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

귀찮다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적지 않게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어떤 계기에 의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적잖이 사용했는데, 만사가 귀찮게 여겨질 때도 있어서 어떤 것을 하던지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때도 있다.

언젠가 TV에서 드라마를 보는데 극중 할머니 분을 맡은 배우에게서 나온 대사중 하나가 귀에 띄었다.

······ 귀치 않아.

어랏 저게 귀찮다는 말의 원래 말인가? 하는생각으로 금새 이어졌다. 그 당시에는 그 정도로 생각이 그쳤지만 그 후에 몇 번인가 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귀하지 않다에서 귀치 않다를 거쳐 귀찮다로 줄어들었다고 추측된다.

귀찮다의 시작말인 귀하지 않다는 어떤 말인가. 귀하다 / 귀하지 않다는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말이고 가장 일반적으로는 어떤 행동에 대해 사용하고 있기에 그에 대한 가치가 낮다는 표현이다.

다른 용례는 접어 두고 이 글에서는 교회에 가는 것이 귀찮다는 것으로 글을 이어나가도록 하겠다.

교회는 종교적으로는 해당 종교의 신에게 일종의 행위를 하기 위한 장소를 말한다. 불교의 경우 사찰이나 법당, 힌두교나 기타 종교에서는 신전으로 부르기도 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를 교회라고 한다.

교회에 가서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예배(Worship)이다. 예배는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행위라고 일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에 가기 귀찮다는 말은 교회에 가는 것이 귀하지 않다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교회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귀찮다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귀찮아서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갈 수 있는 상황에서 귀찮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교회에서의 가장 중요한 행위인 예배를 귀찮아하는 것으로 이어 갈 수 있겠다. 교회에 가는 것은 대부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그를 위해 지음 받았다고 기록되어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즉 다시 말해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을 귀하지 않다고 치부해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죄가 아닐까.

교회 가기 귀찮아. -=> 교회에 가는 것이 귀하지 않다. -=> 예수 만나는 것의 가치가 적다.

교회는 모임의 장소 교제의 장소 예수와의 관계 정립의 장소.

좌절 낙심

인간으로 태어나 삶에 좌절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실망하여 낙심될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하여 드리고 감사할 수 있다면…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Proverb 3 : 6

Do not be anxious about anything, but in everything, by prayer and petition, with thanksgiving, present your requests to God.
Philippians 4 : 6

우리 보기에는

먼저 이 글은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작성한 글이며, 개신교인이
아닌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개신교인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는 시도로는 수용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부디 자신의 이해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읽지 않거나 읽기를 중단 하기를 권한다. 읽더라도 이에 대한 비난은 정중히 거절하는 바이다.

금년으로 대한수도원의 청소년 산상 성회는 2회가 되었다. 그 이전에도 청소년들이 개인적으로 부모들과 함께 큰 집회에 함께 참여하여 변화받기도 했으며 소명을 받는 일은 있었지만 – 대한수도원에서 – 그들을 위한 집회는 없었다.

대한수도원의 청소년 집회는 다른 청소년 수련회나 캠프에서와 같은 프로그램은 볼 수 없다. 다만 원내에 설치되어 있는 수영장에서의 수영시간을 매일 가져 더위를 식히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 외의 시간에는 예배를 드리거나 보화1들을 체험한다.

성회 주최기관은 독특한 3가지 보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 곳에 계속 다니지 않았거나 올해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은 3가지 보화를 경험하게되면 거부감을 표하기가 일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복음성가에는 다른 캠프에서 일반적으로 부르는 찬양들에서는 보기 힘든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내용들이 가득하고 안찰은 폭력적인 모습으로 보이는데다가 성령춤은 이단의 어떤 행위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보다는 독특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처럼 다른 일반의 교회나 기독교 관련 기관에서는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작년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했다. 첫 번의 성회에서와 별 차이 없는 사람이 참여하였지만 청소년의 비율이 더 높아졌다. 청소년 성회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까지도 참여하게 했기 때문에 1회 때는 초등학생들의 비율이 적지 않았다. 금년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했지만 초등학생의 비율은 줄어들었다.

이전에 몸 담고 있던 선교단에서는 청소년 캠프를 준비하면서 몇 달 전부터 준비한 계획에 따라 준비하고 연습했다.

이번 성회를 참여하면서 특별한 프로그램도 준비되지 않았고 일반의 찬양도 하지 않은 것을 보며 아이들이 어떻게 버텨낼지 의문이 먼저 들었다.

사실 처음에는 지루해하는 학생도 있었고 끝까지 말썽을 피우며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있기는 했지만 끝까지 남아 참여한 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했다. 그런가운데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반적인 수련회나 캠프 일정으로 계획을 하고 참여한 경우 3일 내지는 4일만 참여하고 돌아가는 경우였다. 자율학습이 있는 학생의 경우 허락된 기간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성회의 마지막 날에 학생들의 입에서 나온 체험담은 듣는 사람들로 더 깊은 은혜를 느끼게 했다. 단순한 기분이나 심리적 만족감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을 느꼈다.

학생들의 입에서 나온 고백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방언 기도를 할 수 있는 은혜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만지심으로 마음 속에 있던 상처들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의 표현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고백하는 모습을 함께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학생들의 이런 변화는 경험 후에도 지속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집회에서 얻은 중요한 것 하나는 어떤 인간적인 노력들로 보면 부족한 모습임이도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가운데에 성회가 진행되었고 그런 가운데 역사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이런 변화는 그들의 삶에서 증거될 것이다. 내년 또는 그 후의 그들의 삶을 통해 이 변화의 간증이 이루어지기 원한다.

우리 보기에는 주먹구구식으로 해 나가는 것으로 보일 수 밖에 없었지만 이루어진 지금의 시점에서의 성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다.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공부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렇다 할 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삶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1. 성회가 시작되고 3가지 보화를 설명했는데 복음성가, 안찰, 성령춤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에 포스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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