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그 여자와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 첫 모임에서였다.

처음 만나는 수많은 사람 중에 빛나 보였다. 다른 사람과 다른 빛깔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그런 그녀에게 만나보자는 얘기를 하고 3년 여의 시간을 만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의 시간 동안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다.

서로의 가족에게 결혼을 의논하고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 여행도 무사히 다녀왔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생겼는데, 돌연 같이 살기 싫다고 하였다.

왜 그런지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가 나에게 있다면 말해주면 고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냥 싫어 졌다’는 것이었다.

싫어 진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고치겠다고도 했지만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가 나올 때까지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세상에 나왔다.

병원에 찾아가서 퇴원 수속을 하다 보니 자신의 아이로만 출생신고를 마쳤다.

그렇게 마음을 되돌려보려고 노력했지만 헛 수고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몇 번이고 다른 사람이 생기거나 마음이 바뀌면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아무 문제없는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마저도 거짓이었다.

더 이상 노력으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여자는 나에게 마음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3년 동안 두 사람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단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난 지난 3년 동안 당신을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

하이바쓰고

어머니께서는 젊은 시절 간호장교이셨고, 중위 계급으로 전역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런 어머니의 사진 한 장을 보실 때마다 놀리시곤 하셨다.

간호장교 어머니의 전투복 차림

철제 방탄모를 쓰지 않으셨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아버지께서 복무하실 때는 철제 방탄모를 착용하셨기에 어머니께서 쓰고 계신 방탄모(라 쓰고 하이바라 읽는다)가 플라스틱 재질의 가벼운 안전모정도였기에 이런 놀림을 하셨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은 부러움의 표현

아버지께서는 육군 병장으로 전역하셔서 우리집에서는 전역시 계급이 가장 낮으셨다.1 그럼에도 이런 대화가 오갈 때면 ‘대장2 위에 병장3’이라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장교로 복무하고 싶으셔서 시험까지 치르셨지만 색약4으로 보병 일반병으로 가실 수 밖에 없었다.5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서 장교로 복무하셨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시거나 흠으로 생각하시기 보다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군 입대할 시기가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는 장교로 복무하기를 원하셨다. 하지만 동생이 1년 차이로 대학에 입학하였고 당시 우리 집안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당장 지원할 수 있는 부사관으로 지원할 수 밖에 없었다.6

  1. 어머니께서는 대위, 글쓴이는 중사, 아버지께서는 병장[]
  2. 군의 계급 중 가장 높은 별 4개로 상징되는 계급[]
  3. 군의 최하위 계급군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
  4. 적녹색약이셨기에 군 장교로 부적합 판정을 받으셨다[]
  5. 관련 정보는 여기에서 얻으실 수 있다.색맹(색약)테스트와 제한되는 직업[]
  6. 부사관으로 지원한 것이 나에게는 다행으로 여겨지는 것은 군 입대 후 2년 동안은 정말 말 그대로 ‘인간’이 되질 못한채로 살았기에 만약 장교로 지원하여서 2년만 군생활하고 나왔다면 ‘인간’이 되지 못한채로 나와서 사람구실도 못하는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미루나무 한조각

아버지께서 생전에 이사 때마다 소중하게 챙기시던 물건이 있다.
투명한 아크릴 안에 나무조각이 들어있던 기념품이었다.

미루나무, 한반도 위기 부르다

위의 기사에 등장하는 미루나무 조각이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병사들에게도 주어졌던 모양이다.

그 미루나무 조각은 아버지께서 미국에 가시면서 가지고 가셔서 미국에서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 홀로 한국에 돌아오시면서 따로 챙기시지 않아서 지금은 없다.

하지만 당시 받았던 표창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2사단장이었던 Morris J. Brady로부터 받은 표창장

표창장에 등장하는 브래디씨는 당시 한미 2사단장이었고, 계급은 소장이었다.

북한군 막사 포격 계획 세웠다

오늘은 여러모로 아버지가 생각나는 날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면서 동네 형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그렇게 타고 싶었더랬다.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 놀이터에 가면 항상 자전거를 타고 있었고, 나는 그저 친구들과 뛰어노는게 전부였다.

내용을 이어가기 전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초등학교는 산등성이에 있어서 학교 운동장이 끝나는 지점에 경사가 5m가량 있고, 그 경사면이 끝나는 지점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철조망이라고 해서 지금과 같이 튼튼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저 녹색 그물로 되어 있는 그런 모양의 구조물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10m가 넘는 절벽이 있었다. 그 아래에는 가정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양새였다.

언젠가 용기를 내어 그 형에게 한 번 탈 수 있겠냐고 물어보니 의외로 바로 핸들을 내 주었다. 어린 시절 자전거를 이미 배운적이 있었고, 그 동안 타고 싶어했던 마음을 가득 담아 페달을 밟으며 신나게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법 오래 탔던 것인지 형은 이제 그만타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에겐가 멋지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나는 그 경사로가 있는 운동장의 한 구석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멈추어 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브레이크를 힘껏 쥐어도 자전거는 멈추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끝네 살포시 올라와 있는 연석을 넘어서 경사로쪽으로 몸이 날아갔다. 마치 이티의 한 장면처럼 자전거와 나는 한 몸이 된 듯이 날아갔다.

운동장 끝네 닿기 전 자전거 주인이었던 형은 무엇인가를 힘차게 외쳤지만 나는 그게 그만타라는 말이었겠거니 하고 무시했다. 다행스럽게도 돌에 부딪히며 속도가 줄어서였든지 생각만큼 빠르지 않아서였든지 나는 그물 구조물 바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아래로 떨어졌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기로라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에피소드이긴한데, 사실 이것보다 위험한 순간은 더 많다. 또 언젠가 생각나면 적기로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짧지 않은 지난 시간 정리

2012년 이후로 글을 쓰지 않았는데,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개인적인 성향이 바뀌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긴 글을 쓰고 공개하는데 생긴 부담감이었는지도 모른다.

2012년 이후로는 계속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한 과정을 마치고 또 다른 과정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으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낄 정도의 힘든일을 겪게 되었다.

인간과 관련된 일이라서인지 원래 정신적으로 약한 탓인지 그 일로 인해 3년의 시간을 허비했다. 허비했다는 말 이외의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정신적으로 도피할 곳이 필요했던 탓인지 평생 해 보지도 않았던 게임을 시작하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게임을 하는데 소비하게 되었다.

공부했던 분야에서 계속 종사하고 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내용들과 관련되어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 관심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맡은 프로젝트를 지속하는데, 밑거름이 되고 있다.

인생사 뭐 있나!
그냥 이렇게 사는게 인생 아니겠나!

겁이 났을 뿐

아래의 몇 개 안되는 최근 글 중 몇 글의 서두에는 종교 체험이기에 비난은 거절한다는 문구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단절을 유도하고자 하는 목적은 당연히 아니지만 그렇게 읽으시는 분들이 계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후의 글에는 해당 경고문구(!)를 넣지 않으려고 합니다.

해당 글들에 경고 문구까지 넣은 것은 단지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블로깅하는 많은 분들은 이미 이런 댓글들에 적절하게 대처하시며 감당하고 계시죠. 하지만 감당하려기 보다는 피하기 위한 방법이었죠. 좀 소인배스러운 행동이지요.

앞서 작성한 모친과 관련된 글에 욕보이는 댓글이 달려 있었을 때 위로를 해 주시던 분들의 고마움 이후에 다시 한번 생각하고 마음을 다졌어야 했는데, 그 과정이 생략된 채 지금까지 지내왔기에 생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거를 것은 걸러야 겠지요. 두려움을 피하기 보다는 감당해 내는 것이 어른의 행동일텐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 아직도 어린 아이에
불과한가 봅니다.

돌들 모두 모아와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최대 공약으로 들고 나왔던 한반도 대운하 이야기는 벌써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논의 되고 있다. 이전에도 민노씨는 몇 번에 걸쳐 관련 포스팅을 해왔는데, 문득 이 글 <한반도 대운하(경부대운하)에 대해 알고 싶은 두 세가지 것들 – [피디수첩] 보도를 토대로>을 보니 군에 있을 때의 한 지휘관이 생각이 났다.

그는 처음으로 입대해서 자대배치를 받고 간 부대에서 대대장이었는데, 보통 대대장이 중령이었던 반면에 그는 소령의 계급을 달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소령(진)1이었다. 이제 곧 중령으로 진급하기 위해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는 것이다.

곧바로 부사관(하사)으로 입대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른채 부대를 배치 받아 대대를 거쳐 중대로 갔는데, 대대장에 대해서 말이 많았다. 대대장은 조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주어진 부대운영비를 손대지 않고는 조경을 할 수 없으니 나름 돈을 별도로 들이지 않고 꾸미기 위해 전 부대에 있는 돌들을 모아오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대대와 떨어진 곳에 영외 중대에 있었는데, 그 근방에 있는 돌들도 모아서 차로 대대까지 배달(!)을 해줘야 했었다.

어쨌든 그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부대를 꾸며(?) 가서 그의 대대 지휘관으로 임기를 마쳐가던 어느날 소속 사령부에서 높은 양반들2이 와서 부대를 순시하는 중에 돌을 모아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를 보이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만든 것 중에 대형 물레방아에서 터졌다. 다른 조경물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는 그 곳을 지나면서 설명은 들은 그 사람은 꾸지람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물도 잘 나오지 않는 곳에 물레방아를 멋으로 굳이 만들어야할 이유가 있었냐는 것이었다. 부대 환경 조성도 중요하지만 부대 사정에 맞는 꾸밈을 해야 한다는 덧말이 있었다고 한다.

