Pareto Principle)은 80-20 법칙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이탈리아 80%의 자산이 20%의 인구에 의해 소유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이를 경영학에 최초 적용한 사람은 Joseph M. Juran이었다고 한다. Juran박사는 이른바 중요한 소수, 대수롭지 않은 다수(vital few and trivial many)라는 이론을 통해 소수의 20%가 80%의 결과를 만들어 내기때문에 이른바 질적 경영(quality management)이 필요함을 주창했다. 물론 이는 20%가 긍정적인 80%를 만들어낸다는 쪽으로도 설명이 가능하지만, 20%의 불량품이 80%의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80-20에 적용시켜볼 수도 있다.

출처 : 블로그 방문자수의 파레토 법칙

뽐뿌질 하지 말아라!

광고는 그것이 표현되어질 수 있는 모든곳에 존재 한다. 어떤 분야든지 기업들은 수익을 높이고 자신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광고를 하게 마련이다. 특정 제품에 대한 광고부터 시작해서, 기업 자신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광고까지 광고의 목적이 다양하다. 그 목적이 수익 증가를 위한 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대부분의 것들의 목적이 그렇다는 것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 노선의 차량에는 광고가 엄청나다. 사람이 봐야 매출이 오르기 때문이라는 극히 상식적인 생각에서일 것이다. 어떤 매체의 광고든지 사람은 그 광고를 통해 자신의 생각에 영향이 미쳐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지를 가지고 부인하려 해 봐도 잘 되지 않는다.

다행히 필자는 뽐뿌를 받지 않는 타입이라서 광고들을 보면서 어떤 점이 괜찮고 어떤 광고는 지나치다 등의 평가만하지만, 영향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여러가지겠지만, 그 광고를 뿌리쳐야만 하는 자신의 분수를 탓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뽐뿌질 하지 말아라!”며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도 있다.

지하철 내의 광고들이 그만큼의 효과를 거두는가? 점차 줄어드는 광고 수입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다. 광고라는 것은 독창성이나 완성도를 떠나서 덕지 덕지 붙어있다면, 단지 벽지의 무늬정도로밖에 인지가 안될 것이 아닌가. 그런 이유로 인해서 줄어들어가는 것이다.


<관련기사 : 지하철 승객에게 광고 안볼 권리를 허하라>

LG 파워콤 100만 돌파

파워콤은 지난 2000년 설립되어 운영되어오는 초고속 인터넷 회사이다. 그들은 하나로 등의 초고속 인터넷 서비스 경쟁 대열에 들어 최근 1년 여만(2005년 9월 1일부터)에 100만의 가입자를 확보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외국 관광 서비스 종사자들에게 “빨리 빨리”라는 말을 가장 먼저 배우게 했을만큼 속도에 민감한 민족이다. 이런 민족적 속성이 인터넷 사업분야의 발전을 비약적으로 빠르게했겠지만 이것으로 인한 문제는 관련 기업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예외의 사람도 물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 이용시 페이지 로딩이 느리면 기다리기보다는 당장 서비스 회사에 전화해 따지고 최근의 초고속 서비스 회사들을 전전하며 경쟁기업들간에 제 살 파먹기를 지속시켰다.

긍정적인 현상 – 사용자 입장 – 으로는 파워콤의 속도 품질을 따라잡기 위해 하나로의 속도 기준이 기존 라이트 4Mbps, 프로 8Mbps에서 라이트 10Mbps, 프로 20Mbps로 배이상 증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전에 얻은 수익을 통해 장비 투자를 해 나갔지만 사용자들이 집중된 지역에서는 한가한 파워콤망과는 달리 야간 체증현상이 벌어져 그로 인한 전향이 잦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속도 기준의 증가는 신규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가입자들을 타사 서비스로 전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금년 초 필자가 H 통신사의 기사로 일할 때의 경험을 들어보자면, 실제로 일주일만에 하나로에서 파워콤으로, 파워콤에서 다시 하나로로 변경한 사람들도 적지 않이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파워콤과 하나로는 장기가입의 조건을 들어 상대 회사의 서비스를 해지하고 자사의 서비스를 가입해주는 사람들에게 상품 공세를 펼쳤으며, 후에는 상품이 아닌 현금으로 돌려주는 방식의 마케팅을 펼쳐왔고, 관련 사실은 기사화되기도하였다. 이런 마케팅은 직원으로서도 사용자의 입장에도 제 살 파먹기 경쟁으로 비춰졌다. 결국 이런 경쟁 모델은 어느 한 쪽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전장에서의 혈투를 연상하게 한다.

과연 어느 기업이 승리할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지만, 제 살 파먹기 경쟁으로 인한 손해에 대한 책임은 각기 회사에서 누구에게 돌려질지 궁금증으로 남는다.

<관련기사 : LG파워콤, ‘엑스피드’ 가입자 100만 돌파>

기독교를 보는 시각

올블 메인 페이지에 들렸을 때 불교인이 본 기독교라는 제목의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그 글을 직접 발견한 것은 아니고 다른 페이지에서 였다. 그 글에 대해 불교인뿐 아니라 무교인이 본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라고 표현했었기 때문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반면 또 달리 드는 생각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였다.

신학도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의 미래는 목회자이다. 목사라고 불리우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제성은 없지만, 선교사로서 일하든지 신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지식의 획득만을 위해서이든지 그들은 기독교인이라는 공통된 분모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은 그 말씀에 의해 전도해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의무를 언젠가는 행해야 하기 때문에 본인과 같은 의미로써 위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글을 읽으면서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어떤 부분에서 자기 편이 아닐 때는 배척하고 증오하고 복수했다.고 느꼈을까하는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행동을 보이셨던가? 증오하고 복수까지 했다는 것은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추측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떤 부분이 그들을 증오했다고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복수했다고 묘사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외에도 여러 의문점들이 있었지만, 그 글의 필자가 토론을 위한 글이 아니라고 전제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가 몇가지를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인으로서 기독교를 바라보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논술은 사고를 글로 옮겨놓은 것

그런데 문제가 있다. 도무지 논술전문가랍시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선생들이 도무지 학생들과 눈높이가 맞질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생각하는 방향과 수준이 선생과 너무 다르다. 그러니 위의 글은 당연히 낙제인 것이다. 만약 위의 글을 학급의 동급생들과돌려보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문제가 있다.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판단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의 문제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로에 관계없이 논술 교육은 필요하다 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는 본인의 경우를 들어 말하자면 이렇다.

초등학교 4학년 PC를 처음 접하게 되고 그 이후 중고등학교시절까지 PC와 결혼했다고도 할 수 있을만큼의 높은 관심과 애착을 통해 대학진학은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대학교라는 곳에 진학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나타내기 힘들다. 고등학교 시절 논술이라는 과목을 듣도 보고 못했기 때문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어떤 오류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기본교육으로써 교육받았다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등학교를 PC와 관련된 학교로써 정보산업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그곳에는 전산관련과목과 기본 과목 – 국영수과사국 등 – 들만을 가르치고 있었다.

논술 교육은 학교에서 기본과목으로써 교육해야 한다.
평생 대학을 목표로 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의견을 충분하고 명확하게 전달해야할 필요가 있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자신의 과업을 설명해야하고 일상 생활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의견을 적절히 표현하지 못한다면 인간관계에서 문제들이 발생되고, 대부분의 법률적인 문제에서도 살펴본다면 의사전달의 오류들로부터 발생된다고 생각한다. 고로 자신의 의견을 적절하고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논술 교육을 기본 교육으로 해야 한다. 물론 개인의 성격적인 문제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논술 교육을 통해 논리적인 사고를 갖추게 한다면 시기 적절하게는 아니더라도 필요할 때 자신의 입장을 표현해 낼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이라는 것은 피교육자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인의 경험을 비추어보건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던 수업시간, 즉 교육의 현장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꽤나 적지 않은 교육 효과를 가졌다. 인생을 살면서 이전에 중고등학교때 배웠던 기억들이 토막 토막이나마 새로운 것을 공부하려고 할 때 기억이 나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그것들을 완벽하게 외워내는 것이 아니라 –  추후에 여러 분야의 교육이나 삶에 있어 – 이해가 필요한 부분들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글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오류, 본인의 무식함이 표출되는 문구들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skt가 27위?

