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멋진 신세계를 만들겠다는 우리들의 영웅이 권력을 얻고나면 잔인하고 파렴치하고 이권을 챙기고 비인간적으로 되어버리는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급우편에 서겠다던 반장은 선생님 편이 되어버리고, 국회의원은 제맘대로 당을 바꾸고 뒷돈을 챙긴다. 급우나 지역구의 여론은 안중에 없다.
회사라 하여 예외가 될 수 없다. 진급이나 승진을 하여 보다 권력있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장 승진을 하면 대리 때보다 목에 힘이 더 들어가고 아랫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 걸음걸이가 느려지고 어꺠를 펴면서 등이 뒤로 휘어 배가 나오게 된다. 옛날의 그 대리가 아니다.

유쾌한 심리학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 권력 편

  확실히 자리는 사람을 만든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해 보았기 때문에 다른 존재가 된다는 것에 공감한다. 군을 부사관으로 전역했는데, 애초에 지원한 목적 중에 하나가 변화였다. 그 변화라는 것은  조금더 외향적이고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화를 원했다.

  물론 전역한 지금 그런 노력들의 결과로 긍정적인 발전이 있었다. 그러나 군 생활은 나로하여금 어떤 다른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했었다. 뭐랄까.. 조금 더 권력 의존적인 행동을이라고 표현하면 적절할까. 어느 집단에든지 수직적인 관계로인해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 다른 집단들보다 조금 더 많은 강제권을 가진 곳이 군이라는 집단이고, 그런 곳에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짧은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지휘하고 있는 곳에서는 스스로 왕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건데 결코 다시 하고 싶지 않은 실수들이 많았다.

  군에 처음 입대했을 때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행동과 사고방식을 가지자는 목적과 함께 다짐했던 것이 폭력행사나 욕설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군입대전 – 그리고 지금 – 신분이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다짐을 굳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도 했었다. 하지만 자리는 사람을 변하게 한다.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면도 있는 것이 세상 이치인것이다. 처음 1, 2년 동안은 다짐을 했던대로 부하들에게 욕설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정이 없고 약삭빠른 부하들이 많아졌고, 또 이전보다 군기가 헤이해졌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 사건들로 인해 그들에게 더 이상 정을 가지고 대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되었다. 또 상급자들로부터 군기를 바로잡아야하지 않겠냐는 주문을 간접적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활하던차에 군에서는 작은일이라고만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옆 중대에서 전역신고를 하지 않은채 행정병을 괴롭혀서 전역증을 미리 받아 아침 일찍 아무도 모르게 나가버린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근무하고 있는 중대에서는 휴가 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중대장님과의 면담도 거치지 않은채 나가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군이라는 집단은 신고가 가장 기본인것을 그들이 몰랐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병사 신분 중에서는 가장 높은 병장의 계급을 가지고 있었고, 전역한 그들 스스로는 준장, 소장, 중장, 대장 다음이 병장이라고 할 정도로 결코 경험이 없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만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직급으로 따지자면 과장 바로 밑인 대리격이다.

  조금 주제에 어긋나기는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의 내 행동은 조금 더 과격해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했고, 저녁에 근무를 서면서 중대소속의 부하들을 모두 모아놓고 적잖이 과격한 방법으로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취했다. 물론 여러분들이 흔히 생각하는 구타가 만연한 그것이 아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당시로서는 그렇게 할 필요성이 느껴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평화적이며 비폭력적인 방법들로 여러면에서 접근했을 때 여러 번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강제력이 없으면 안되는 상황에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원해서 간 곳이 아니기 때문에 생활 자체도 적극적이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게중에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상급자인 나로하여금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됐던 부하들도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끊이지 않고 있었다.

  쨌든,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조직에서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게 되면 하지 않으면 안될 행동으로 인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손바닥만한 피자(헛!)