  1. 지금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중령(진)이겠지만 당시에는 진급되기 전의 계급에 (진)을 더해 표현했다.[]
  2. 아마 중령 이상의 계급[]

조선왕조실록의 차씨들

민노씨의 글을 읽다가는 ‘실용’주의와 언어 제국주의: 이명박 정부의 영어 이데올로기를 접하게 되었는데 해당 글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글의 링크를 따라가보니 조선왕조실록의 홈페이지가 나왔다.
이러저리 돌아다니다보니 당시의 인물들을 성씨로 검색하는 메뉴가 있어서 본관(연안차씨(延安車氏))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총 5건이 나왔다.

성명 신분 시호 본관 생몰년
차약송(車若松) 기타시대 – 무인 연안(延安) ? ~ 1204
차예량(車禮亮) 여명(汝明) 풍천(風泉) 충장(忠莊) 연안(延安) ? ~ ?
차원부(車原頫) 사평(思平) 운암(雲巖) 문절(文節) 연안(延安) 1320 ~ ?
차천로(車天輅) 문반 부원(復元) 오산(五山) 연안(延安) 1556 ~ 1615
차충량(車忠亮) 여서(汝恕) 연안(延安) ? ~ ?

음… 필자는 연안차씨(延安車氏) 강렬공파 39대손이다.

말이 나온김에 자료를 더 찾아보니 연안차씨의 유래도 있다.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림(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때 몽은 자손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 성자(姓字)를 전자(田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을 무일(無一)로 하였다.

조금 더 파고들어가봤자 머리만 더 아플 뿐이기에 여기서 마무리한다.

철인28호 쌤! 삭발은…

이 기사를 보면서 생각이 났는데, 머리카락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때는 필자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주가 흐르지 않아서 생긴일이다. 반이 정해지고 학기가 시작되고 담임 선생님들은 각 반의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익히기 바쁜 시기인 것이다.

처음에 배정된 반에 들어앉아 맞이했던 담임 선생님의 미소에 속았다. 웃는 얼굴은 미소가 아니라 사악함으로 변해버렸다. 단 며칠만에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면 당신의 학창 시절에는 여름에도 시원하게 빡빡머리를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런 발언을 학기가 시작되고 여름이 다 되어 가는 시기에까지 몇 번인가 했는데, 아~ 그렇구나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필자가 머리를 빡빡밀고 학교에 등교한 날에 발생했다.

하필 그 날 다른 학생도 머리를 빡빡 밀고 온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좀 논다는 친구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본다.

대뜸 반에 들어오시더니 조회를 하면서 삭발한 녀석들 왜 그랬냐고 하면서 맨 머리를 손바닥으로 다다다다다다다다닥~ 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무슨 반항하는거냐 어쩌냐 하면서 계속 때린다. 아~ 맨 머리를 맞은 건 둘째 치고 당신께서 시원하다고 해서 한번 밀어본 것인데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어 황당했다.

그 당시만해도 매우 내성적이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는 좀 놀긴 했어도 성격이 매우 온화하여서(?) 가만히 있었다. 웃어 넘기고 말았다.

아~ 정말 그 머리를 어떻게 자른 머린데!!

삭발을 하고 집에 들어선 순간에 그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조모님께서 동거하고 계셨는데 집안에 들어서자 눈빛이 바뀌시더니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시냐고 여쭈우니 말 없이 눈물을 그렁이신다.

왜 그러셨을까.. 왜 눈물을 그렁이셨을까..

쨌든 철인28호 쌤~ 그땐 정말 너무 하셨다구요!!

괘기

marineblues – 20071202

할머니, 증조 할머니!

성게양의 조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관련 에피소드가 올라왔다.

괘기, 개대기1

참 정겨운 단어이다. 필자의 증조모님은 1898년생이셨으며, 105세까지 이 땅에서 살아내셨다.

증조모님은 그 연세에도 꽤나 총명하셨던 분이었지만, 일부러 그러시는지 헛갈리는 치매 증상을 가지고 계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조부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더 이상 유선여관에서 안주인으로 지내실 수 없게 되시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좁은 집안에서 조모님과 함께 지내었는데, 그에 더해 증조모님도 함께 모시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증조모님께서는 거동이 불편하셨고 말씀도 그다지 많지 않으셨다.

가족들이 집안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말상대가 없어서였는지, 그 이전에도 그러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간간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시면 총명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충분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증조모님의 소천일에는 정말 슬픔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상을 치르면서 호상이라며 사람들이 심하게 울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필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조부님과 대등한 애정을 당신의 방식대로 쏟으셨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증조모님께서 필자를 부르던 호칭이 더욱 그리운 순간이다..

빙조야~
  1. 전라도 사투리로 고양이를 이르는 말이다. ‘괘대기’이지만 개대기로 발음하기도 한다[]

누..ㄴ..누구요!

올해 여든 넷 되신 친조모님이 함께 살고 계신다.
어제 저녁에 조금 일찍 잠 자리에 드시고는 새벽에 눈을 뜨셨단다.
그리고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섰는데, 크~~ㄴ 사람 그림자 하나가 보여서 놀라

누…ㄴ…누구요! 거기 누구요!

하고 소리치셨단다. 그리고 나서 잠시 생각해보시다가는 웃음을 터트리셨는데, 다른 가족들이 깰까봐 크게 웃지 못하시고는 거실에서 입을 막고 한참을 웃으셨단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방을 바꾸게 되셔서 뒷 배란다가 보이는 방에서 주무시게되었는데, 똑바로 누워주무시다가 새벽에 일어나시면서 배란다쪽으로 돌아있는 상태로 일어나신것!

그래서 반대쪽에 있는 거실로나가는 문으로 몸을 돌리셨는데, 배란다쪽에 있는 가정집에서 그 새벽에 불을 켜 놓았는지 그 밝은 빛에 할머니의 그림자가 벽에 생긴것이었다.

그걸 보시고는 할머니께서 놀라신것이다.

그리고 거실에서 한 참 웃으신 것은 자신의 모습에 놀란 모양을 생각하시면서 그 전에 생긴 또 다른 일이 생각나셨기 때문인데, 그것도 비슷한 일화다.

할머니의 친인척 중에 집에 큰 거울이 있었던 집에서 그 집의 어머님께서 일어나셨는데, 그만 불이 꺼진상태에서 거울 속에 누가 있으니까 놀라신 모양인데, 도…ㄷ..도둑… 도둑이야 하시면서 펄쩍 펄쩍 뛰셨단다. 그 소리를 듣고 그 집 아들이 나와서 어머니 무슨일이에요? 라고 묻자 저~ 저~ 저그 도둑넘이 폴짝 폴짝 뛰고 있어야~ 하셨단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저거 어머니 모습이잖아요. 어머니께서 지금 폴짝 폴짝 뛰고 계시잖아요 라고 대답했단다.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놀라신 것을 알아채시고는 그 일이 번뜩 생각나셔서 거실에서 가족들이 깰까싶어 크게 웃지도 못하시면서 한참을 웃으셨단다.

연필 좀 줄게

“북한 삐라 주워와도 연필 안줘요”를 보자마자 생각난 안 좋은 추억이 하나 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0년이 조금 안된 때였는데, 당시에 잘 놀던 친구 둘과 함께 놀이터로 산으로 놀러다니던 때의 이야기이다.

살았던 동네가 성신여고가 있는 산동네였는데, 친구들과 놀다가는 한 친구가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전단지를 주웠다. 그런데 이 친구 주워서 그대로 경찰서에 가져갔으면 좋았을일인데,
주웠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주운 것이 달랑 한장이기는 했지만 삐라를 주우면 학용품을 받는다는 사실을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어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주웠기 때문에 더 기뻐했고 그런 이유로 자랑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자랑이 화근이 되었다. 동네에서 놀던 한두살 위의 형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좀 보자며 달라하여 줬더니 그대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경찰서에 가져갔을 거라며 황당해하는데 금새 경찰서에 다녀온 그 형이란 아이는 연필 한다스를 받아왔다. 그래서 우리들과 마주칠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미안했는지 연필 좀 줄게 라며 받은 연필 중에서 몇 자루를 주는 것이다.

그 형이라는 아이 뻔뻔하게도 마치 자신이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줬던 기억의 한 조각이다.

내가 너 보러 왔다냐~

2007/10/02 – [나의/과거사] – 유선여관 2에서 이어지는 글이면서 다른 제목을 달아놓은 이유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태어나던 해에 관련된 이야기는 2007/06/23 – [나의/과거사] – 아들에게에 작성되어 있다. 그 후로 며칠이 안되어 조부님께서 장손의 득남 소식을 듣고 재빠르게 광주에 올라오셨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들어오시는 조부님을 반기며 아버지 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드렸는데, 글쎄 조부님께서는 그런 아버지의 인사를 뿌리치시고는 내가 너 보러 왔다가 내 손주 보러왔지 라고 하셨단다.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서운하셨던지 지금도 종종 이야기 하시면서 서운한 감정을 얼굴, 몸짓 등으로 표현하시곤 한다.