이 관계자는

“한국의 인구규모가 작은 탓이 크다

“며 “가입자수가 많은 해외 이동통신사들이 생각보다 다수여서 새삼 놀랐다”고 말했다.

가입자수가 큰 업체로는 중국의 차이나모바일(2억8000만명), 차이나유니콤(1억4000만명), 유럽의 보다폰(1억9000만명), 일본의 NTT도코모(5200만명) 등이 있다. 남미 멕시코나 인도네시아 1위 사업자도 모두 2000만명을 넘은 지 오래다.

한국이 인구가 많지 않은건 사실이다. 국내에서는 독점이다 뭐다 해서 굉장히 많은 가입자를 가지고 있는 skt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으로 따져봤을 때 27위라는 좋지 않은 순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skt는 그 동안 여러 다른 사업자들의 공격에도 끄떡하지도 않고, 버텨왔지만 국내시장에서 배 두드리고 있는 동안 해외에서는 꽤나 밀려버리는 형세를 만들고 말았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겠지만, 인구규모가 크지 않은 국내시장에서만 안주하고 있는 기업들에게는 결코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kt가 조금만 더 일찍이 해외시장을 공략했다면 지금의 모습과 어떤 차이를 가질까 생각해본다. 물론 skt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지금의 이런 위치가 그들의 노력과는 무관할 수도 있을 가능성은 있다.

1996년 1월에 세계최초로 cdma 이동전화 상용서비스를 개시했다고 되어있다. 이 시점에서 조금 더 신경쓰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같은해 6월과 7월에 꽤나 권위있는 신용평가기관들로부터 좋은 결과를 받아들고서 세계시장에 파고들었다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의 세계적인 대세가 CDMA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업실패의 위험을 고려했다고는 하지만, 어설프더라도 해외 시장에서 CDMA 분야에서 세계 최초라는 점을 확실하게 이용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니 사실 96년에 사업에 뛰어들었다고해도 늦은감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입자를 위한 로밍서비스 역시 중요한 기능이 되겠지만, 사실상 사업상 이유로 해외에 가는 사람들이나 일부 부유층이 아니면 초기 로밍서비스를 이용할 만한 사람이 있었겠냐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가입자들에게 꽤나 좋은 기능이기는 하지만, 과연 그것을 이용할 가입자가 얼마나 될 것이며, 그것에 의해 얻어지는 수익은 얼마나 되냐는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한국의 인구규모가 작기 때문에 사업 분야를 개척하면서 세계화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 왔어야 할 만큼 세계적인 순위는 중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한국 시장은 세계적인 시장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는 것은 아니다. skt가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그 외의 분야에서 얻고 있는 수익들은 진정 돈은 저렇게 벌어야 하는 것이로구나 하고 감탄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비판만을 위한 글이 되지 않도록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또한 본인이 간과하고 있다거나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적나라한 지적, 환영하겠다.

 

학문의 터…

교육의 상품화??란 포스팅을 보면서 본인이 다니고 학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공용의 것이어야 할 물마저도 자본원리에 의해 지배 되는 세상([에뿌키라] 당신들만의 천국-FTA 블루골드를 삼키다)에서 더 이상 학교라는 공간이 학문 연구만을 위한, 학생을 학자로 키워내기 위한 목적만을 달성하기 위한 공간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찌라시의 의견에 공감한다.

신학교로 시작된 학교는 이제 70년이 다 되어 가면서 종합대학으로의 변모를 꿈꾸고 있다. 과정을 짧게 살펴보자면, 신학만을 가르치던 학교는 그들의 기본 종교인 기독교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회복지학과를 증설한다. 여기까지의 발전에 대해서는 꽤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최근 증가 추세에 있는 대학들과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금 더 규모가 있을 필요가 발생 된다. 규모는 영향력과 비례하다는 사고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추측해 본다. 이런 이유로 학교의 교육부 등록을 완료하고, 몇 개의 학과를 증설하면서 종합대학으로써 상품화 한다. 일단은 생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해두자.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모토로 움직이고 있는 학교의 본모습을 잃어간다는데 슬픔을 감출 수 없다. 새로이 증설된 학과들은 자신들의 취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교 이름의 변경을 요구하고,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생활 기준을 개인 기호의 자유라는 이유를 들어 무시해버린다. 물론 학교측에서는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위한 노력들 가운데서 자존심마저 버리지 않기위해 학교 이름 변경 요구에 거부 반응 또는 무반응으로 표현해 낸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력을 교육기관의 상품화라는 면에서 접근해보자면, 객관적으로 따져봤을 때 자존심의 존립을 위해 상품화의 방해요소를 방치해 둔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데 한 몫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앞서 밝힌 상품화를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다.

종합대학으로 변해가면서 발생되는 문제들은 스스로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 내야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들을 비판하고 배척하기보다는 먼저 다가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본인을 포함한 재학생들의 사명만은 아니기에 후배 재학생들에게도 권면해 나가야할 의무도 병행한다.

경영활동과 고객

마케팅을 배우는 중에 기업의 경영활동의 주요 항목들과의 관계에서 마케팅 비중의 변화를 나타내주는 그림에서도 나타나지만 마케팅은 점차 기업 경영활동의 중심에 위치하고 그 중심에 고객을 위치시키게 된다.

마케팅의 비중 변화

이런 마케팅의 입지도를 통해 오늘날의 고객 – 이전의 소비자라고 불리우던 것과 구분하여 – 들은 기업 경영활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고려 요소가 되었다.

자동차 동호회의 입김에 관련된 기사를 보는 중에 이론을 실상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실제로 최근의 대기업들은 SKT를 시작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를 확대하고, 삼성의 경우에는 고객은 거의 왕수준으로서 노발대발 우기면 새 제품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그만큼 고객이라는 것과 경영이라는 것의 연관도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소비하는 사람들이 아닌 연령, 성별, 학력 등의 기준을 통해 세분화되어 관리되고 있는 고객을 기업은 무서워하기에까지 이르른것이다. 그런 기업의 태도는 고객을 더욱 적극적이게 만들어주게 된다.

얼마전까지 서비스 업종에서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최근의 그런 기업 태도는 실무자들로하여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시키고 있다. 그만큼 고객들은 편하고 자신의 심기를 편하게 모든 대우를 받는 것이다.
당해본 사람이 안다고 이전의 CS(Customer Service) 엔지니어들을 대하던 태도와 지금의 태도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조금 딴 소리를 하자면,

서비스직으로 일하다보면 매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다양하고 충격적이게 겪게 된다. 개중에는 진짜 미친사람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개념이 정립되어있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는 돈 내고 받는 것인데 그만큼 누려야 한다는 것이리라.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생각, 사고, 고뇌

상대방의 필요를 파악하고 그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원하는 것을 획득한다.

꽤 나 재수 없다고 생각되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어떤 목적에서든지 사람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간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상대방으로부터 얻기 위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그렇다.