오늘은 학교에 가서 수강 신청, 복수전공 신청을 하고 왔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작업이 생각외로 꽤 오랜 시간을 잡아먹어서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던 나로서는 오전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침에 잠시 누워있는다고하며 잠들었다가 눈을 떠보니 시간은 이미 오후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거실에서 자고 있던 동생은 이미 출근한 뒤였다. 썰렁한 집안에서 씻고,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수강신청은 그렇다고해도 복수전공신청 같은 경우에는 학과장의 서명을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학과장 정도 되시는 분들은 워낙 바쁘셔서 제 시간이 되면 얼른 밖에 나가버리시기 때문에 더욱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서둘러 학교에 도착해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서류를 작성하고 서명을 받으러 갔는데, 1전공 학과장님은 다행히도 계셨다. 그러나… 2전공 학과장님은 이미 – 치과를 가셨다고 조교에게 듣긴 했지만 – 퇴근하셨다고 했다.
퇴근시간도 아닐텐데, 이런건 아니자~나~ 아니자~나~

어쩔 수 없이 서명을 받지 못하고, 내일 교무처에 사정을 얘기하고 처리하려고 조교에게 대신 서명을 받아달라고 맡기고 내려와서 1층에 복수전공신청은 다음 주까지란다… ㅡㅡ;;;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괜스레 서둘러 땀냈다는 생각이 급습했다.

그렇게 다 정리하고 나서 시간을 보니 5시 반 정도였다.
며칠전부터 BF 녀석이 저녁 안 사주냐고 전화를 했었는데, 그 녀석 생일도 제대로 못 챙겨줬고해서 여러가지로 미안하다는 말만 하고 말았다는게 생각났다.
전화를 걸었는데 이 녀석 어찌된 일인지 받지 않는다! 다시 걸려고 폼 잡고 있는데, 그 녀석 전화를 했다.
전화를 하자마자 하는 소리가 “저녁 사주게~!?”였다. 참.. 내 자신의 친구 관리가 얼마나 소홀했는지를 대번에 보여주는 대사가 아닌가!
쨌든 용산에서 일본어를 공부하고 배회하고 있는 듯한 녀석의 주변부 소리를 무시하고는, 용산으로 이동했다.
여기 저기 퇴근시간이 가까워지기도 했고, 원래 잘 막히는 구간이라서 가는데 시간이 꽤나 걸렸다. 도착해서 음식점 찾아서 주차하는데까지 무려 한 시간 가까이 걸렸다. 종로를 왜 모두 비싸기만한 유료 주차장들 뿐인건지, 당췌 차라는걸 가지고 간 자신이 개념이 탈출한게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간 곳은 피자헛이었다. 어차피 출혈이 클거라고 예상되는 마당에 샐러드바로 배채우자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찾아들어가면서 생각해보니 그 녀석과 만난 최근의 4번 정도를 피자헛 연속인것었다. 쨌뜬, 질리지도 않고 찾아가는 피자헛이었다.

지난 여러 만남들에서 주문한 피자는 치즈 바이트 퐁듀 였다. 퐁듀가 나오기 전엔 소스를 일부러 시켜다가 먹고 했기 때문에 퐁듀가 나와서 시켜먹었는데, 전에 먹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전혀 새롭지 않았었다.
오늘은 뭔가 새로운 메뉴를 시켜야 겠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곳도 펼쳐 살펴 봤는데, 프레쉬 고메이 라는 항목이 눈에 띄었다. 메뉴판에 적혀 있기로는

고메이

라는게
미식가들을 위해 맛있게 조리되었다는 프랑스 말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래서 와~ 나 같은 사람(!)을 위한 메뉴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주문을 했다.

“프레쉬 고메이 세트주시구요, 4~5인분으로 주세요, 음료는 스프라이트로 주세요, “

라고 말하고는 주문 확인까지하고 친구랑 샐러드를 맛나게 갖다 먹었다. 둘다 느끼한 것들을 좋아하다보니 가져오는 샐러드들은 꽤나 느끼한 편이다.

쨌든,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파스타를 먹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던 피자가 나왔다.
와~ 하고 피자를 보는 순간 그 감탄사가 쏙~ 들어가버렸다.

좀 황당해서 그냥 놔두는 대로 보고만 있었다. 이거 4~5인분 맞는건가? 하는 생각과 주문이 잘 못 되었을거라는 확신을 머리에 채워나갔다. 그래서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있기에 불러다가 이게 4~5인분이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것이다. 이거 보통 다른 피자의 medium 정도 밖에 안되지 않느냐! 고 항의하니까 메뉴판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헉! 이런 대 실수를…. 메뉴판에 적혀 있는 세트 메뉴의 내용들을 주의깊게 보는데 프레쉬 고메이 피자(M)이라고 적혀 있는게 아닌가!