유선여관 2

친조부님께서 돌아가시던 해는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는데, 그 당시 그로부터 몇 년후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여관 근처에 솔숲이
캠핑장이 되고 또한 공원 내라고하여서 여관과 붙어있던 상가가 뜯겨져버리는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다행히 문화재로 지정되어 복원되고 있다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

친조부님께서는 필자를 유독 사랑해주셨는데, 그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그 사랑의 잔향이 여전히 느껴질 정도이다. 친조부님께서 그토록 사랑해 마지 않으셨던 이유는 연안 차씨 강렬공파 39대손으로, 종손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위의 언급한 친조부님의 장례식에서도 종손으로서의 영정을 들고 여기 저기 조부님께서 돌아다니셨던 길을 되짚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날을 유독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영정을 들고 있는 필자를 중심으로 대둔사의 승려들이 좌우로 좌~악 줄지어서서는 되짚었기 때문이고, 장례식 중간에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면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유선여관에서의 추억은 여럿이 있는데, 조부님과 함께 하셨던 증조모님과의 추억이 또 연결된다. 이 여관은 전통가옥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부엌도 전통 가옥의 부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부엌에는 작은 방이 딸려 있었는데, 여관의 안 주인이셨던 증조모님께서 그 방에서 지내시곤 하셨다. 밥을 짓는 아궁이와 직접 연결되어 최고의 화력을 지닌 방이기도하고 거동이 불편하신 증조모님께서 식사를 그때 그때 하시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여름에는 여관 뒤편에 있는 개울에서 목욕도 하고 물장난도 치고 고동도 잡곤 했다. 물론 친인척들과의 만남도 잦았다. 어린시절의 그곳은 좋은 추억들로 가득한 곳이다.

여관에서는 진돗개를 키웠는데, 그 개드로가 강아지들과 함께 놀기도 하고 키스(!)도 했다.

조부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는 공원 지정도 그렇지만, 증조모님을 모시고 서울에 올라와 함께 살게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소천하셔서 나름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사건들도 적지 않은데, 이와 관련해서는 언젠가 포스팅할 기회를 엿보겠다.

유선여관 1

박상민은 1989년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 역을 맡아 데뷔했으며 영화, 드라마를 통해 꾸준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최근엔 SBS TV 드라마 ‘불량커플’에 출연했다.

이 기사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이 사람 아직 결혼 안 했나아~ 장군의 아들 촬영지 이다.

첫 번째 들었던 생각은 그저 단순한 내용이어서 패쓰~ 하지만 두 번째 생각은 필자와 매우 관련이 깊다.

장군의 아들의 촬영지인 유선여관이 바로 관련의 첫 접점이다.

대둔사와 유선여관

대둔사연못한편
두륜산 자락에 자리잡은 대둔사는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둔사는 한때 대흥사로 불리우다가 1993년부터
예전 이름을 찾아 대둔사로 불리고 있다.
대둔사는 우리나라 31본산(本山)의 하나로 대한 불교조계종(佛敎曹溪宗) 제22교구 본사이다.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응진전앞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북미륵암 마애불(보물 제4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천불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 서산대사 부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등 많은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천불전에 안치된 천불상은
지난 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로 지정됐다. 서산대사의 유물과 유적이 보관된 표충사는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밖에도 서산대사 유물관에는 많은 문화유적들이 잘 보관되어 있다.
유선여관경내버스
종점 바로 위쪽에는 서편제에서 판소리하는 장면이 촬영된 유선여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또한 장군의 아들 1. 2. 3 가
촬영된 곳으로 한국영화는 두륜산도립공원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선여관은 1930년대에 지어진 여관으로 현재
전통보존가옥으로 지정되어 보수중이다.

– 입장료 : 어른 2000원(2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1200원), 어린이 1000원(800원)


…………..( ) 안은 30인 이상 단체요금

– 주차비 : 승용차 1000원, 버스 2500원


이 유선여관은 위에 나온 것처럼 영화의 촬영지로도 사용되었는데, 그 여관이 필자의 친조부님께서 운영하시던 여관이었기에 더욱 깊은 감정이 녹여진다.

여튼 이 유선여관에서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어적도록 하겠다.

신문의 이빨~

<web 2.0 미디어를 위기상황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을 보고 있으니까 이전에 군 복무시에 고참과 관련된 얘기하나가 생각난다.

국방일보에 났던 기사라서 검색해서 링크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는 없지만, 그 당시 고참인 전 중사와 그의 형제들은 군에서 복무중이었다.

그렇게 장관들과 오찬을 나누고 며칠후에 기사가 난 걸 읽는 순간에 필자가 함께 있었다. 기사를 읽더니 고참이 하는 소리

하여간, 기자들 이빨1하나는 알아줘야한다니까.. 난 그 자리에서 한 마디도 안 했는데, ‘형님들이 함께 군생활 하시니까 든든합니다’라고 내가 말했데.. ㅋㅋ

뭐 대략 위와 같은 대사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1. 사실 원래는 입발이라고 써야 할 듯하지만, 당시 사용했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자연이 절 불러요~

수업시간엔 자느라 못 들었던 것 같구, 동생이 시험 공부하면서 화장실에 가고 싶다라는 표현을 공부하는 걸 본적 있었다. 그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었는데, 오늘 문득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3학년생이 일기를 블로그에 기록하는데 그 포스트들로 초등학교 3학년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을 잠시 느낄 수 있다. 그 중에서 다음의 일기를 보면서 생각이 나게 된 것인데, 아래 인용구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방문할 수 있다.

나는 안심이 됐지만 또 만약을 준비해서 똥이 마렵다는 말은 영어로 배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처 : 상우일기

그 당시 동생이 공부했던 표현은 Nature calls me. 또는 Nature is calling.로 기억되는데, 이걸 보고 문득 기억난 건 그걸 직접 사용했던 기억이었다.

영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화장실에 가려고 손을 들고는 쌤~ 자연이 절 불러요~ 라는 식으로 한글화해서 써 먹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반에서는 최소 3차원 이상의 정신세계를 가진 친구로 인식됐겠지만, 나름 스스로는 즐거워했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친한 친구녀석들에게서 질문을 받고 답해줬다.

뭐 지금도 고차원의 사고방식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지만 그 당시에도 적잖이 고차원이었다.

왜 블로그를 시작했을까?

킬크님의 나와 Tistory와의 인연을 더듬어 보면…를 보면서 블로그를 왜 시작했을까로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다.

제일 처음 블로그를 만든건 아무래도 싸이월드의 미니홈피이다. 미니홈피 서비스 초기에 흥미로 가입했다가는 그대로 방치해 두고는 미니홈피 열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사람들이 점차 미니홈피에 시들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시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 열풍이 지나고 나서 시작하게 되었냐면 사람들이 필자가 찍는 사진을 퍼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공간에 있는 글들을 보면 블로그 개설일보다 더 전의 글들이 있는데, 그 글들은 네이버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이었다. 네이버 블로그를 만들었던 것은 아마도 그저 기록을 남기기 위한 단순한 동기였다.

사실 그 뒤로 말년 이후 줄넘기와 체중 관련 글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후에 운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리고 이 공간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미니홈피에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기록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 공간에 있는 글들 중에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들은 없는데, 아무래도 미니홈피는 계속 해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고, 그다지 사진 외에는 글이라고 써 놓은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스토리의 초대신청을 미니위니에서 해 놓고 초대를 받은 후 바로 모든 글들을 옮겨 오고 예약을 통해서 올린 시간을 그대로 적용하여 글을 옮겨오게 되었다.

사실 이전 블로그가 테터툴즈였다면 별 어려움이 없었겠지만, 네이버 블로그와 파란 블로그에서 이동해야 했기때문에 일일히 수작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쨌든 지금도 그다지 성실하게 포스팅하진 않지만 되도록이면 이삼일에 한 개 이상씩을 작성하려고 노력한다.

요즘들어서 킬크님의 자신과의 약속으로 1년간 하루에 한 개 이상씩 포스팅하기를 이루어내신걸 새삼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고민하게 되는 것은 방문자수나 어떤 사람이 방문했느냐 – 도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 보다도 글 솜씨가 얼마나 늘었느냐이다.

지금까지 이 블로그를 운영해 오는 목적 중의 하나가 글쓰기 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뇌를 옮겨놓고 글을 작성하는 습관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 이상의 – 지금도 그다지 잘 쓴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오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일은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어딘가 다닌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의 친구들과의 여행 기억은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친구는 많지만 친한 친구는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그 친구들도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전산반으로 활동했었는데, 선도부와 환경봉사부1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로 갔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도착한 날 저녁에 누군가 술을 구해왔다. 소주와 맥주를 가져왔는데, 모두 모여서는 아니지만 각 인맥 집단별로 앉아서 간단하게 마시고 취해 있었다.

필자는 취기로 인해 기억이 끊긴다거나 기억의 오류2가 없어 때론 곤혹스럽기까지 한데,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취기가 올라 더워서였는지 평상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 평상에는 다른 친구와 교제하고 있었던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친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단지 지나다니면서 인사를 하거나 몇 마디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정도의 사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였다. 그 여자친구와 교제하던 친구가 같은 반이었는데 자기 여자친구와 필자가 키스를 했다는 것이다!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던 것 뿐인데, 그걸 키스한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구나 싶은 생각이 뒤통수를 때렸다. 분명히 그 친구가 잘 못 본것이라고 계속 대답했지만 도무지 믿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 친구 얼마나 집요한지 한달 넘게 쫓아다니면서 그 문제를 두고 의심하는 것이다.

조금 더 지나니까 설상가상으로 증인 선배까지 나타났다!!! 자기가 둘이 같이 있으면서 키스하는 것을 봤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억울하기도하고 황당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니라는 답변뿐이었다. 결국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동안 시달리다가는 그 친구에게 확실하게 말해주고는 일을 마무리 지었다.

  1. 각 반별로 청소구역이 있었지만, 그 외의 지역을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봉사집단[]
  2. 잘못 기억되어지는 것, 사실 그대로 기억되지 않고 다른 기억으로 대체되는 일 따위[]

해수욕장 횡포

을왕리 해수욕장을 찾았다가 왕산 해수욕장으로 가다를 읽다보니 고등학교 때의 에피소드가 생각나는데, 그 때 가족들과 함께 해변에 간 일이 있었다. 아마도 안면도의 어느 해수욕장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모부님의 고향이 안면도였는데, 배들이 있는 곳이 집이었는데, 그 곳 뒤쪽이 방파제가 있는 바다가 있었다. 그 건너편에 해변이 있었는데, 하루는 시간을 내어 해변에 갔는데, 문제는 그곳에서 발생되었다.