최근에 재미있게 보고 있는 카툰이 하나 더 늘었는데, 그것은 죽는 남자이다. 죽을 날이 90여일밖에 남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인데, 죽기전에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서울역에서 노숙하고 있는 50대의 거대 기업의 중견간부였던 사람에게 자포자기한 삶을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것을 요구한다.
그렇게 요구받은 노인은 고민 끝에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이 위협받는 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인해 주인공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그가 가장 먼저했던 일은 무엇인가. 생각이다! (사 고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지만, 생각이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상(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전략과 전술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 삶에 있어서 꼭 필요한 일이다. 특히나 지금의 나에게는 더욱 더 필요하다. 31화를 보려고 클릭한 순간, 득도한 듯한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 떠 오른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생각인것이다. 다시 말해 떠올리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떠 올린 것을 다른 것으로 이어가고 무형의 구조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게 생각이다.
내 머리에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하게 된 때는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특정 분야인 컴퓨터쪽으로는 언제나 생각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 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않은채 개념을 가출시켜버린 일상의 반복이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그 순간부터 한시라도 뭔가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하기 힘들다.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은 고민거리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 머리가 폭주해 버린 것일까. 과부하 걸린다는 표현으로 정리하고 싶은 현상이 있는데, 순식간에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PC에 과부하 걸려서 다운되는 듯한 현상이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에 잠들어서, 어느새 눈을 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해버린다.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가 없다.

혹시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 생각을 지속하다가 과부하걸려버리는 그런 경험말이다.

마케팅 전쟁

마케팅 과목의 과제로서 읽고 있는데, 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적자면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서 배우는 21세기 마케팅 행동원칙(Al Ries and Jack Trout, 차재호 옮김, 2002, 서울:비즈니스 북스)

이 정도 되시겠다. 지금 3/5정도 읽은 상태에서 잠시 정리해보자면, 대충 주제는 집중으로 요약된다. 어떤 전략이든지 집중과 연관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글 쓴 사람들이 의도한 바가 그것이 아닐지라도 일단은 여러 주제들의 글들에서 ‘집중‘이라는 주제는 나타난다. 회사의 경영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뒷받침해 줄 능력이 되지 않는 확장은 도산의 지름길이라는 내용의 문단들을 자주 발견하게 됐는데, 사람의 인생 역시 같다고 생각된다.

본인은 욕심이 많은 편이라서 이것 저것 하고 싶은것들도 많았고, 지금도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전에는 얼마나 하고 싶은것들이 많았는가하면 스스로도 꽤나 변덕쟁이라고 생각할 정도이다. 지금이야 이런 저런 것들을 정리했지만 사실상 지금도 미련을 못 버리는 분야가 몇 가지가 된다.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여러가지 생각하는 것들로부터 남는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한 가지라도 무엇인가를 하면서 배울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지 아니할 수가 없다. 얻었다는 것은 발전의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 것들 중 하나는 역사를 알고 연구하면 지금의 세대에 대해 어느정도 통찰력을 가지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과거의 관련 사례들을 통해 유사점을 발견해내고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 효과중의 가장 큰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애초에 경영이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통찰력’을 획득 할 수 있지 않을까에 대한 희망이었기 때문에, 통찰력은 본인의 관심사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단순히 심리학을 위해서 점수 따기 좋은 컴퓨터 과목이 있어서라는 것은 편하게 말하기 위한 이유라고나 할까. 진정한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약점이 될 가능성을 높인다는 약간은 재수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쨌든, 이 책 다음으로 읽어야 할 책도 적잖이 도움이 될 듯하다.

씨 언어 수업시간..

학교 복수전공을 위해 C언어를 다시 듣게 되었는데, 저번 주에는 예의상 한번 빠져줬고, 이번주에 처음 들어갔는데 참 감회가 새롭다. 지금은 인터프리터 언어로 주로 프로그래밍하기 때문에 약간은 버벅거리기도 하였다. 비쥬얼 C++로 학습하는데, 참… 기분이 묘하다.

이전에 basic으로부터 시작된 프로그래밍에의 흥미는 스스로 감탄할 만한 수준의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실력에까지 이르르게 된다. 물론 전문 개발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 개발자들의 프로그램에 비하면 진정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그 성취감이란 이루 말로 표현하기가 벅차다.

처음 공부하면서 만들었던 자료들은 이미 여러번의 폭탄세례로 인해서 다 없어지고말았지만,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것은 역시나 주민등록번호 제조기가 아닐까 싶다.
한간에 불법 프로그램으로, V3에서는 악성 프로그램으로 진단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지금은 그 가치를 잃었지만 이전에 지금과 같은 복잡한 단계들이 없었을 때는 꽤나 악용되어 여러 사람들을 괴롭혔던 프로그램이었다.

쨌든 지금은 소용도 없지만 이전에 18세 미만인 학생들에게는 꽤나 유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자잘한 프로그래밍들을 하고 있지만, 처음에 만들어냈던 프로그램들의 완성 단계에서 느껴졌던만큼의 보람은 꽤나 오래전부터 느껴보지를 못했다.

그러나, 그 때의 그 기억을 추억하노라면 지금도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까지 느껴진다.
  

합리성과 개방성, 그리고 대 기업의 오만

확실히 우리나라의 대기업들, 그리고 정부라는 기관 – 물론 납품을 받는데 있어서 피납처로서의 정부 기관 – 의 오만함은 실로 말할 수 없으리만큼 방자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된다.

먼저 다음 기사를 보시라. [ ‘모토롤라 레이저’ 성공 뒤에 한국 중소기업 ]

서 사장은 “제품 디자인을 만들고 6개월간 국내 휴대전화 업체들의 문을 두드렸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며

“변변한 납품 실적도 없는 한국 중소기업의 제품을 인정해 준 모토로라의 합리성, 개방성이 놀랍다”

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국내 업체들은 2003년에만 해도고화질 카메라폰 등 기능 경쟁에 몰두해 디자인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며 “대기업의 오만과 상상력 부재로 삼영과 같은중소기업을 협력업체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고 꼬집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살면서 외국의 기업들이나 정부들의 여러 면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나 기타 유사 정보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합리성과 개방성이었다. 물론 외국의 대기업이라고해서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고, 소개되는 것들의 대부분은 전체가 아닌 긍정적인 분야들이기 때문이기에 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조작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전에 풍력 발전기를 개발한 과학자의 이야기가 그 단적인 예로서 들어질 수 있겠다. 풍력 발전 메카니즘을 개발한 과학자는 이 나라에서 그 기술을 최초로 구현하고 싶었을 게다. 그러나 자신의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라를 원망하며 외국으로 기술을 수출하기에 이르른다. 물론 그 기술은 다시 수입되는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된다.(관련 기사를 찾기가 힘드네요. ^^)

또 한가지 살펴보자면 이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짜고치는 고스톱 행태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 건축토목기사로 일하셨는데, 그 당시에도 역시 – 지금의 견줄만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 부당 입찰이라는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계약 성사의 방법이라는 것은 술대접 문화라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문화는 국내 일류 – 라고 하는 – 기업들이 글로벌화되어 가면서 차츰 없어져가고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중소기업에 있어서는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받을 것의 기능이나 기술 수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얼떨결에 받아버리는 것이다. 이런 술자리 계약성사 행태가 오히려 지금의 오만한 대기업의 횡포를 낳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술이나 제품의 흠결의 정도가 많음을 숨기기 위해 술자리에서 계약을 체결하도록 하는 그들의 자신없는 모습들은 대기업들로하여금 중소기업 제품들은 역시 떨어져 라는 인식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보자면 대기업이라는 입지를 이용한 실무자들의 xxx 없는 행태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란 권력을 가지게 되면 조금은 변하게 마련이니까.