친구랑 둘이 먹으면서 이거 완전 사기다, 피자헛 사이트에 올려서 항의해야 하는거 아니냐며 주저리 주저리 먹는 내내 떠들었다. 사실 주의깊게 보지 못한 내 잘못이기도 하지만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이 조금 더 주의깊게 알 수 있도록 재차 주지시켜주었더라면 이런 대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 맛은 소스를 너무 짜게 만들어서 먹는내내 불평을 했다. 인생에서 가장 불평을 많이 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먹는내내 불평을 했다. 사실 마음에 안들어서도 그랬겠지만 예민한 미각때문이기도 했다. 음식을 매우 싱겁게 먹는편인데 소스를 얼마나 짜게 했는지 입안이 쓰라릴 정도였다고 표현하면 느끼실 수 있으리라…

뜻에 따라 이끌려 간다는 것..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이고, 갈구하는 것 중 하나이다. 최근 이전에도 여러번 하나님의 뜻을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나 노력은 있었지만, 그것이 꼭 직접적으로 음성으로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제 선교단에서 인생 그래프라는 시간을 가졌는데, 2명의 인물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얘기해주는데, 참… 그 가운데서 그들의 상처를 알 수 있었고, 또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으며, 어떤 계기로 선교단에 들어왔는지. 그 사람들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들이 아직도 많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인간은 끝없이 갈구해도 모자랄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친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참..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시간엔 이래 저래 웃기만 하고 있었지만, 나란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연구해 보고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사명감(!)마저도 불타오르게 됐다.

끝없이 발전시키고 변화시켜도 모자라고 부족하기만 한 불완전한 인간.

우선순위..

그래… 언제나 문제는 우선순위 였던 것이다.

스스로 정해 놓은 일처리 우선순위는 언제 그 집단에 소속되었느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집단에 먼저 들어갔는지에 따라서 우선순위를 정해두었다.

하지만 이게 최근들어서 문제가 생겼다. 단지 취미활동 – 이라고 하기엔 그 성격이 모호하지만 – 정도로만 생각했던 단체가 비영리 법인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그 쪽에 치중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들어가서 일할 수는 있겠지만 이제 정이 들어가기 시작한 집단인데다가 뭔가 자리 잡혀가고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 진것이다. 같이 일했던 사람들 역시 그 집단에서 나온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또 만나서 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뭔가 정에 끌려서 못 그만둔다는 스스로의 판단에 더 괴로운 생각이 든다. 전에 친구에게서 정에 이끌리지 말라고 충고 받았었다. 그 때는 알겠다고만하고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문득 이 문제에 있어서 그런 충고를 받아들여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인생이란 끝없이 문제가 있기 마련이고 그 문제들은 사람들을 괴롭힌다. 나 역시 인생을 살아가는 한 개체로서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해야할 의무(!)가 있다.

이래 저래.. 언제나 이렇다.

웬지 울적해졌다…

오늘이 학교 개강일이라는 포스팅을 쓸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믿음의 부족함이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인가.
믿음의 부족함때문에 눈에 습기가 차 오르는 건가.

ㅁㄴㅇㄻㄴㅇ러ㅏㅣㄴㅇ러ㅏㅣㅁㄴㅇ러ㅏㅣㄴ어ㅏㅣㄹ러ㅏㅣ’

복잡하다..

생활 패턴이..

올빼미형으로 다시 돌아가버리는거 같아서 진정 스스로에 대해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그거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다니.
저녁에 탄력 받아버리면 아침까지 스트레이트로 작업해버려서 다음날 일정에 영향을 줘버리는 그런 생활이 다시 시작되려하고 있다.
군에 가면서 힘들게 –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만 했지만 – 바꾸었던 생활 패턴이었는데, 주일 예배 시간에 잠깐씩이지만 졸아버렸다.

꾸벅… 꾸벅…

엊그제 당회장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는 졸지도 못하고 오히려 대통령 만났다고 자랑하고 다니면서, 인간의 조물주이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와서는 졸 수 있냐

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그것과 비할 비가 된다. 전부터 예배시간에 조는 것은 굉장한 고민이었다. 졸지 않기위해 허벅다리 안쪽살을 꼬집어보기도 하고, 전날 굉장히 일찍 자기도 해보았지만, 그건 쉽게 고쳐지지가 않았다. 졸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면 오히려 뇌가 과부하 걸려 더 빨리 졸아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거 정신과 쪽으로 상담을 받아야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전역한 후로 당분간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고민 일선에서는 사라졌었다. 그러나 최근들어서 다시 고민 1순위로 접어들게 되었다.