해변에서 천막(텐트)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젊은이 – 물론 필자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였다 – 두 명이 오더니 자리값을 내라고 했다. 그 둘이 왔을 때 모레들이 필자의 몸을 덮고 있었는데 황당함에 고개를 올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전에 해변에서 자리세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뉴스에서 접했는데 그들이 그런 사람인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아저씨들이 뭐하는 사람들인데 자리세를 받아요?라고 항변했더니 해변이 자기들의 땅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리세를 받는다고 했다.

대번에 들어도 말이 안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유지라면 그런식으로 영업을 할 리도 없지 않은가. 2년 전 쯤에 남이섬에 사진 촬영을 위해 간 일이 있었는데, 정말 철저하게 사유지라는 것을 느끼게 할 정도로 비싼 입장료와 주차요금을 내었다. 사유지라면 그곳이 나머지 기간에 운영될 정도로 요금을 받아야 하는게 맞다고 생각되지만 그곳의 해변은 엉성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답을 듣고 그럼 땅문서나 영업이 가능한 증명서류를 보여달라고 했다. 이미 필자를 덮고 있던 모레들은 그들의 친구들과 만나 있었고 얼굴은 붉게 타고 있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 후의 그들의 행동은 마음속으로만 했던 그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라졌고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은 목격할 수 있었다. 생각같아서는 쫓아가서 영업행위(?)를 방해해 주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만류로 참았다. 그들이 순순히 물러간 것은 중학교 3학년 때 가지게 된 엄청난 덩치덕이었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그들은 그 동네에 사는 청년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여름에 오는 피서객들에게 돈을 그런식으로 갈취해서 뭘 하려고 했을까.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일까?

술 마시면 사라지는 사람들 2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술 마시면 사라지는 사람들 1 에 이어서 작성되는 글이다.

Pink님의 글을 보고 생각난 것은 사람들의 술버릇인데, 필자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때 술을 처음 마셨다. 학원에 같이 다니면서 친해진 누나와 그녀의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어느날인가 술을 마시자구 불리워나갔다. 그 때는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었는데 웬지 그날만은 기분이 좋아서 벌컥 벌컥 마셨더란다. 그 누나 남자친구가 천천히 마시라고 했지만 주는대로 다 마셔버려서는 거의 둘이서 10병 가까이를 마셔버린 듯 했다. 그리고 노래방엘 갔는데, 약 1시간 가량의 기억이 없다. 그렇다! 별다른 술버릇이 없고 단지 잠만 잘 뿐이다. 필름이 끊긴건 평생에 그 때뿐인데, 그 이후에는 끊겨본 일이 없다.

그래서 군대에서 사람들의 술버릇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는데, 좀 정리해보자면 행동파, 수면파, 감성파로 나눌 수 있겠다.

먼저 행동파는 동작이 활발해져서는 평소와는 다른 모습들을 보이게 되는데, 아마도 술기운을 이용해서 평소에 발휘하지 못했던 것들을 표출하는 듯 했다. 주사가 심한 사람들이 보면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사실 이런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필자의 경우에는 군입대 후 약 2년 정도를 술도 안 마시고 놀았는데, 고참들로부터 얻었던 별명이 콜라한캔 X하사였다. 콜라 한캔만 시켜주면 술 몇 병이 들어간 사람처럼 논다는 의미 되겠다. 뭐 자랑아닌 자랑이 되겠는데, 이게 나름의 노력으로 이뤄진 성격의 변화이기 때문에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그만두기 바란다.
행동파중에는 제목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람 쐬러 나간다고하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Pink님의 글 중에도 3차로 이동하면서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하는 부분에서 이 사람들이 생각난 것이다. 이 사람들 회식을 정리하려고 찾아보면 내무실에 간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고, 어딘가 배수로에 빠져있다던가 화장실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은 수면파인데, 필자가 이 분류에 속하겠다. 술에 취하면 잠이 들거나 꾸벅 꾸벅 졸게 되는데 명확한 과학적 증명을 알고 있는게 아니기 때문에 패스한다. 이 사람들은 그다지 술자리에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단 둘이 술 마시는데 이런 사람이면 좀 곤란하다. ㅡㅡ;;

그 다음은 감성파인데, 웬지 감상에 젖어지게 되어서는 울거나 웃어버린다. 웃는 사람은 시끄럽긴 하지만 그래도 나은편인데, 우는 사람은 정말 대책을 세울 수가 없다. 친구들을 많이 사귀면서 여자친구들이랑도 가끔씩 만나고는 했는데, 단둘이 마시면서 울어버리면 마치 죄인이라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받기 쉽상이었다. 다행히 필자에게 이런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이런 경우에는 얼른 집에 돌려보내버리는게 상책이다.

생각난 이야기를 한 페이지에 다 기록할 수 있지만, 웬지 너무 길어지는 듯해서 나누어서 쓰게 되었는데, 이번 글은 생각보다 좀 짧아져버렸다.

술 마시면 사라지는 사람들 1

아~ 먼저 이 글 미스테릭 포스팅은 당연히 아니다. Pink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 좀 적어본다.

먼저 제목인 방팅에 관한 것인데, 인터넷이 활성화 되기 전 통신을 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는데, 초등학교때는 단순히 통신 상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만 했고 실제적인 만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없었다. 겨우 장만한 컴퓨터로 전화연결이 되어 글 읽고 정보를 얻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그다지 실제적인 만남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없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서 이사를 하면서 그다지 친구들이 없었기 때문에 통신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물론 통신을 이용하는 연령대가 지금처럼 폭넓지가 않아서 동년배의 친구를 알게 되는 경우는 좀 적었지만, 그래도 통신상에서의 만남이 즐거웠다.

아!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나우누리 채팅방에서 동갑내기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몇 번 연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진전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게 이 때 였다. 그다지 진지하지 않아서였을까. 단순한 이성친구정도의 느낌 뿐이어서인지 일반적인 연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인지 더 이상의 확실한 기억이 없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 고등학교 올라가서라고 기억된다. 나우누리에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PC를 이용한 개인적인 활동은 이미 중학교 들어서면서 시작되었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만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의 만남을 시작으로 동호회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활발해졌다.

하이텔도 그렇고, 나우누리도 그렇고 채팅방에 가면 항상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채팅방에서 만나서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필자가 알고 있는 경우에 한정되기 때문이 이전에도 몇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도 천리안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리고 방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던 것이 20살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보다 군에 가서 더 방팅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나름대로 방황하고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을 때가 23살정도였는데, 월급도 꼬박꼬박 들어오겠다 두려움이 없었다. 그 때는 친구들과도 가장 활발하게 만나고 다녔는데, 친구들과의 연결점 역할을 했었다. 대게 친구들이 무리지어 노는데, 그 친구들과 모두 연락할 수 있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점차 연락하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힘들어져서 지금은 연락을 정말 가끔씩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바빠져서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전역하기 1년 전인 2003년엔 아랫지방에 돌아다닐 계획을 세우고 경상도 지방에서 전라도 지방까지 순회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마지막이었던 듯 하다. 부산에 내려가서 전역한 친구와 연락해서 만나 한잔하고는 늦은 저녁이 되고 잘 곳이 없어서 PC방에 들어가서 부산 방팅을 찾았다. 그런데 이 부산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속적으로 방팅을 하고, 놀 돈을 마련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잠시 생각난 것이 있어서 시작했는데, 끝이 없다. 너무 길어서 둘로 나누어야 할 듯하다.

사람은 역시 잘 살아야 한다.

군대라는 곳은 여러 지방, 여러 환경에서 자라온 청년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여기에서 왜 남성이라는 표현을 안 쓰고 청년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여성들도 부사관 이상의 계급으로 입대하여 군대라는 집단에 포함되어 활동하고 있고 여러 다른 환경에 영향을 받아 살아온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 생활하다보면 정말 별별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는데, 가만히 관찰해보다보면 김완섭이라는 사람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재학시절에 운동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를 바로 보려는 후배들을 빨갱이새끼들이라고 매도하며내가 운동할 때는 순수 그 자체였는데 니 놈들은 김일성 자식새끼들이 되어 있다는 주장을 늘어 놓았습니다. 학생운동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자신의 학생운동의 결과물이 바로 후배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배신한 선배가 되어 후배를 욕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중략)

     이에 김완섭과 십 년 정도 차이가 나는 선배가 자신의 결혼생활과 삶을 얘기하면서 김완섭에게 충고를 하자 김완섭은한물간 오렌지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라는 선배를 깔아뭉개는 글을 버젓이 올렸습니다.


미닉스님의 위의 글에서 보면 후배들을 욕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배에 대해서도 좋지 못한 발언을 하여 깔아뭉개고 있는데 저런 사람도 있다. 이등병 때에는 다들 그렇듯이 별 소리 하지 못하고 있다가는 – 아니 요즘엔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일병 달때가 되어 고참들(상병, 병장)에 대해 욕하는 것은 기본이요 대하는 행동 보면 정말 자기는 결코 그런 인물이 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지만 또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친구들 – 한달이상이라도 차이가 나는 후임들 – 에게는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표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형이다.

과연 그런 후임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할까 싶다. 정말 병사들 중에서도 간부로서 봐도 존경심을 품게 만드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상담하고 하는 친구들이 따르곤 했는데, 상대적으로 저 김완섭이라는 사람 같은 형의 사람에게는 기껏해야 동기들이 얘기하고 있거나 그나마 동기들도 함께 하지 않아서 후임들을 괴롭히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물론 간부로서 몇 차례 경고를 하지만 그 때 뿐이다. 그게 또 영창을 보낼만한 수준 – 구타가 아니더라도 가혹행위로 – 도 되지 않는 소심한 수준이어서 어찌 권고 외에는 해 볼 도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꽤나 엉뚱한 편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양반은 많이 지나쳤다.