괜히 이름있는 것을 찾는게 아니라는 변명은 집어치워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귀찮아서 쉬운것을 찾기 때문에 그런 바보같은 악순환의 연속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이다.
귀찮음에서 벗어나라!

[펌]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

김준우박사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I. 문제제기: 세계/한국 기독교의 몰락 위기 — 윤리학자가 최근의 예수 연구 소개에 전념하는 이유

1.  한국교회/이민교회는 지난 세대 동안 급성장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London Sunday Times 보도 – “영국 전체국민의 70%가 하나님을 믿지만, 18세 연령층의 경우는 77%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가 한 세대만에 이렇게 몰락하는 위기는 조만간 한국교회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와 쇠퇴는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빠져나가기 때문으로 조사. 새신자 전도의 어려움 – 영남지역의 꽤 큰 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새신자는 10명쯤”- 3년에 1명꼴. 2천년 동안 확장을 거듭한 기독교가 서구에서 한 세대만에 급속히 몰락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새신자를 얻기 힘들어 교회가 점차 “양로원”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적 위기의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외적인 요인들, 즉 유물론적 세계관, 세속주의, 소비주의, 주5일 근무제 등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적인 요인 해결이 시급하다.

2. 귀국해서 두세 군데 기독교 대학들에서 몇 년 동안 [기독교 개론]과목을 가르친 경험: 신학생들 가르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신학생들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작업이지만, 기독교 대학들의 학생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5-10%에 불과했다.  대다수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은 동정녀 탄생, 육체부활 등 이해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억지부린다.”

3. 물음
1: 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왜 기독교인들 가운데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그 비율이 많은가?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는 믿으면서, 예수처럼 목숨 걸고 살려 하지 않는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무관심.
물음
2: 교회가 가르치는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지,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 언어가 매우 게토화된 언어이다.- 새신자들의 장벽.
교회는 오늘날 교육받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니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정직하게 이해, 수긍하는가?

4. 이 문제는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정직한 이해 -> 확신 -> 열심 -> 교회부흥.  “교회의 게토화된 언어를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윽박지르는 한, 기독교가 몰락하고 만다는 것은 서구교회가 이미 입증했다.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가 1년 넘게 기독교 학술서적 베스트셀러 1위- 성경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추구.  청년층의 갈증 반영,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고작 “성불하신 예수”, “유영모와 함석헌의 예수”가 전부이다.

II. 최근의 “예수 르네상스” –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중심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굳이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 언행 불일치의 근본 이유.
매주일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머리로는 정직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고백하는 것, 외우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독교인의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신앙고백조차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존 캅 박사의 지적대로,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토론을 통해 자기 나름의 신앙으로 다듬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열정이 없는 것 아닌가?  사도신경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 즉 예수의 잉태/탄생, 죽음과 부활/승천만 있지, 예수의 행적, 교훈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헬레니즘 밀의종교 영향을 받은 바울의 구원자 이해(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승천한 구원자)가 압도하게 된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잉태, 탄생, 수난, 죽음, 승천)은 모두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예수의 일생이 이처럼 수동적이라면, 기독교인의 생활태도도 자연히 수동적, 비주체적, 노예적이 된다.

1. 예수 이해는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관계 이해가 기초이다 – 예수와 폭력 문제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9․11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모슬렘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대응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원수 사랑을 내세워 폭력에 굴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결과적으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태 5:39).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오해하듯이 폭력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말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반항하라는 가르침이었으며, 폭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복수심으로 발전하여 똑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친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가 오른쪽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칠 경우에는 왼뺨을 맞게 된다. 따라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친 경우, 즉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참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 손을 사용하여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는 것은 손등으로 때릴 경우뿐이다. 이것 역시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가해자가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거나, 아니면 오른쪽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는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해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된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이다”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그런다면 맞아죽을 것이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2)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주어라.”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겉옷과 속옷이 입은 옷의 전부였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4에 나와 있다.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상대로 이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로버트 펑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 따라,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했다.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았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수치를 당하는 것은 그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게릴라 전술이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이다.

3)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 투쟁을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윤리이다.

2. “예수 르네상스”의 신학적 배경과 방법론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의 성서연구: 교의학에 종속되어 교리를 변증하는 수단/도구.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성서연구: 역사비평이라는 합리성을 통해 본문 배후 탐구 –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해방.
20세기 전반부: 역사적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
1960년대 해방신학: 현재적 해방실천에 초점 – 텍스트 자체보다는 해석자의 컨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0년대 사회학적 방법(Gottwald, Kee, Horseley, Teissen): 본문의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 관계 관찰.
1980년대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석: 본문 배후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구조 속에서 의미 해석.
1980년대 이후 “예수 르네상스” –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서들이 수 십 권 출판.
1983년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산하에 Historical Jesus Section 구성됨
1985년 [예수 세미나] 조직

1) 예수찾기의 간략한 역사 (게르트 타이센․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역,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01, 31 이하를 중심으로 정리)

(1) 1단계(Old Quest): 18세기 중엽-19세기 독일
합리주의, 중세의 권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참된 근거” 추구
교회가 가르쳐주는 신격화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서와 역사와 이성이 가르쳐주는 “진짜 예수”를 찾기 시작.
라이마루스(1694-1768): 네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들이 서로 다르다 – 복음서들의 불일치 문제 지적.
예수는 실패한 유대인 혁명가였다. 예수는 예언자적-묵시적 성격의 유대인인데 반해, 기독교는 사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수의 정치적-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의 불일치는 사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 {예수의 생애}(1835/36): 예수는 위대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하나, 기적적으로 종말을 기대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열광적” 유대인이었다. 복음서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적 진술”이다.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된 것은 사도들이 사기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의 무의식적 과정 때문이다.

(2) 2단계: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론,
18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수많은 “예수전” 연구 – 르낭(1863), 슐라이에르마허(1864), 슈트라우스(1835, 1865) 등 교회의 선포와 역사적 예수를 대치시킴.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 기독교의 신빙성 근거 -> 자유주의 신학
르낭: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차츰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요구함으로써 배척받음.
홀츠만: 무시간적인 윤리적 진리를 설파하는 교사의 모습,
요하네스 바이쓰: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 이
슈바이처(1906):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 곧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에 의해 종말이 일어날 것 기대.  자신의 선교중에 사람의 아들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사역하였으나, 이런 기대가 빗나갔음을 알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에게 메시아적 고난을 체현하기 위해 자발적 죽음 선택. 그러나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착각한 묵시종말론자”(mistaken apocalypticist)였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돌아갔다.
비판: 예수전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시대정신과 이상이라는 의상을 예수에게 덧입힌 현대적 예수를 그린 것이다.