아… 어떻게 하면 졸지 않을 수 있을것인가.
허벅지도 심하게 꼬집어서 피멍까지 들어버리는데도, 왜… 왜! ㅠㅠ

말씀이 함께하지 못하면..

어제(25일) 금요 철야 때 들었던 말씀 중에 기도와 함께 말씀이 마음에 있어야 한다는 설교를 들었다.
김충규 목사님께서 요한복음 15장 7절을 들어 “말씀과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대언하셨는데, 먼저 본문을 살펴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7)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ask whatever you wish, and it will be given you. (John 15:7)

대부분의 사람 들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는 말씀에 주목한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란 대목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면서 구하면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시리라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마음에 품고, 새겨둠과 동시에 구하여야 우리가 구할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통해 영을 살리고, 기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왜 들어주시지 않는 거지? 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에 소홀하기 마련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전교인 수련회 때 봉사하던 청년들이 당회장 목사님과 대화할 일이 있었다. 그 때 목사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사는 일에 대해 매우 강조하셨는데, 기도로 구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직접 그 음성으로 응답해 주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그런 것보다는 우리가 말씀을 읽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알아지는 것이다. 그 부분에서 아! 하고 깨달아졌다. 실제적으로 내 심령 가운데 아들아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심령가운데 깨달아지는 방식으로 내게 뜻을 밝히셨던 경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 생활 가운데는 말씀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못했다. 마음에 성령의 감동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는 것은 뜨겁게 기도하는 그 순간 뿐이다. 그렇게 집회를 마치고 나면 일상생활로 들어서서 전혀 관계 없는 사람처럼 행동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그 분의 음성을 듣기는 커녕 뜻하심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마음 속으로 꽤나 자주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부분은 반향이 없다. 웬지 내 마음대로 떠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적도 적지 않다. 역시.. 삶이 말씀 가운데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려버리게 된다.

요즘 미니위니를 통해 알게된 리디의 생각하는 섬 바닷가에 자주 드나드는데, 그 곳 분들의 글들 가운데는 웬지 모를 위로가 있다. 다른 곳에서도 말씀을 인용한 글들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 과는 또 다른 감정이 일기 때문이다. 사실 다니는 여러 다른 곳들 중에는 그런 식(?)의 글들을 보기 힘들다. 대부분이 웹 개발 관련 페이지들이거나 관련 직종 사람들이 운영하는 커뮤니티이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교회 관련된 곳에서는 활동을 하고 있지 않다! ㅡㅡ;; 인터넷의 물결이 들어오기 전 크넷이라는 곳 이후에는 없었다고 기억된다.

쨌든, 목사님의 설교로 돌아가서, 이후의 인용되는 말씀들을 주욱 살펴보면

사도행전 6: 1~4 ::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시편 119 : 147~148 ::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에베소서 6 : 17~18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요한복음 5 : 24~25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시편 119 : 50 ::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말씀들은 모두가

말씀

과 관련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가지는 것은 명령이며 지켜 순종해 내야 할 부분이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말씀에 입각하고 체계적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씀위에 바로 서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충규 목사님의 설교는 유난히 – 다른 목사님들의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라는 건 아니다 – 유기적으로 엮여 있다. 귀에 그리고 마음에 잘 새길 수 있다고 느껴진다. 이런 것이 사람들이

자기에게 맞는

목사님을 찾아가는 이유일까? 그런 행동은 뭔가… 아니다라는 인상을 깊게 남기지만 그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한 일꾼으로서의 모델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요즘 내 생활이..

게으름의 정도가 점차 심해져가는 듯하여 긴장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초에 PC 운영체제가 완전히 가버려서 새로이 복구하고, 동생 PC까지 설정해 주면서 밤샘작업이 약 3일간 지속됐는데, 그 시점으로부터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새벽까지 작업하고 아침에 잠들어서는 12시가 넘어서 일어나게 되는 생활이 금새 적응돼 버렸다. 몸이 피곤하면 아무래도 동작도 그 이전의 상쾌했던 때보다 느려지고 고로 밀려버리기 때문에 게을러져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전에 올빼미 생활에서 변해보려고 노력한 탓에 꽤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일주일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다시 게을러져버린 걸 보면 인간은 안 좋은 것에 금새 익숙해져버리는 것일까.