아들에게

민노씨의 글을 읽어내리다가 아거셔스에 등록되어있따는 고종석 논설위원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생각이 나서 옮겨 적어본다.
아래의 글은 제가 군입대(2000년 9월 1일)하는 날 아버지께서 전해 주셨던 시이다.

아들에게

네가 태어나던 그 해는 무척 더웠단다
5월의 함성이 틀어 막혔고
위로 가던 철도가 끊겼고
통하던 전화선이 잘렸기 때문에

세상이 싫었을까 두려웠을까
한달이나 늦게 나온 네녀석으로
의사의 가운은 오줌세례 받았고
우렁찬 울음은 할애비의 기쁨이 되었었단다

한해 두해 어느덧 스물 한해 9월
5월의 함성은 공원이 되었고
끊겼던 것들은 다시 이어졌는데
그 날의 군복이 우리를 가르는구나

싫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세상을
너를 위해 십자가 진 예수님을 보면서
교관의 구령으로 대한의 남아되어
풍성한 주의 열매 맺으려무나.

필자는 1980년 7월 3일에 태어났는데, 출생지가 다름 아닌 전라남도 광주이다. 광주통합병원1에서 태어났다. 다들 알다시피 5월에 시작된 항쟁의 시끄러운 세태로 인해 그 당시 광주에서 5월, 6월의 출산 예정이었던 아기들이 한 달 정도 이후에 나오는 경우가 좀 있었던 모양이다.

그 중에 필자도 포함되는데, 예정일인 6월 3일에서 무려 한 달이나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왔어야 할 시기가 지난 후 11개월에 출생하면서 의사의 가운에 소변을 보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좀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필자는 그나마 1달이나 늦게 나오면서 무려 12시간의 진통 후에 나왔다고 한다. 오전 9시에 진통이 시작되어 오후 9시가 넘은 시간에 나왔는데, 젊은 아빠2는 그 긴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의 동생에게 그 자리를 맡기시고 병원 앞 오락실에서 오락을 하고 계셨다고 한다.

신혼 부부들에게, 특히나 새신랑에게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임신 중에 책 잡힐 일은 되도록 하지 말라는 게 다 이유가 있다.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종종 어머님은 그 이야기를 하시곤 하시기 때문이다.

당시에 이 글을 받아서 지갑에 넣고 육군훈련소와 부사관학교를 거치고, 자대에 배치받아 관사에 생활하면서까지도 몸에 가지고 있었다. 군생활 2년차 정도에 이 시가 들어있던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던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다행히 어떤 경찰분이 주워 보내주셔서 다시 찾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모습은 여러가지로 권위적이었는데, 이 시를 접해서인지 조금은 다른 존재로 느껴지기도 했다.

  1. 현재는 광주 그 자리에 없고 수도통합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성남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2. 당시 아버지는 26세[]

가요를 클래식 듣듯이 듣기

nonem_Blog에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 대한 막심의 증언 포스팅을 읽다보니 중고등학교 시절 가요를 듣던 필자의 습관이 생각이 났다.
그 당시에는 가사가 있는 음악보다는 경음악 연주음악 중심으로 들었었다.
가사가 완전히 없는 가요는 거의 없기때문에 접할 수 있는 음악들을 들으면서 음 하나하나씩 컴포져1 따위로 그려서 그 분위기를 따라 감상했었다.

그렇게 듣기를 몇년을 해대었지만, 늘어가는건 각 악기별로 분리해서 듣는 능력 뿐이었다. 그 음악에 대한 분위기를 제대로 잡아내기가 힘들었다. 점차 감각위주의 음악, 사람의 정신을 자극하는 음악들로 채워져 가고 있기에 힘들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계기는 어떤 가수의 팬클럽에서 만났던 동갑내기 친구의 말때문이었다. 가사를 안 들으면 어떻게 그 곡을 감상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도 가사를 무시하는 경향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음악 속에서 곡만으로 곡을 해석하려고 하지도 않지만, 가사를 완전히 적용시켜서 곡의 분위기를 지배해버리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전에 가사를 완전히 무시한채로 곡을 해석하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했던 것이 꽤나 그립다.

  1. 음악 작곡 프로그램 중의 하나로 도스시절 애드립 사운드 카드로 음을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다. 케이크 워크 시리즈(소나)의 건반 화면과 유사한 구성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성교육

미디어몹에서 딱정벌레님께서 아드님의 성문제에 대한 글을 올리신 것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4편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알고는 새벽에 중간시험 기간 공부 중에 짬을 내어 읽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성교육을 시킬까라는 질문에 대한 간접답변정도로 참고할 생각이었다.

관련글들 :: 중1 아들 성교육하기 #1, 중1 아들 성교육하기 #2, 중1 아들 성교육하기 #3 , 중1 아들 성교육하기 #4

필자는 아직 미혼인데다가, 아직 결혼 예정도 없는 총각이지만 성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꽤나 관심있게 지켜보는 편이다. 자녀라는 대상에 고정되지 않은 관심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여타 총각의 관심과는 또 다른 차별성을 가진다. 이 관심은 여타 총각들이 가질 수 있는 관심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조금 더 발전된 형태의 성에 대한 관심을 유지하고 또 유지해내려고 하는 중이다.

쨌든 다시 딱정벌레님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면 아드님께서 PC로 컬러풀한 장면을 감상하는 것에 놀라시고 그것을 계기로 아들의 첫 경험(?)의 교사와의 관계가 자신의 그것과 다름 없음에 안심하시는 모습까지 잘 읽어내려갔다. 그 부분까지 읽어 내려오자 필자의 머리에서는 내 첫 경험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가로 생각이 이어졌다. 아! 라고 생각한 순간 잠시 잠간의 정적이 돌았다. 필자의 경험은 그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필자가 성에 대한 매체를 접한 것은 초등학교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2학년엔가 3학년엔가, 아니 4학년때 였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께서 필자가 가지고 싶어하던 PC를 어디선가 구해오셨는데 그야말로 XT급 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 이상의 성능을 가진 PC가 사용되었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아버지께서는 집안 사정상 최신의 PC를 구매해주실 능력이 되지 않으셨다. 그렇기도 했지만 필자의 관련 지식은 그것으로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것으로 행복했다.

나도 PC가 생겼구나! 라고 생각하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PC를 들여오고나서 변화된 것은 활동이 전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과 PC화 동화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님께서는 항상 바쁘셔서 동네에서 어르신들이 필자와 동생만 보면 부모님을 욕하고 있을 정도로 꼬질 꼬질하고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더 PC에 빠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PC와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곧 PC 통신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PC 통신이 시작되었을 때는 관련법이 제대로 정립되어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말 그대로 통신은 무법천지였다. 뭐 그 나름의 서비스에서 정의하는 제한사항이나 그 비슷한 제지가 있을만한 짓을 초등학교 5학년엔가 6학년에는 해 본 기억이 없다. 그저 그 곳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은 초등학생이 접하기에는 아직도 부담스러움을 느낄만한 것들이었다.

먼저 첫 경험의 교사와의 관계는 나 자신이다.

흔히 친구들이 알려준 방법을 해보는 것으로서 그 친구는 선생님이 된다. 자위에 대해서만큼은 그가 나보다 먼저 알았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딱정벌레님의 아들의 성 3번째 글의 댓글에 개인 경험이라는 분이 올려주셨던 내용처럼 필자는 누구로부터 배우지 않았다. 이미 어떤 자료를 접하기 전에 자위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자위인줄 몰랐다. 성기가 손에 의해 자극을 받고 그를 통해 쾌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자위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이 그다지 중독성을 가지지 않았다.

야설을 읽다 걸린것은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

당시에는 케텔에서 하이텔로 바뀌고 난 뒤인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개인이 인터넷 서버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이 아니라 PC통신 서비스를 연결하기 위해 BBS 프로그램을 돌리기도 했다. 또한 Hitel 외에도 다른 경로들이 많이 생겼기 때문에 음성적인 방법으로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다. 속도와는 상관없이 음성적인 자료들은 어떻게해서든 수요자와 공급자가 있는 듯 하다. 야설은 그렇게 읽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는 그림파일의 화질이나 수준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야설로 많은 부분을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나름 소설의 형태로서 조잡하지 않았던 소설들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텍스트 파일을 읽다가는 부모님들께서 들어오시는 소리를 듣고는 정리도 않고 그냥 PC를 다운 시켜버렸다. 그리고는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져버렸다. 야설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전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굉장히 정색을 하시면서 필자를 부르셨다. 이게 뭐냐고 하시며 PC화면을 가리키셨다. 모니터에는 이전에 부모님께서 들어오셨을 때 놀래 정리하지 않았던 파일이 텍스트리더와 함께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물론 딱정벌레님의 아드님처럼 풀컬러판 화면은 아니었지만, 부모님들께서는 나름대로 충격을 받으셨다. 필자가 전에도 몇번인가 말했지만 아버지께서는 각목으로 필자를 다스리셨다. 그리고는 몇 대 맞을 것인지를 정하고 어머님은 잡으시고, 아버지는 때리셨다. 유일한 지원군인 할머님조차도 어디 나가신모양이었다. 그렇게 맞으니까 울게 되었고, 그것으로 부모님들은 이제 더 이상 야설은 안 읽는다는 약속을 받아 내셨다. 그 파일들을 제거되었다.