(3) 3단계: 역사적 예수 안 찾기 시대(no quest): 질문의 폐기 시대
신정통주의(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등) –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
양식비평: 복음서의 전승들이 직접 반영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다.
켈러(1896): 진짜 예수란 역사가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 처음 신앙인들이 믿었던 케리그마 그리스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1932): 예수의 삶의 의미와 존재 자체의 의미는 그의 죽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불트만의 <예수>(1926), <신약성서와 신화론>(1941):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불트만: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실존주의적 도전.  예수의 인성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에서 유래했다.
비판:
공적: 세상의 역사를 최고의 왕좌에 모시는 이른바 역사절대화라는 우상숭배로부터의 탈출 극단적인 역사회의주의라는 불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  “믿음만으로”라는 신앙우선의 정신을 재생.
폐해: 케리그마 신학과 실존론적 해석학의 결합은 성서의 구원의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사사화, 내면화, 정신화, 추상화시키는 엄청난 폐단을 야기시켰다(김창락, 62)

(4) 새로운 탐구(New Quest):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언동 속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근거를 찾으려함.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내포된 자기 이해는 초기 기독교 선포 속에 드러난 자기이해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탐구를 이룩할 수 있으며, 신정통주의의 지침 아래에서 타당하다.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
케제만의 {오늘의 신약성서 문제}, 본캄의 {나사렛 예수}(1956),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1983)  신정통주의의 틀 속에서, 복음서 속의 예수와 바울서신들 속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찾기에 주력하였다.
보른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 내용상 연속성 있다. 현재적인 종말론적 성취
예레미아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의 육화된 존재
비판: 신정통주의는 예수의 중요성을 단지 그의 죽음과 부활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펑크, 109)

(5) 세 번째 탐구(Third Quest) – 예수 르네상스 1975년 이후 신정통주의 붕괴, 나그 함마디 문서, 사해 두루마리 발견, 비유와 지혜전승 재발견,  –  종교사학,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등으로부터 배운 모델, 학제간 연구
a.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의 예수 사이를 구별한다.(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이 둘이 똑같은 존재라고 주장)
b. 신약성서 복음서들 이외의 자료들도 이용한다.   (   ꡒ    비정경 자료들은 중요하지 않음을 주장)
c. 교회의 모든 교리들을 역사적 탐구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   ꡒ    역사적 예수를 신조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킴)
d.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 가운데 진정한 것을 가려낸다. (    ”     가려내지 않는다)
샌더스: 예수는 유대민족 복권의 신학 전통에서 이해되는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이다.
버튼 맥: 방랑하는 견유학파적 현자, 전복적인 지혜의 교사
엘리자베쓰 쉬쓸러 피오렌자: 예수는 지혜의 예언자, 평등한 제자직
존 도미닉 크로산: 브로커 체제에 대항하여 치유와 개방된 식탁을 통해 철저한 평등주의를 실천한 사회적 혁명가
마커스 보그: 카리스마적 치유자, 성인, 전복적 현자, 사회적 예언자, 이스라엘의 재활성화를 추구하는 운동의 창시자
유대교: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라”(레 19:2), 예수: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라”(눅 6:36)
리처드 호슬리: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적 혁명가

2) 예수 세미나
[예수 세미나]는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중심이 되어 신약학자 200여 명이 조직한 공동연구 모임으로, 정회원에 속하는 신약학 전공 박사만 76명에 이른다. 이들은 1985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나흘 동안 40명 내지 50명이 참석하여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로 되어있는 모든 기록들을 수집하여, 그 진위를 투표로 평가하여, {5복음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찾아서}(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 –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새롭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학자역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와 {예수의 행적: 예수의 진정한 행적을 찾아서}(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ks of Jesus, 1998)를 출판하여, 전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던진 학자 집단이다. 그 충격은 타임지(1996년 4월8일자, pp. 52-60), 뉴스위크지(1996년 4월8일자, pp. 60-70),  유에스 뉴스 & 월드리포트지(1996년 4월8일자, pp. 47-53)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최근의 보도(Ministry, 1999, Jan.)에 따르면, [예수 세미나], 특히 크로산과 펑크의 저서들을 통해, 미국 교회 교인들 사이에 “예수 붐”이 일어나고 있어, 목회자들이 이 저서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는 그가 1991년에 출판한 책으로서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의 축소판으로서, 이 책 Historical Jesus는 출판된 지 1년 반만에 4만 부가 팔린 책이었다. 크로산 박사는 1950년 나이 16살에 가톨릭 수도회(세르비떼)에 들어가 1969년 결혼을 위해 사제직을 떠나 드폴 대학교의 교수가 된 후 1995년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일생을 바친 학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에 관해 질문하는 물음들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는 특히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이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예수가 세례 요한과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략들과 그 신학적 이유, 예수가 처형된 이유,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에게 무덤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는지, 예수를 매장했다고 기록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부활절에 일어난 일 등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로버트 펑크는 35년간 대학에서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다가 몬태나 대학교에서 은퇴한 학자로서, [예수 세미나]를 설립하고 그 세미나의 결론들을 위의 두 책으로 엮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솔직히}는 그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는, [예수 세미나]에 적극 참여한 75명의 통찰력이 결집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1부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어떻게 우상파괴자 예수가 기독교의 성상/우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2부 “예수의 복음”과 3부 “복음서들의 예수” 즉
“예수에 관한 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비유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부인”들(제사장, 바리새인들, 즉 경건하고 정결한 종교인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외부인들”(병자들, 죄인들, 불구자들, 즉 율법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 뒤바뀌게 되는 것, 즉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증들이라고 설명한다. 둘째로 “복음서들의 예수”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마케팅”하기 위해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 죽음, 부활, 재림, 출생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화적으로 덧칠하였는지를 하나하나 집어내고 있다. 이 책은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이상으로 학문적 정직성을 고집한 책이다.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 – 학제간 연구
최근에 학자들이 제안한 예수상들은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 G. 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 P. Sanders, 1985)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커스 보그(Marcus Borg, 1984)의 “종교적 달인””카리스마적 존재로서 병고치는 자””지혜의 스승””사회적 예언자””운동의 촉매자”와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 1987)의 예수상도 덧붙일 수 있다. 크로산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예수상들의 혼란을 돌파한다.
(1)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 接神종교 이론, 질병과 고통, 주술, 식사, 사회계층론, 저항운동이론 등.
(2)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 브로커체제-지배체제 분석, 노예제 농경사회의 피지배층의 생활, 각종 저항운동,
(3) 예수 전승의 문헌 분석을 통한 미시적 차원: 522개 예수전승의 단락들에 대한 전승층 구분.
(4) 성서와 기독교 전통, 특히 교리의 신화적 언어와 세계관 배후에 놓여있는 체험 탐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관계의 유비 -> 생물학적 유비 -> 형이상학적 유비(보그, {예수의 의미})
(a) 예수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에 대해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롬 1:4), 마가는 “세례”를 통해서(막1:11), 마태와 누가는 “잉태”를 통해서(마 1:20; 눅 1:32), 요한은 “태초”부터(요 1:1-18)라고 주장한다.
(b)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의 근거가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예수의 “동정녀 출생” “부활/승천”을 고백하게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강조점들 –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1) 예수의 사회적 세계: 농경사회, 후견인-의뢰인의 착취체제, 절망의 시대, 100년 동안 33회의 농민저항 시대.
이러한 학제간 연구 방법론에 따른 크로산의 분석에 의하면, 예수운동의 핵심은 1세기 로마제국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을 통한 약탈과 대농장을 중심으로 한 노예경제를 바탕으로 전세계의 상업화, 도시화를 추진했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한국어판 서문(2000년)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세계화, 도시화, 상업화에 맞서서 저항하였다”고 말한다.

(1) “로마의 평화”는 주변부에 대한 폭력과 전쟁을 통한 중심부의 평화였을 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보복을 은폐하는 신화였다.  우선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에서, “로마의 평화”가 허구적인 정치적 선전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위해 크로산은 엘리트층의 문학적 기록이 아니라,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속에 나타난 식민지 농민들의 문서, 즉 예수 당시의 예수와 같은 계급이었던 노동자 힐라리온의 편지를 인용하고, 직조공 트리폰의 일대기를 추적하여, 당시의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생과 무거운 세금, 벌금, 징병제도 등을 분석한다. 이어서 그는 로마제국의 평민들의 고통을 입증하기 위해 [투리아에 대한 추도]에 나타난 일화를 추적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여러 시인들, 즉 버질, 호레이스, 프로퍼티우스, 오비드 등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로마제국의 “보복”과 “공포”를 설명한 다음,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타난 브리튼의 장군 칼가쿠스의 로마제국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로마제국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로마의 평화”라는 허상을 벗긴다. “그들은 약탈, 살육, 강탈을 제국[imperium]이라 부르고, 폐허로 만드는 것을 평화라 부른다.”