어떤 일이든지 나쁜 일을 더 먼저 배우게 되는 그런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다시 정상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조금 더 일찍 잘 필요가 있다.
몇일동안 밤에 잠을 안자고 오후까지 자서인지 일어나고 나서도 꽤나 탁한 기분이 든다. 상쾌하게 일어나는 그런 느낌이 없어져 버렸다. 조금 늦게까지 작업하더라도 저녁에 제대로 잘 때는 그런걸 못 느꼈는데, 확실히 잠 못자면 여러모로 나쁜 점이 많다.

오늘 문득 든 생각인데, 시차가 심한 곳으로 이민간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얼굴이 실제 나이보다 더 들어보이는 건 평생을 한국의 시간에 맞게 밤낮 생활을 하다가 외국에 나가면서 뒤바뀌게 되고 한국의 밤 시간에 활동을 하느라 노화가 빨리 되는게 아닌가 싶다. 군대에 다녀오면 – 특히나 상황근무를 주로 서는 장교나 부사관 – 잠을 많이 못 자기 때문에 또래의 사람들보다 피부노화가 빨리 진행되어 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게중에는 밤새도록 제대로 근무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고운 피부를 유지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대부분 피부가 엉망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사람도 있을지도 모른다.

게으름은 여러모로 일의 진행을 느려지게 만든다. 진행하고 있는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또 몇달이나 걸려버릴 듯 하다.

해커? 경찰이 잡았습니다!?

이 글
보도를 보신 분도 있겠지만… 여러 언론에 나온 유명 결혼정보회사가 저희 회사입니다.
거기 나온 전산팀장 혹은 보안책임자가 저구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결론만 말하자면, 해커가 협박한 당일에 그 실제 IP를 역추적하고 실명까지 거의알아냈습니다. 해커는 당연히 자신의 IP 주소를 숨기고 있었는데..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실제 IP 주소를 찾아냈었죠. 그 IP를 기초로 대략의 물리적 위치(동)까지 알아냈습니다. 실제 IP 주소를 알아낸 건 단순한 방법이지만 발상의 전환이 없으면경찰로서는 불가능했죠. (경찰 스스로도 여러번 시인했었습니다.)

그리고 경찰에서 KT로부터 알아낸 정확한 주소를 덮쳐보니 제가 추정했던 그 이름의 해커가 살고 있더군요. 그리고 놀러다니고 있던 해커의 핸드폰 위치추적까지 해서 밤새 차를 몰아 장흥의 모텔까지 내려가 잡는 순간에도 제가 같이 있었습니다.그리고 압수수색과 기초적인 증거 분석도 같이 했습니다.

해커를 추적하는 한편으로, 저는 수사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시간을 끌기 위해 계속 해커와 협상을 했습니다. 일주일 사이 주고받은 메일만 해도 50통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영장만 해도 하루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해서 중간중간에 해커를 달래면서 시간을더 끌기 위해 100만원, 200만원 이렇게 보내줬죠.

그렇게 계속 사이버수사대와 공조를 했는데…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해커를 찾아내는 핵심적인 정보는 거의 제가 찾아내서 경찰에 신고한 겁니다. ‘수사의뢰’가 아니라 ‘신고’ 말입니다. 그 외에도 경찰측에 협조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경찰측에서 일방적으로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려버렸습니다. 자신들이 모두 다 한 거고, 저희 회사는 무책임하고 보안이 허술한 회사다, 라고요. 저와 저희 팀에서 계속 관련 정보를 찾아내어 경찰에 수사를 재촉했던 저로서는, 그동안 공들여서 해커를 추적하고 잡아들인 수고가 반 이상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보안이 허술한 회사가 어떻게 해커를 추적해서 경찰에게 범인을 지목까지 했을까요…

어제까지 저는, 제가 일주일 동안이나  그 해커와 좋은 말로 협상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기만하고 추적해서 잡아들였던 생각 때문에 마음이 이래저래 괴로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경찰과 언론의 무책임한 태도때문에 망연자실해졌습니다. 경찰도 언론도 실적을 위해서는 진실도 가려버리고 무책임하게 떠들어버리는 모습에는… 정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저와 저희 팀은 끈질긴 추적으로 사실상 해커를 우리가 잡아들인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기뻐했었는데,오늘은, 그나마 KBS가 진실과 가깝게 보도해줬을 뿐, 다른 대부분의 언론사는 기본적인 확인 취재조차 하지 않은 채로 무책임하게보도해버리더군요.