딱정벌레님의 글에는 필자의 부모님들께서 성에 대해 자유스러웠다고 댓글을 달아놨지만 초등학교 시절에서부터 자유롭게 해 주셨던 건 아니다. 그 후로 강압적이고 두려운 아버지는 어느새 필자의 친구와 같은 아버지로 변해계셨다. 어린시절 필자의 눈에 물을 만들게 했던 몽들이들은 이미 그 자리조차도 잃어버린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야설은 그만 읽었지만 자위행위만은 계속되었다.

한달에, 또 어떨 때는 2주일에 한번 정도로 자위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때 서울에서 부천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친구들이 돌려보는 만화책을 보게 되었다. 필자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골든보이(Golden Boy)이다. 원작 자체만으로도 좀 변태스러운 구석이 있는 만화인데, 그것을 또 다른 버전으로만든것이었다.

일본에서 만든것을 빨간모자 아저씨들이 수입해서 판매하는 것들이었다. 그것으로 다시 야설, 야사, 야동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고등학교를 정보산업고등학교를 들어갔고, 학교에서는 인터넷을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친구들이 있을 수업시간이나 모든 수업이 끝난 직후에는 힘들었다. 혼자 있을 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보기도 하고 했다.

인터넷은 점차 학교에서 집으로 더 빠른 방식으로 지원되었고, 좀 더 쉬운 접근이 가능해졌다. 지금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만, 야동, 야설, 야사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허구적인것이라는 것과 보는 이로 하여금 더 흥분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전만큼 자주 접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필자가 중고등학생이라면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쉬이 접할 수 있는 것들을 아무런 비판의식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이유로 성에 대해서 무조건 혼내거나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유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 여기서 부모님들의 성에 대한 개방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어린 시절의 그런 사건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성적인 표현들에 대해 다른 부모님들이 그럴 것이라는 필자가 가진 기준보다 더 개방적이셨다고 생각된다. 중학생이던 동생과 필자 앞에서 ‘자지’라는 표현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셨던 것이다. 그저 고유명사를 말하는 것 뿐인데 그걸 천시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상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말의 명화와 같은 장면에서 키스 장면이 나오면 보지 말라던가 하는 말보다는 그냥 뽀뽀하는 건데 뭐 어떻냐는 식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간호장교 출신이시라서 의학적인 관련 지식을 말씀해 주시고는 했다. 물론 성관계나 직접적인 세세한 표현은 없었지만, 묻는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대답해 주셨다. 지금의 성에 대해 개방적인 생각과 굴절되지 않은 성 가치관은 부모님들의 이런 개방적인 행동에 의해 생겼다고 생각한다.

이것으로 성에 대한 관심, 처음의 경험에 대한 글을 마치려고 한다.

딱정벌레님의 연재는 계속되어 7편까지 나온것을 확인했지만, 개인적으로 약속드린 부분이라 미흡하나마 글을 남긴다.

  1. 히포크라테스가 정의한 기질 중 다혈질의 특징 중의 하나이다. 행동력을 뛰어나지만 치밀함에 있어서는 우울질에 비해 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두 기질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울질보다는 다혈질이 더 우세인 듯 하다.[]

자랑 거리

어르신들에게 자랑거리라는 것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들이 대부분이다. 손자 손녀들에게서 받은 작은 선물, 자손들의 깜찍한 인사들도 자랑거리가 되기 마련이다.

필자의 할머니께서 다른 할머님들과 함께 계시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참빗으로 머리를 빗으시다가는 옆에 계시는 할머니께서 물어오셨던 듯 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린 시절에 필자는 굉장한 장난꾸러기로서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만큼 굉장한 사고뭉치였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필자 손만 지나가면 뭐든 쉬이 망가지곤 하였다. 할머니께서 사용하시던 참빗도 그 대상에서 예외 일 수는 없었다. 사실 그 빗을 망가뜨리려는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닌데, 몇 번 빗고 하다보니 어느새 망가져 있었다. 그리고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는데 할머니께서는 나름대로 이리 저리 구하려고 하셨었나보다.

어느새 빗을 망가뜨리고 나서 20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필자는 군에 입대했고, 고참들과 함께 속초에 놀러가기로 했는데, 미시령으로 지나다가 관광상품을 파는 곳에서 참빗을 보고 기억해 냈다. 어린 시절 할머니께서 자주 쓰시던 참빗, 필자가 몇 번 빗어버리고는 망가져버린 참빗. 그래서 얼마후면 나갈 외박에 할머니께 선물해 드리기로 하고 구입했다.

그리고 며칠 후 외박기간에 할머니께 가서 짜잔~ 하고 선물해 드렸더니 아니 이걸 어디서 구했냐고 하시면서 놀라시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문득 생각나서 할머니께 선물해 드린거지만 할머니는 나름 그 이후로 주욱 찾으려고 하셨던 모양이었다. 그 옆에 계시던 할머님께서 종로에 가면 구할 수 있는 물건을 그리 어렵게 찾았냐고 타박하셨지만 할머니께서는 손자가 사다드린 그 빗으로 여전히 빗고 계신다. 그리고는 틈이 날 때마다 자랑스러워 하신다.

옆에 계시던 할머님 말씀처럼 종로 같은데 가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흔해빠진 빗들일 지라도 손자로부터 받은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할머니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그 추억이 담긴 참빗을 사용하실 것이다.

참 빗

아무 생각 없는 고딩이었을지라도…

나에게는 기댈 곳이 필요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컴퓨터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필요하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이 필자에게는 흥미를 가질 수 있는 분야였고, 미래라는 것을 꿈꿀 수 있는 분야였다. 그만큼 필자의 컴퓨터에 대한 의존도는 높았다. 의존도라기보다는 그것밖에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필자에게는 천사와도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 천사로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그녀가 나타난 것이다. 피부는 백옥보다 더 하얗고 통통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까지 KTX로 질주해 왔다. 그리고는 3년을 좇아다녔다.

단지… 기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취업, 그리고 피자 부페

정보산업 고등학교를 다녔고 진학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3학년 2학기 때 취업을 나갔다.
사실 선생님께서 컴퓨터 분야에 굉장한 관심을 가진 것을 아셨기 때문에 성수 역에 있던 하드웨어 조립업체에 소개를 해 주셨지만, 집이 부천인지라 출퇴근시간으로만 하루에 4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엄청난 거리였기 때문에 면접만 보고 나왔다.

그리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벼룩시장 구인란을 뒤적거리다가 웹디자이너를 구한다는 광고가 보여서 잽싸게 전화를 걸어 면접약속을 잡았다. 물론 가서 바로 취직됐다. 일하던 디자이너 누나가 턱이 빠지는 진풍경을 연출해서 재미도 있었고, 회사에서는 그 누나가 나가버리고는 대체 인력이 없어서 그 동안 그 누나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린시절부터 그래픽 프로그램을 끄적거리며 습관삼아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편집 능력은 뒤따라 주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취직을 했다.

그렇게 일하면서 몇개월 뒤에 서울에 시사저널 건물 디자인팀과 같은 층의 사무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사실 같은 공간안에서 파티션만 나누어서 쓰게 되었는데, BGI(Best Graphic International)라는 팀이었다. 그곳에서 디자이너 오정표형과 만나게 되었다. 99년 당시 28살이었는데, 군대를 전역하고 이러저러한 일들때문에 이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또 한명의 디자이너 누나는 김선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의 본인의 실력에 비해 둘 다 실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쿽으로 편집디자인 했던 김성훈형이랑, 또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쨌든, 이 회사에서 인턴을 뽑아서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이 사람들이 본인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일을 저질러 버렸다.
인턴들이 일하기 시작한 날에 퇴근시간이 가까워왔다. 본인은 할 일이 조금 더 있었기 때문에 앉아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이 와서 저희 퇴근하겠습니다. 라고 하길래 그러세요~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 사람들 아직 다른 회사라는 걸 모르는구나..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점심을 같이 먹는데, 인턴을 받은 회사 성훈형이 인턴들에게 어제 왜 둘 다 얘기도 없이 그냥 가셨어요? 라는 것이다.

그러자 이 분들 나한테는 인사하고 퇴근했는데? 라고 말하니까, 이 두 인턴들 막~ 웃는 것이다.

퇴근할 시간은 가까워오고 높아 보이시는 분들은 외근하셔서 안 계시고는 쭈욱~ 둘러보는데, 본인이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이 제일 높은 사람인 줄 알고 이 사람한테만 인사하고 가면 되겠다 싶어 본인에게만 인사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본인은 (털썩~) 주저 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당시 그렇게 살찌거나 하진 않았지만 패션감각이 본인도 좀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하고 다녔는데, 그게 오히려 늙어보이게 한 것이었던 듯 하다.

쨌든 그곳에서는 그런 에피소드가 기억이 날 뿐이다. 또 한 가지는 책을 만든것이었는데, 아직도 교보문고에서 검색이 된다.

이 책은 당시 첫 회사 사장님이 미국에서 문서포맷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PDF에 대한 서적이었다. 지금은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포맷이었다. 이것으로 본인이 처음으로 편집디자인을 경험했었다. 사장님의 지시가 있었지만, 표지디자인에서 책 내용 편집까지 죄다 본인이 한것이다. ㅋㅋ.. 근데 지금 보니 표지디자인 굉장히 구려보인다.

또 이 회사는 프리랜스처럼 보이는 프로그래머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이 분은 삼성 훈민정음에 들어갈 PDF 부분을 개발하셨다. 이 프로그래머분 굉장히 나이 들어보이셨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솔로셨다. 음.. 진짜 딱~ 보면 이 사람 프로그래밍하는 사람이라구나 하는 필의 생김새였다.