(2) 로마제국은 의뢰인-후견인체제로 연결된 친분중심사회로서, 부패와 불평등,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크로산은 토마스 카니(Thomas Carney)의 고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로마세계가 계급이 아니라 후견인 체제(patronage)에 기초한 사회로서, 사회전체가 의뢰인-후견인의 고리들로 연결된 친분관계의 사회이며, 가부장적 사회로서, 억압과 착취의 사회이며 “부패한 사회”임을 밝힌다. 크로산은 이렇게 된 원인이 로마제국의 경우, 중국처럼 경쟁적인 과거제도나 터키처럼 황실학교와 같은 관리 선발을 위한 공식적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사적인 친분과 추천에 의해 모든 관리를 임명하여, 사회 전체가 브로커로 연결된 체제였다고 지적한다.  후견인 사회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는 “영향력 있는 권력 브로커의 도움을 통해 관직과 이익을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로 이어진 로마 사회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는 족벌주의, 연고주의로 연결된 철저한 불평등 사회였으며,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이러한 브로커 관계는 현대의 종속이론에서 제3세계의 엘리트들과 중심부의 엘리트들의 관계처럼, 착취와 억압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3)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로서, 토지세만 생산물의 2/3에 달했던 극도의 착취구조였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였다.  크로산은 농경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도시의 극소수 지배계급과 농촌의 대부분의 소작농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였고, 제조업은 소규모의 수공업 단계에 불과하여 지배계급의 재산 축적은 토지 임대와 세금, 그리고 대부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석한다. 그는 먼저 오늘날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당시의 평균수명과 세금제도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전 시기에는 출생하는 아이들의 거의 1/3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거의 60%가 죽고, 스물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75%가, 마흔 여섯 살 때는 90%가 죽었다. 3%만이 예순 살이 되었다”(Carney, 88). 한편 세금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세금으로 뽑아낸 자원들은 대부분행정가들에게 재분배되었는데, 이들은 큰 토지로부터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자들이었다. 세금징수는 보통 세원(稅源)을 까먹는 방식이었다. 기껏해야 세원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세원을 개발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며, 흔히 세원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사실상 그들 이전의 원시사회의 엘리트들이나, 그들 다음의 산업사회의 엘리트들이 차지했던 것보다 더욱 큰 몫을 차지하였다”.
크로산은 이어서 게하르트 렌스키의 농경사회의 아홉 계층 이론을 통해, 당시의 별도의 계급이었던 통치자는 사실상 자기의 세력 범위 안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당한 소유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과, 그 다음의 지배계급은 보통 인구의 1% 정도였지만, 대부분의 농경국가의 국가 수입의 적어도 1/4 정도를 받아, 지배계급과 통치자는 모두 그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신하계급은 대개 인구의 5%로서, 서기관들과 관료들로부터 군인들과 장군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정치적 엘리트를 위해 봉사”했다고 본다.  상인계급은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몇몇 경우에는 정치권력도 갖고 있었으며, 사제계급은 농경사회에서 마지막 특권층으로서, 예를 들어, B.C.E. 12세기의 이집트에서는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으며, C.E.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다고 지적한다. 크로산은 이들 상층계급이 각종 세금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필수품조차 빼앗아감으로써 농민들을 철저히 착취하였음을 입증한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의 반세계화 운동을 유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주로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비판적으로 주석하는 가운데,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 주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33 차례의 반로마, 반귀족 농민저항과 반란을 유형별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장 폭력투쟁을 벌인 의적들, 하느님의 폭력에 의존한 천년왕국적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들, 주술사, 혁명가와 반란자들의 저항에 관해 그는 사회적 출신계급과 이념, 전략, 로마의 대응에 관해 자세하게 해명한다. 그는 우선,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직전의 천년왕국적 기대와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B.C.E. 160년대의 천년왕국적 완성에 대해 치솟았던 비전은 그 이후에 매우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경건한 사람들의 시대는, [희년](Jubilee) 23:27에 그려진 대로, “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모세의 언약](Testament of Moses) 10:1에 약속된, “악마”도 “끝장나지” 않았으며,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니엘7:27의 “영원한 나라”는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녹 1서 90:33의 동물들의 묵시(Animal Apocalypse)에 극적으로 그려진 것, 즉 모든 양들과 짐승들, 새들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그들이 모두 순하게 되고 그의 집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주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OTP 2.102; 1.931; 1.71). 그 대신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우선 마카비 형제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로마인들의 지배였다. 그래서 묵시종말적 비전, 천년왕국에 대한 꿈, 그리고 초월적인 희망은 계속해서 새로 기록되었고 다시 읽혀졌다.
유대인들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또 다시 희망을 바라보았다. 참담한 아이러니(irony)는 다니엘 7-12장의 천년왕국적 소망이 천사들을 기다렸으나 결국 하스몬 왕가를 보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시편]도 주님 메시아, 즉 다윗의 아들을 기다렸으나, 그 대신에 나타난 것은
지긋지긋한 헤롯, 즉 안티파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 대한 비전들이 인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아 계속해서 나타나고, 또 다시 패배하고 또 다시 되풀이되는 비전들을 조롱하기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옳다. 그 비전들은 완전한 정의에 대한 희망을 계속 살아있게 함으로써 작은 이익들을 수단과 방법으로 성취하고, 전략과 전술들을 서서히 고통 가운데 깨닫도록 만든다.
그 이상적 나라에 대한 희망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완전히 꺾였으며, 로마제국조차 자신이 그 이상적 나라라고 자칭하고, 유대인들조차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바만 야수트](Bahman Yasht, Eddy 343-349)에 나오는 천년왕국적 비전과 다니엘 2장과 7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적 비전(Collins 1984a:21-26)은 세계의 패권이 네 차례 바뀌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 둘 모두의 과거 역사에 대한 묵시적 회고는 미래 역사에 대한 예언처럼 꾸며져 있다. 그 페르시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네 왕국들은 아시리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구원자 왕 아후라 마즈다와 페르시아 민족이 회복한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그 네 왕국들이 바빌로니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천군천사들의 주인인 야훼와 유대 민족이 찾은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의 회복도 아니었고, 유대인들의 회복도 아니었으며,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제국은 자체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 세계적 패권의 순서를 수정하여 이용했다. 카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는 C.E. 30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C.E. 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유대인 저술가조차도, 비록 마지못해 했을지라도, 로마가 그 다섯 번째 제국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인들에 대항하는 종교정치적 예언 [네번째 시빌의 신탁](The
Fourth Sibylline Oracle)은 아마도 B.C.E. 3세기 초에 비유대인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C.E.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시킨 후, 어느 유대인 저자가 이 신탁을 수정하였다. 네 제국에 대한 원래의 신탁(4.49-101)과 그 후의 묵시종말적 완성(4.173-192) 사이에, 로마의 패권에 대한 묘사가 후대에 삽입되었다(4.102-172)…. 그 다섯번째 왕국은 야훼의 우주적 신정통치와 신실한 유대백성들의 설욕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인들을 대신한 로마인들의 제국이었다.  묵시종말적 심판과 천년왕국적 완성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크로산은 이처럼 묵시종말적 희망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농민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참고 견디는 계급이지만,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의 농민들이 로마 총독부와 성전으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착취당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아왔는데, 특별히 로마제국 시대에 그처럼 많이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 이유는 농민들이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천민계층이 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 농민들은 거의 5백 년 동안이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 밑에서, 즉 페르시아인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류코스 왕조, 그리고 이제는 로마인들 밑에서 그처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언제나 이중으로 세금을 물어야만 했다. 즉 외국의 제국들에 대해, 또한 성전에 대해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만 했다. 또한 언제나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셀류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극심한 종교정치적 도발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 반란은 하스몬 가문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는데, 하스몬 가문은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에 속하였던 제사장 가문으로서 귀족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제까지의 저항들과는 매우 다르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피터 브런트(Peter Brunt)의 표현처럼, “66년의 반란은 이방인 지배자들에 대항한 것만큼이나 동족(同族) 가운데 지주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항한 것”(14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간의 사회 및 정치 윤리의식을 갖고, 유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인들이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무자비하게 세금을 부과했고, 생존 차원에 머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식된 박탈감이 있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정상적인 빈곤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핍절(乏絶)과 극빈 상태로 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렌스키의 사회 계층화 이론에 따르자면, 농민계급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결하고 비천하며 소모적인 계급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크로산은 이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과연 정확히 무엇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농민계급을 ‘정상적인’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인식된 박탈감, 그리고 감소로 인한 박탈감에 빠트려, 결국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고,  마틴 굿맨, 메이건 브로쉬, 빅터 체리코버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원인이 부채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선, 메이건 브로쉬(Magen Broshi)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헤롯 왕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왕이 벌인] 사업들 가운데 적어도 20개의 사업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당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운 것들이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그 나라가 전례 없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상당한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31). 그러나 마틴 굿맨이 지적하였듯이, 비록 “그 효과가 유익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부자들뿐이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몰랐던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이득도 없었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고통을 겪었다.  유대의 경제는 투자한 자본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충분한 사업이 없었으며, 부유한 귀족들이 새로운 제조업이나 장거리 무역에 돈을 투자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대신에 그들은 재산을 토지나 대부(貸付)에 투자했다”(1982:419-421). 