어쨌든 저는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참고인이자 대부분의 증거를 제가 제시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몇달간은 계속 경찰,검찰, 법원까지 드나들어야 할 형편입니다. 내일쯤 경찰측의 누군가가 뭐라고 하면 이 글도 지워야 하겠지요. 경찰은 뭐니뭐니해도 변함없는 권력기관이니까… 단지 지금은 가슴이 너무 답답해 미칠 지경이라 그냥 써봤습니다.

(출처 : 볼랜드포럼, http://www.borlandforum.com/impboard/impboard.dll?action=read&db=free&no=12054 )

작성자의 삭제 예측 발언으로 인해 전문을 허락도 없이 옮겼습니다. 문제가 생길 위험이 있다면 삭제해야겠지요.

진실은 왜곡되기 마련이다. 특히나 욕심에 의한 왜곡이 그 주류를 이룬다. 어떤 이익을 위해 인간은 사실을 왜곡하고 변형한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정당화 시키려는 무의식적 행동은 기억하고 싶은 좋은 것들만 기억하려고 하는 것은 욕구의 하나이다. 왜곡에 주목하기 바란다.

경찰은 직업 군인과 함께 특정직 공무원에 속한다. 공무원 사회에서 성과(실적)는 일반 사회의 인사에서 반영되는 그것보다 더 영향력 있게 요구된다. 인간은 누구나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정받고 싶어한다. 무시 받고 있다 – 인정받지 못한다 – 는 작은 동기로 인해 엄청난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일반 회사에서도 성과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공무원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그것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본인 역시 특정직 공무원으로 전역했기 때문에 머리로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긍정 이미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의 공로를 가로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분노의 원인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행태이다. 물론 빠른 뉴스를 제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빠른 뉴스를 위해 왜곡된 보도를 하는 것은 굉장한 문제이다. 스포츠 찌라시 기사들의 그것과 다름없는 졸태가 아닌가 싶다.

이번 사건의 공로자는 단연 임프(박지훈)님이다. 그러나 경찰과 언론은 그들의 긍정 이미지를 위해 큰 실수를 한게 아닐까?

 

찬양으로 영적회복

찬양의 통상적인 정의는 곡조 붙은 기도이다. 그런 찬양을 통해서 영적 회복을 느껴본 것은 한 두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찬양의 힘에 대해 감탄한다.

오늘 오전 교회 예배를 인도했는데, 새벽까지 PC작업을 하고 지친 몸을 겨우 일으켜 씻고 조금 더 일찍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가 앉아 있었다. 준비를 하는 동안 기도하고 시간이 되어 찬양을 시작했다.

찬양의 작사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신앙고백을 담아 놓았다. 그런 가운데서 기쁨과 희망을 가지며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받는다. 오늘의 나에게는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를 무작위로 찾는 찬송 가운데서 힘을 주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 못해 끼워 맞추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긍정적인 사고를 형성해 주는 그런 말 중 하나는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

는 말을 여러 모로 적용시켜 살고 있다. 생활하는 중에 노래를 흥얼 거리면 사람들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노래를 흥얼거릴 때는 기분이 좋았던 적도 물론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노래를 함으로써 기분 전환에 노력을 기울인다. 물론 효과는 있다. 우울의 정도가 극히 심한 경우에는 그다지 효과를 느끼지 못했던 적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효과를 거둔다.

그런 효과와 더불어 찬양을 드림으로서 영적으로 회복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음과 동시에 위로를 받는다. 그 찬양들의 가사를 지었던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것이 자신에게 적용되기에 이르른다.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엑스맨 – 최후의 전쟁)

엑스맨의 원작자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극중 챨스 세비어와 매그니토는 자신들(뮤턴트)의 자유를 찾는 방법에 있어서 평화적이냐 비평화적(폭력적)이냐의 차이를 가졌을 뿐이다. 그 둘에 있어서는 그렇다.
세비어의 죽음에 대해 매그니토는 훌륭한 존재의 죽음이었다고 평한다. 이런 것에 있어서는 우리네 정서와 다르다고 생각된다. 모든 이들이 그런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을 인정해 줄 수 있는 분위기라는 거다.