그리고 그 작업이 끝나고 함께 일하던 과장님이 창업을 할거라면서 함께 나가자고 해서 그 회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같이 나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창업한 회사는 웹디자인으로 돈을 벌고,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창업된 회사 사장님은 폐쇄회로카메라 분야의 사장님과 동업하시기로 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함께 일하게 되었다.

동업하시는 사장님은 제임스라는 영어이름을 가지고 계셨는데, 어느날인가 다른 직원들은 다 퇴근하고 제임스 사장님이랑 단 둘이 남게 되었다. 토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사장님이 퇴근하고 같이 밥 먹자고 하시면서 좋아하는게 뭐냐고 물어오셨다. 물론 당연히 피자를 먹겠다고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 피자이다. 짜장은 웬지 순위에서 어느순간 밀려나갔다.

피자를 먹으러 가는데 중학교때부터 초~ 대식가 기질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사장님께 피자부페로 가자고했고, 사장님도 그렇게 하자고 하셨다. 그 피자부페 그 이후에 몇년인가 지나서 그 자리에 갔더니 피씨방이 들어서있었다. 쨌든, 그곳에서 먹기 시작하는데 당시 피자헛 패밀리 사이즈를 혼자 2판 정도는 우습게 먹는 실력이었기 때문에 한접시, 두접시, … 비워나갔다. 사장님은 나이드신분이시라서인지 두 조각인가 먹고는 먹는걸 구경하셨다.

그 피자 부패는 일반적인 부페하고 달리 손님이 앉아 있으면 구워나온 피자를 커팅해서 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 한번에 한 조각씩 주었는데, 그렇게 10번째가 넘어가니까 이 알바생 본인이 앉은 테이블 주변으로는 오지 않는다. 더 앉아서 먹을 수 있었는데, 웬지 사장님께서 민망해 하셔서는 그만두고 나가자고 했다.

ㅋㅋ… 사실 그 때만큼은 못 먹어도 피자를 너~~무 좋아해서 금방 밥 먹었어도 피자시켜준다고하면 먹을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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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린블루스 11월 28일 - 2.5기
아~ 이 사장님 뭐하고 사실까 궁금하다..

인터넷을 처음 접하던 그 때..

과거에는 인터넷이라는 이름보다는 PC통신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행했던 때가 있었다. 필자의 부친께서는 필자만큼이나 PC에 관심이 많으셨기 때문에 1993년에 처음 PC를 가지게 된 때에도 케텔을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그로 인해 전화요금이 엄청나게 나와서 혼나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느렸던 PC사양(XT)과 엄청나게 느렸던 속도(당시 제일 빨랐던게 초당 2400 비트, 300바이트, 0.29Mb)에서 잘도 사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까지 컴퓨터는 오지게 사용했지만 인터넷을 흔하게 사용할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지 않았다. 초등학교때부터 컴퓨터에 미쳐있었던터라 이런 저런 것들을 많이 접해봤지만, 인터넷만은 일부 BBS에서만 텍스트 형태로만 제공하고 되었거나, 일부 통신사를 통해 연결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학교 중반이었던가 ISDN이 나와서 신청했을 때 정액제였던 걸로 기억되는데, 그 때부터는 조금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듯 하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학교 전산실에 설치된 전용라인을 통해 맘편히 사용할 수 있었던 것에 대단한 감동을 느꼈다. 실제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전산반에 입반했는데, 작업을 핑계로 수업도 꽤나 빠졌고, 늦은 시간 – 대략 저녁 9시 또는 12시 – 까지도 인터넷과 네트워크 게임에 빠져있었다.

사실 그 시절의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라는 용어조차도 흔하게 쓰이지 않았을 무렵이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아서인지 정보의 순수성은 확보되었었다. 그래서 불편한 점도 없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정보는 꽤나 정확하고 성실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인터넷은 제대로 찾아보지 않으면 성실한 정보를 획득하기 힘들다. 물론 관련 정보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그런 것은 정보를 획득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점이 될 수 없다. 정리하자면 접근성은 좋아졌지만, 원하는 정보를 정확하게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ZdNet의 기사를 훑다보니 과거 메일(인터넷)에 대한 약사가 나오는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서 관련하여 적어보았다.

알만에 의하면 현재의 인터넷이 탄생 초기와는 크게 변화되어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줄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뢰할 수있는 수단으로서 메일을 사용하기 위해 앞으로도 보안을 계속 유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고 그 때문에 최대한의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고.
출처 : 센드메일 개발자, “메일을 너무 많이 사용해”

돈놀이 장난감

필자가 살고 있는 집은 작년(2005년)에 가족들이 재정적인 능력을 죄~ 끌어모아 겨우 마련한 집이다. 그 동안 월세, 전세를 거쳐 힘들게 마련한 집이다. 이 집에 이사오기 전의 상황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재정적인 능력이 최저로 떨어져 경매로 넘어가서 어쩔 수 없이 이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사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필자도 그렇고 동생도 그렇고 아르바이트(동생은 학원강사인데, 국가에서 아르바이트로 정의해 버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적인 동원능력이 조금 되었던 때였고, 이래 저래 만들 수 있는 한 최대한 끌어서 만들었다.
부채들 중 일부는 그렇게 마련한 집을 저당잡아 처리해버리고 지금도 매달 얼마씩 상환하고 있다.

...

이렇게 힘들게 마련한 한 집이 있는 사람도 있고 그나마도 없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반면에 그런걸로 돈놀이를 하는 그들이 있다.
한 가구의 여러 개체(구성원)들이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는 동네에서 공급이 부족하단다. 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돈 놀이 하려면 더 많은 집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리라.
공급을 더 확대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또 사들여 공급을 부족하게 만들겠지.
결국에는 사줄 사람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들의 거품이 사라지게 되는걸까.

주변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 바깥 양반들은 착실하게 보일만한 직장인들인 경우는 그다지 없다. 짝 맞춰 돈놀이 한다는 얘기다.
돈 버는거… 좋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살기 힘들게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철저한 이기주의자들!
이기주의 세계 대회에 출전하면 특등상으로부터 동상, 장려상까지 이 나라의 그들이 차지하리라!

자신의 판 무덤에 빠질 인간들이여!
부디.. 부디… 정신차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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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폭탄’ ‘공급확대’ 파상 공세 부동산에선 정부보다 강한 조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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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스트레이트 까잇거 일주일이면..

오해라는 글을 보고는 취업후 첫 월급의 씀씀이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3학년, 인문계 학생들과는 달리 취업전선에 나가야 할 시기인것이었다.
당시의 본인은 반곱슬의 머리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펴려고 온갖 방법을 다 해보던 시절이었다.

젤이라든가 헤어 스프레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밀크로션을 머리에 발라 머리 모양을 바꾸려고도 시도해 본 적도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는 곱슬머리라는 걸 이용해서 꽤나 긴 머리를 자랑하던 때도 있었다.

쨌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취업을 했었던, 본인은 첫 월급을 타는날 내의 점에 가지 않았다. 흔히들 부모님의 빨간 내의를 사드리는 것으로 효를 시행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겠지만, 그런 압박마저도 날려버릴만큼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매직스트레이트(이하 매직)였다. 당시의 매직는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분야이기 때문에 꽤나 고가의 상품이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고되게 하지 않은 고등학생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만큼의 가격이었다. 물론 집안 형편도 그에 못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열망해 마지 않던 매직이었다.

첫 월급을 들고 부천역에 있는 미용실을 향했다. 사실 그 동안은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5천원이면 이발할 수 있는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손질했기 때문에 미용실이라는 공간에 간다는 것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미용실에 들어갔다. 참… 어색하고 부끄러웠다. 뭐가 그렇게도 부끄럽게 여겨졌는지, 3~4시간의 시술 시간동안 시술하시는 미용사 누나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짜잔~ 멋지게 스트레이트 되었다. 미용사는 시술후 2,3일 동안은 머리에 샴푸하지 말라는 당부를 건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집에 왔건만 사람들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았다. 지금 회상해보건데 당시의 머리 모양은 꽤나 우스꽝스럽다. 길지 않은 머리카락이 곱슬머리로 인해서 부풀어 있다가 매직 후 가라앉는 상태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는 아랑곳하지 않은채 일주일이 흘렀다.

털! 썩!

정말 저런 모양새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나 고가를 들여 했던 머리카락들 가운데, 휘어있는 머리카락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사건 전에도 같은 반 여자친구들을 집에 초청(!)해서 일반 스트레이트를 했었던 때에도 2,3일 정도 밖에 못 버텨냈던 머리라는것을 기억해 내는데에는 많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휴우..

이 저주받은 곱슬머리라고 수 없이 생각했다.

불장난..

– Make sure you’ve got film in the camera, set the ISO dial, and don’t shoot into the sun.
 필름은 넉넉하게 갖고 다니시고 필름감도를 맞추어 찍는 걸 잊지말고, 해는 찍어봐야 사진만 버립니다.


몇번인가 해를 찍어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카메라 동호회의 어느 회원이 올렸던 글을 보고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DSLR의 경우에는 영상을 디지털화 신호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별도의 장치가 필요하다. 태양을 찍게 되면 그 센서가 타버려 굉장한 비용을 들여야 고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쨌든 그런 생각 – 태양을 찍는 – 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어린시절의 불장난에 연관된 일화이다. 불장난을 꽤나 좋아했었다. 지난번
동생과의 사건일지(!)를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불장난으로 집을 홀라당 태워먹을 뻔한 일도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렌즈가 필수라는 것은 다들 아실것이다.

렌즈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어떤 것이 생각나시는가? 본인의 경우에는 돋보기이다. 돋보기를 통해 할 수 있는 장난질은 여러가지가 있다. 단순히 글자를 확대해 볼 수 있는 도구 본연의 기능 외에도 꽤나 이러 저러한 용도로 활요하여 재미를 느끼 실 수 있다.