부자들이 재산을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결국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일일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악했던 것은 대부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크로산은 여기서 로마제국 당시 부자들의 대부업을 통한 농민들의 부채문제가 율법 조항, 즉 동족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조항(출 22:25; 신 23:20)과 안식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면제시켜야 한다는 조항(신15:1-8)을 어떻게 회피하였는지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금지조항이 있었다(출22:25; 신 23:20). 물론 사람들이 이 조항을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싶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투자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빅터 체리코버(Victor Tcherikover)가 지적했듯이, “무이자(無利子) 대출, 특히 옥수수에 대한 무이자 대출은 성서의 율법보다 오래된 것이며, 이런 대출은 고대 근동지방의 많은 농경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이자 대출은 때때로 이자를 갚는 대출보다 채무자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이자 대출이 대개 단기간의 대출이며, 그 약정한 기간 내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Tcherikover et al. 1.35-36). 다시 말해서,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보다 단기간에 갚지 못할 경우 무거운 벌금을 물림으로써 더욱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1장에서 사래우스가 트리폰에게 예탁-대출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틴 굿맨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그러한 무이자 예탁-대출에 관해 말하면서, “만일 채무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채권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대신에 고마워하는 친구를 얻는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지나서 상환할 경우에는, 흔히 그럴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지만,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에 나타난 벌금은 20%의 이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조항은 매우 쉽게, 또한 매우 큰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두 번째 난관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해결책은 더욱 중요하였다. 신명기 15:1-8에 따르면, 유대인들 사이의 모든 빚은 일곱째 해(안식년)가 되면 면제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15:9-11은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채권자가 대출을 거부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다가올수록 채권자들은 돈을 빌려주기를 더욱 꺼려하였기 때문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더욱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해결책은 차압 동의서(prosbul)였는데, 이것은 심지어 일곱째 해 동안에도 아직 갚지 않은 대출금을 법정으로 하여금 상환받도록 허락하는 문서였다. 그들은 성서의 율법이 일곱째 해에 개인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지만, 법정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해결책을 처음 도입 것이 위대한 랍비 힐렐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는 B.C.E. 1세기 중엽부터 C.E. 1세기의 첫 10년대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 마틴 굿맨은 “힐렐이 실제로 차압 동의서를 만든 것과 관련이 있던, 아니면 없던 간에,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는  이런 제도가 네로 황제 초기에, 아마도 법정의 지지를 받아,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1982:422)고 말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임박하게 되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는 문제는 힐렐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왜 이 문제가 그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대에 해결되었는가? 만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싶지만 빌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부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싶지만 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차압 동의서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부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런 제도를 원했던 것은 정확히 그들이 대부업에 투자할 만큼 과잉 재산이 많았던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일곱째 해가 다가와도 돈을 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지만, 그 법이 바뀐 것은 부자들이 그런 제도를 더욱 원하게 되었던 때였다. 즉 C.E. 1세기가 시작되기 전후에 힐렐이 이런 제도를 주창했던 아니했던 간에, 부자들로서도 이런 제도가 절실했기 때문에, 법이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예수 당시의 가장 큰 사회적 모순이며 “유대 사회가 속속들이 ?게 된 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동안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유입된 과잉 재산이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 즉 극심한 빈부격차로서, 부자들의 막대한 잉여재산을 통한 대부업의 결과로 농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되어, 결국 농민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유대-로마 전쟁 초기에 “요세푸스가 인솔했던 의적 군대와 그를 지원했던 그 지방의 농민들은 그 지방의 수도들이었던 셉포리스나 티베리아스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도시들에는 세금에 대한 사정(査定)과 빚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2) 비정치적 예수상에서 정치적 예수상으로 200년 전에 이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이 세상의 나라”로서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된 것이며, 예수의 처형도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여,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를 비정치적 인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 즉 이 세상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행동에 의해 곧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올 것을 예상하였던 인물로 간주하여, 예수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물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셋째로는 현대 신약학이 개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여, 예수가 개인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지,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적인 견유철학자 전통에 서서 개인의 생활방식에 관해 말한 현인으로서 간주하는 입장도 이런 개인주의적 이해의 연장이다.
넷째로, 현대 신약학자들이 주로 유럽과 북미의 백인 남성 중산층 출신으로서 교회와 관련된 기관에서 교수직에 있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의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아래로부터의” 시각, 학자들의 현장이 신학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학제간 연구와 교차문화적 관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어, 예수 전승을 재조명하게 된 결과, 오늘날 예수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물, 즉 사회적 생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회적 비전을 제시한 “정치적”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3)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에서 사회적 혁명가, 체제전복적 지혜의 스승 (자생적 견유철학자)으로 요하네스 바이스-알버트 슈바이처-루돌프 불트만 이후의 묵시종말론적 합의가 1980년에 와해되었다. 묵시종말적 예언자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오실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 초대교회의 고백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금식하는 세례요한(fasting John)과 잔치하는 예수(feasting Jesus)의 전략적 차이: 현재적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였으며, 그의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전략은 당시의 착취체제의 심장을 겨냥한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a peasant Jewish Cynic)였다. 그의 농촌 마을은, 견유철학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었던 셉포리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도시와 충분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저지대 갈릴리의 농촌 마을들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전략은 그 자신에게 암묵적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명시적이었던 전략으로서,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free healing and common eating)를 결합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권력의 위계적이며 후견인 체제를 당연시하던 것을 단번에 부정한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전략이었다. 예수 자신이 단순히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브로커로 해석되지 않도록, 그는 항상 옮겨다녔으며, 나자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었고 중보자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기적과 비유, 치유와 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며, 사람들 서로 간에도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하였다.
(2) 하나님 나라: 브로커 없는 나라, 성가신 자들과 천민들의 나라 크로산은 예수의 사회적 비전이었던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가난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의 당시 용법을 추적하여, 하느님 나라가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였음을 밝힌다. 하느님 나라는 천민들의 나라였다는 말이다.
예수는 충격적인 역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Poor)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Destitute)에 관해 말했다. 이런 사실은 루가 6:20과 마태오 5:3 모두의 배후에 있는 말씀복음 Q의 그리스어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들에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페네테스, 즉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프토코이, 즉 극빈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 가난이 아니라 거지 신세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농민들이나 장인 계급의 하느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자들, 천민들, 소모계층의 하느님 나라를 말했던 것이다.
크로산은 또한 겨자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누룩의 비유, 진주의 비유 등을 들어 하느님 나라가 성가신 자들의 나라임을 규명한다.
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 식물이 속담처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해서 1 미터 정도의 작은 관목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겨자는 원치 않는 장소에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특별히 원치 않는 경작지에 새들이 꼬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과 같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잡초와 같은 것도 아니라, 얼얼한 맛을 지니고 있으며 경작지를 망쳐놓을 위험성이 있는 겨자 식물과 같다는 말이다. 즉 그 나라는 단지 조금만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주의 깊게 통제된 적은 분량만을 원하는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3) 성전의 상징적 파괴
예수 주변에 병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회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다수 소작농들이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림으로써 병에 걸리게 된 것이지만, 제사장들은 개인적인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가르치고, 병이 나을 경우 그 몸이 깨끗해진 것을 제사장이 선언하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제물을 바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브로커 노릇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성전과 자비심을 상실한 제사장들은 근엄한 얼굴로 벼룩이 간마저 빼먹는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을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고 본다. 크로산은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성전 사건을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연결시킨 점이라고 논증한다.  그 대답은 마르코 11:15-19에 있는데, 이 구절은 흔히 성전 정화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파괴이다.  소용없는 무화과나무가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성전도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 그 행동은 물론 성전을 물리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상징적 공격이다. 그 행동은 성전의 재정적, 희생제사적, 예배적 기능을 “중단”시킴으로써 성전을 “파괴시킨” 것이다.