전에 미국의 대통령 선거 후에 패자인 대통령 후보가 – 진심이었건 쇼맨십이었건 간에 – 당선 대통령 후보에게 박수를 보낸 것이 기사화 됐던 적이 있었다. 그런 사실을 접했을 때 참 멋지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진정으로 멋져보이지 않을 수 없다.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하기도 벅찬 것이 사실이다. 자신의 어떤 점을 인정하지 못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사례도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모토랄까? 기준이랄까? 내 자신에게는 철저하게, 상대방에게는 관대하게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는 문제에 있어서 내게 있어서는 가감 5분이 최대라고 생각하고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조금더 관대하게 가감 1시간 정도를 허용해 준다. 뭐… 1시간 밖에 안되는거냐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자신에 대한 기준을 생각해 봤을 때 적잖이 관대하다고 생각된다.

상대를 인정해 줄 수 있으려면 그들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야하지 않을까.

비논리적인 글들은 언제쯤이나 논리적이어질 수 있는 것일까?
스스로 읽어봐도 궤변 수준인 글들을 끝없이 남기며…

언젠가는 논리적이며 체계적인 글을 작성할 수 있으리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며…

벌써 3일째다.

최초 컴퓨터가 사망하신지(실질적으로는 하드디스크) 3일째인거다.
게다가, 새로운 컴퓨터에 모든 프로그램과 자료들을 정리하고, 동생방에 사용할 컴퓨터까지 설정하기까지 걸린 시간 정도이다.

가끔씩 운영체제를 새로 깔고 프로그램들을 설치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상태로 어딘가 저장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프로그램 설치 된 상태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그 정도의 용량이 있는 하드디스크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확! 날려버렸을 때 간편하게 Diskcopy 해 버리면 끝난다는 그 편리함에 꽤나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휴우.. 이제 사진 편집해서 올리는 일이랑 선교단 홈피 작업만 남은건가!

ㅡㅡ;;
새로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그램의 구조를 고민해 봐야하는데, 이게 점차 규모가 커져버려서 혼자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송이(cluster) 제도에 따른 일일 점검 파트, 송이 그룹관리, 송이장(cluster master)의 송이 구성원 면담 기록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야한다.
물론 이건 요 전번 홈페이지 개편시 요청받은 것이지만, 그 당시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살짝 거절의 의사를 표했고, 실제로 작업은 거의 안 했다.
액세스를 이용해서 만들어본다고 돌려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액세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꽤나 적기에 그렇게 구조화시키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지금도 별반 달라진건 없지만, 일단 PHP를 이용해서 기초적인 프로그램을 작성해 봄으로써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시작했건만….
진정… 털썩…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완성되기까지 몇 날을 새야할는지 까마득하다.

오란고교 호스트부

요즘 재미있게 보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가 오란고교 호스트부이다.
처음엔 아무생각없는 그저 웃기기만 한 내용이려니 하고 웃으며 보고 말 내용이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런데 최근의 내용을 보면서 부장인 스오우가 호스트부원들의 상처(!)를 치유해나가면서 개설했다는 점이 마음에 남는다.

히카루, 카오루 쌍둥이 형제가 둘을 구분해 보라며 스오우에게 따지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샷

특히나 이 두 쌍둥이 형제(히카루, 카오루)들의 내용은 머리가 굵어지고 어느정도 생각을 정리하게 된 시점부터 느꼈던 소외감에 대해 해결점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하나 또는 둘, 그 이상의 집단에 속해있더라도 독립적이라는 것이다.

집단이라도 독립적이다. 그 집단에 속해 있는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로서 독립적이다.

쨌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 동시에 온전히 독립적인 동물인것이다.

수 없이 외로움을 느껴가면서도 혼자가 아니라고 애써 그 사실을 감추려한다. 자신은 외롭지 않은 존재이기를 갈구한다.

간소한 문양이 새겨진 먼지 쌓인 금 자물쇠
간소한 문양이 새겨진 먼지 쌓인 금 자물쇠가 쇠사슬에 걸려있는 부분이 크로즈 업 되어 있는 사진

그러나 그런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접근하려는 속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굳게 닫혀 있는 자물쇠를 풀고 그(그녀)와 함께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한다.