먼저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신체 일부를 확대해서 보는 것이다. 꽤나 징그러운 장면이라고 생각하실만한 것들을 관찰 하실 수 있을 것이다. 피부에서부터 눈알까지 닥치는대로 한번 확인해 보시라. 그러나 이 때 주의해야할 것은 절대로 태양을 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눈의 검은자는 타기 딱 알맞은 색상이기 때문이다. 여름에 검은색 옷을 입고 활동하는 것만큼이나 미련한 행동은 없다. 그만큼 검은색은 열을 잘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 잘 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눈의 검은자는 돋보기로 발생되는 집중열을 금새 받아들여서 단지 안과 진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본인의 어린시절 친구의 친구는 그런 장난을 치다가 실명한 사례도 있으니 꽤나 주의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해 볼 수 있는 것은 신문지를 태워보는 것이다. 일반 종이보다 기름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면서, 활자가 적지 않게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신문지만큼 잘 타주는 재료도 없다. 기름의 함량으로 치면 기름종이가 있지 않냐며 반문하시는 독자도 계시겠지만, 기름종이는 생각보다 잘 타지 않는다. 신문지야 말로 불장난하기에 최적의 재료라 할 수 있다. 수 없이 돋보기의 집중열로 인해 타들어갔던 신문지들을 생각하면 소변이 마렵다. 어린시절에는 어른들의 말을 여과없이 듣게 마련인데, 그러는 중에서도 과감하게 불장난에 임했다. 어른들의 말로는 불장난을 하면 이부자리에 오줌으로 지도를 그린다고 했는데, 불장난을 그렇게 심하게 했으면서도 지도 그린 적이 없다는 것에 웬지 모를 자부심을 가진다.

초등학교 1학년, 8시간 공부?

나의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어머니들의 치맛바람으로도 잘 알려진 자녀들에 대한 학습욕(!)이 대단히 높다. 그런 분위기 가운데, 어머니의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 어머니의 학습열에 대해 살펴보고 본문을 시작하도록 하자.

보실까나?

본인의 모친께서는 초등학교 시절 그 작은 – 그러나 어머니의 고향에서는 결코 작지 않은 – 곳에서 결코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승부욕(!)은 다른 초등학생들과는 다른 열정을 가지시도록 만드셨다.

그 시절의 시골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부모님들의 농업을 도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어머니께서는 밤에 불을 밝히지 않을 수 없게 되셨다. 게다가 어머니의 형제들은 9남매라는 거대 인원인데, 그 중 맏이 셨던 어머니께서는 동생들을 보살피셔야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선택하셨던 방법이 각성제였다. 잠 안 오는 약으로 알고 드셨던 그 약을 통해서 밤새어 공부하셨더란다.
그럼 이쯤에서 어머니의 과거사 이야기는 접어두고, 본인의 과거사 이야기로 돌아가보겠다.

그렇게 대단한 열정을 가지셨던 어머니는 우리들(동생과 본인)에게도 높은 수준을 요구하셨더란다. 초등학교 시절에 나왔던 전과는 대략 5가지쯤 또는 그 이상이었는데, 그 모든 전과&학습지를 사셔서는 초등학교 1학년생인 아들을 학습시키셨더란다. 더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은 8시간동안 그 초등학교 1학년 생이 버텨냈다는 것이다!
애초에 본인이 학습 성취도가 낮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결과에 대해 어머니는 대단히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고 생각된다.

쨌든 중고등학교 및 초등학교 2학년시절부터 꽤나 존재감이 없었던 학습에 대한 압박을 생각해보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동생은 어머니의 그 승부욕을 학교 성적에 두었고, 본인의 경우에는 PC에 두었기 때문에 다른 결과로 현재의 삶에 나타나 있지만, 결코 후회될만한 결과는 아니다.

별 것 아닌것으로 치부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지만, 어머니께서 그대로 그런 학습욕을 본인에게 요구하셨더라면 지금은 어떤 결과로 나타났을까?
어머니의 설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그런 욕심이 사라지셨기 때문에 본인과 동생이 편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하신다. 규모가 크건 작건 집단이라는 곳에서는 소문이라는 것이 있었을테고, 기도 좀 하신다는 분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런 분들 가운데 한 분께서는 어미님께 “하나님께서 맡기시라고 하시네요”라는 말로 본인을 구원하셨단다.

그랬더니 8시간의 공부를 시켜서 나왔던 성적보다 훨씬 나은 성적을 결과로 가져왔기 때문에 그 달에 바로 그만두실 수 있었단다.

뭐.. 그런 본인에게도 공부에 대한 욕심은 장기적으로 존재해왔다. 언제나 그만두지 않는다. (켈룩…) ㅡㅡ;;

동생과 친한건 아마도..

물론 지금 동생과 친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장난도 잘 치고 뭔가 함께 같이 했던 이유들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고 글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책과는 그다지 친분을 쌓고 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책을 빌려본다던지 사달라고 한다던지 했던 적이 없다. 스스로 읽어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굴러다니던 책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에 가끔씩은 친밀감을 형성하고 싶은 쌩뚱맞은 충동을 느꼈다.
동생은 글자만 있는 책들로부터 만화책까지 읽는 범주가 넓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책과의 친밀감을 형성하고자했던 가끔씩의 충동질을 해소하기 위한 탈출구(?) 정도로 작용했다. 집에 책은 잔뜩 있었지만 그 어린 넘이 읽을 만한 책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책방으로부터 빌려온 책들을 함께 읽었다. 동생은 계속 책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한 두시간이면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어떤 책이든간에 다 해치워버렸고, 그런 동생이 읽고 남은 기간동안 있는 것이다. 사실상 동생은 책을 빌리기는 잘 하지만 반납하는 것에 있어선 잘 신경쓰질 않았다.
그래서 동생이 자주가던 책방에 반납하는것은 내 임무(!)중에 하나였다. 얼른 읽어버리고 갖다줄 수 있었다면 반납 습관이 들여졌겠지만, 읽고 있는 걸 뺏어서 갖다 줄 수 없었기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그 습관은 나 때문에 생긴것일까?

쨌든 어떤 연관성을 만들자면 이렇다. 동생이 읽은 책들을 함께 읽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사고방식도 비슷해지기 마련이지 않을까? 함께 가족이라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편안함이 더욱 그 친밀감을 높여주었다고도 생각된다.

또 한가지 이유는 방치된(?)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라고도 생각된다. 왜냐하면 부모님께서는 큰 교회 부교역자로서 꽤나 열성적인 사역을 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을 돌아볼 여력이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께서 챙겨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들 스스로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적 위치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뭐 이런 글에 숙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니까 웬지 어색하지만, 이러한 조금은 황당한 이유로 동생과 친한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동생과 함께라면..

동생과는 어린 시절부터 꽤나 친근한 관계를 유지해 왔고, 지금도 다른 남매들과는 사뭇 다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나이 한 살 더 먹고 각자 다른 신분으로 생활을 하다보니 전보다는 확실히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남매들과는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된다.

어릴 땐 주로 동생이 일방적으로 맞곤 했다. 장난도 심하고 뭐든지 한번에 끝장을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임했으니, 동생을 괴롭히는 일에서야 어땠겠는가. 동생의 회상을 들어보면 본인이 기억하지 못하는 이단 옆차기 가격 등이 본인을 섬찍 놀라게 한다. 본인은 그런 기억이 없기 때문인데, 동생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원래 때린 사람보다는 맞은 사람의 기억이 더 오래간다”는 이유로 그 근거를 삼는다. 정말 인생에서 괴로웠던 순간이 더 많이 자주 기억되는 것으로 봐서는 동생의 말이 맞는 듯도 하다.

동생은 마루타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본인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꽤나 이상적인(?) 실험대상이 되어주었고 기타 여러 장난들을 할 때 함께해 주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몇 가지 있다.

1

먼저는

가위로 손이 잘리는가

였다.
어느날인가 동생에게 “손이 가위로 잘릴까?”라는 질문과 거의 동시에 옆에 있던 가위가 손에 들렸다. 그리고는 동생이 아차! 할 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고는 왼손의 엄지가락을 싹~ 뚝~!
동생은 아픔을 호소 할 틈도 없이 피가 흐르는 것을 목도(!)해야했고, 피를 보고나서야 울기 시작했다. 그 사건은 동생에게 중학교때까지 흉터를 가지게 했다. 지금도 장난과 관련된 얘기가 나오면 이단 옆차기 얘기와 동등할 정도의 빈도를 가진다.

2

다음은 불장난인데 머리가 조금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될 무렵부터 돋보기로 뭔가를 태우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고로 어른들이 계실 때 뿐만아니라 아무도 안 계신 틈을 탄 장난도 잦았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집안에서 성냥으로 불장난을 즐기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오시는 기척이 들렸다. 놀란 나머지 휴지에 붙은 불을 얼른 끄고, 옆에 있는 휴지통 안으로 넣고 어른들을 마중했다. 그런데 다시 방에 들어가면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 정도가 태우다 만 것을 꺼버린 것 치고는 꽤나 심했기 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얼른 뛰어 들어갔더니, ㅡㅡ;;; 타다 만 휴지를 넣었던 쓰레기통 안에서는 불길이 번지고 있었다. 뭔가 외출이라던지 밖에 완전히 나가버린 상태였다면 어땠을까… 꽤나 섬뜩하다.. 당시 우리집은 전세로 세들어 사는 형편이었는데, 주인집은 당시로서는 그 주변 일대의 어떤 집에 비해서는 규모가 중급 이상이었기 때문에 무거운 결과를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막상 기록하려고 하니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동생과 함께 장난치고 동생을 실험대상으로 했던 일들이 기억날 때마다 다시 적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