III.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목회적 의미

한국사회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의 “組暴 국가”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비합리성, 비민주성, 배타성, 수동성, 레드 콤플렉스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다(박노자, 최상천, 김진호). 또한 교회는 타계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특히 연고주의가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교회 역시 지역교회의 계층화로 인해 사회적 연고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합리성, 민주성, 개방성, 능동성을 위해 공헌할 수 있으며, 연고주의 극복 가능성의 길을 열어준다.

(1)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는 아니다(예: 몰몬교. 통일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현대 이후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루돌프 불트만).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성인들의 정직한 물음들을 불신앙의 소산이라고 간단히 치부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종교적 무지의 해결자가 아니라, 종교적 무지의 원천이 되어왔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은 역사학, 문화인류학, 본문비평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예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없었으며,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세미나]의 공동작업의 결과 때문이다. 최근의 예수 연구는 기독교의 뿌리를 역사적 예수 위에 바로 세우게 한다.

(2) 최근에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젊은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함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즉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재림,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등,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넌센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이런 전통적 교리들에 파묻혀 있던 예수를 발굴하여,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특히 이런 전통적 교리들의 신화적 언어들과 세계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예수의 모습 위에 덧칠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준다는 의미에서, 전근대적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교회의 합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3)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왔다. 이것은 예수가 보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바라본 결과이며, 예수가 믿으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믿은 결과였다. 크로산과 펑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손가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가 보라고 가리킨 것(하나님 나라)을 보라고 말한다. 예수를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진정한 인간 예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예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수동태로 되어 있어 우리의 신앙도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니이체의 지적대로 교회가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노예의지를 가진 자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버린 원인이 바울의 구원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교회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신화를 믿은 것에서부터 예수의 실천(제자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구체적 길을 제시한다.

(4) 예수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 개입을 믿고 기다렸던 묵시적 종말론자로 이해되어 왔다. 슈바이처 이후 최근의 샌더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세상의 종말을 가르치고 그 종말을 믿고 준비하도록 가르쳤으나, 그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의 종말론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슈바이처). 그러나 크로산과 펑크, 보그는 모두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의 역사참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의 믿음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의 수동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능동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5)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수퍼맨”처럼, 외계로부터 이 지구에 기적적으로 출생하여 활동하다가 죽은 후에 다시 외계로 돌아간 “외부적 구원자”일 경우, 그런 외부적 구원자를 믿는 사람들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이 되는 반면에, “내부적 구원자”일 경우에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신자들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펑크는 소위 “예수의 보혈에 의한 代贖的 구원의 교리”({잃어버린 복음서}를 쓴 버튼 맥 교수에 따르면, 대속의 교리는 히브리 전통에서는 저주였으며, 그리스 전통에서만 군인들이 도시국가를 ‘위해’, 즉 “남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를 폐기하고, 묵시종말론적 요소들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6) 예수는 당시 끼리끼리 노는 브로커 사회에서, 그 브로커 체제의 심장을 겨냥하여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실천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병자들과 천민들을 품어 안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연고주의를 타파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는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의 핵심적 동사(“들어””축사하고””떼어””나누어주었다”)는 예수가 주인과 하인의 일, 남성과 여성의 일을 모두 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오늘날 매우 배타적인 집단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들에게 더욱 겸손하게 관용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불상이나 단군신상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기독교인들이 “내부인들”이라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지 못할 “꼴찌”들이 될 운명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계도처의 분쟁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종교가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요소라기보다는 여전히 전쟁과 증오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북한의 기아현실과 남한의 고실업과 고용불안 사회 속에서, 크로산과 펑크의 책은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반사적이익과 공권의 차이

일단 공권(公權)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게요.
공권은 사권에반대되는 말입니다. 즉 사권이라고 하면 사인에 대하여 가지는 권리죠. 어떤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가져갔을 때 소유권반환청구권이있지요. 그리고 돈을 빌려줬다면 그 돈을 갚으라고 할 수 있는 채권이 있지요. 이렇게 사인에 대하여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는권리가 사권입니다. 그럼 공권은? 네 바로 국가와 공공단체에 대해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공권입니다. 예를 들면공무원으로 일을 해서 그 보수를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것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 재판을받을 권리, 평등하게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부당하게 체포당하지 않을 권리 등등 입니다. 이러한 권리는 헌법이나행정법상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반사적 이익은 무엇인가.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집에 멋진 동상을 하나 세웠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동상이 너무 멋있어서 그 동상을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그 집 근처를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 옆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던 상인은 그 집 주변으로 사람이 많이모이게 되자 덩달아서 자신의 가게의 매상이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 상인은 매우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의 집에 있던동상을 치워버렸습니다. 그러자 그 상인의 매출이 낮아집니다. 그럼 그 상인은 그 사람에게 다시 동상을 설치하라고 요구할 수있을까요? 그 집 사람은 그 상인이 잘되라고 자기 집에 동상을 세웠을까요? 다른 예를 들겠습니다. 요즘 신행정수도 이전 뭐 이런소리 많이 나오는데, 행정수도를 저기 충청도 어딘가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 도시의 사람들이 많은 혜택을 누립니다. 땅값도오르고 가게도 많이 생기고, 인구도 늘어났습니다. 행정수도를 다른 곳으로 다시 옮기려고 합니다. 그 주민들은 옮기지 말라고요구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 혹은 국가가 자기의 특정 목적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했는데 그 사람 또는 국가가 본래 목적으로 두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되는 경우, 그것을 반사적 이익이라고 합니다. 좀 이해가 가십니까?

공권은 권리이고 국가에 대해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리를 침해하면 손해배상이라든지 하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반사적 이익은 애초에 그 이익을 받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