내 자물쇠를 열고 들어와줄 사람은 없는건가… 스스로 벽을 형성하고 그 벽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방어해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나란 인간은 그렇다.

외롭지 않으려하지만 끝내는 외로워져버리는.. 그런 허술한 인간관계를 가졌으면서, 그렇지 않으려 노력하는 존재

이건… 완전… 궤변 수준인건가… ㅡ.,ㅡ;

컴퓨터 재설치했다~~

어제(8월 20일) 아버지께서 노트북이 생기셔서 집에 있는 데스크탑을 주셨다.
하드를 옮겨다는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원래 쓰던 케이스를 그대로 쓰려고 메인보드랑 다 작업하려했는데, 아버지께서는 그냥 하드만 바꿔달라고 하시기에 뭐.. 조금 귀찮기도하고 그래서 그냥 하드만 두 개 떼어달기로하고는 본체를 해부해 놓고 하드 달아놓고 윈도우 설치하는데… 아! 이게 웬일인지 문제 발생!!
워낙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자료들이 방대해서 원래 쓰던 마스터 하드를 자료 저장용으로 바꾸구 아버지께서 쓰시던 하드디스크에 운영체제만 깔아서 쓰기로 하고 작업하고 있는데, 운영체제를 깔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중에 운영체제가 이상하기에 재시작(역시 윈도우의 모든 해결은 재시작?!)
엌! 이런… 재시작하는데 운영체제가 오류 발생!

hal.dll이 손상되었거나 없습니다.

윈도우 설치 CD를 넣고 복구 콘솔로 확인해 보니, 80기가 짜리 하드가 아닌 160기가짜리(원래 마스터였던 디스크)인것이 아닌가! 그래서 CMOS 셋업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운영체제를 깔았던 디스크를 인식 못하기에 PC에 붙어있는 디스크를 살폈다. 역시나! 하드가 죽어버렸던 것!
무슨 이유에선지모르겠지만 하드가 진동하지 않았다. 나머지 2개의 하드는 이상 없이 진동하는 것으로 봐서는 메인으로 삼으려 했던 디스크가 오래되서 그런가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순간 얼마전 리디의 생각하는 글 중 먹통이 된 컴퓨터의 본문내용이 머리속에 급격한 속도로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시간을 보니 새벽예배 시작시간이 지나고 있었고, 하나님 왜 이런건가요하고 기도해봐도 도무지 해결방안이 생각나지도 않고 복잡해서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삼성 서비스센터에 가서 인식 불가의 이유로 하드디스크를 교체해왔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역시 삼성! 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집에 와서 다시 윈도우 설치하고 인증을 받고 재시작하는데 또 다시 새벽과 같은 일이 생겼고, 또 다시 서비스센터를 찾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교체해오는데 서비스 기사 曰 “또 다시 안되면 계속 바꿔 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다시 가져가면 다른 쪽으로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살펴보세요”.

그렇게 집에 와서 설치하는데, 잘 되는가 싶더니 설치 완료후에 재시작하는데, 이번엔 블루스크린이!!
이젠 한계에 다다랗다. 의자에 올라 무릎사이로 머리를 넣고, 양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제 모르겠어요. 뭐가 문제인거죠? 제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로 한것들(서원)을 시행하지 않아서인가요? 이것도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기게 하기 위해 준비해주신것 아니던가요? 이젠 모르겠어요. 하나님보다 컴퓨터를 우선시해서 그런건가요?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설치 중간에 읽었던 말씀 본문이 생각났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민수기 30장 2절)

과부하걸린 머리를 쥐어싸고는 잠시 잠에 들었다 깨고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윈도우를 다시 설치하는데, 이번엔 설치된것을 복구하니 잘 되었다.

역시 뭔가 하나님앞에 걸려있으면 문제가 생겨버린다.
참… 리디님 글을 읽으면서 “이거 나도 좀 위험한데?”라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경각심을 가지고 생활했어야하는데, 역시나 하나님은… 멋쟁이!!

조금 더 기도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대화하시기를 원하셨던거다.
조금 더 당신께 다가가길 원하셨던 거다.

엇갈리는 행사 참여

어제(19일, 土)도 테터툴즈의 2차 오픈하우스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컴퓨터 관련 행사에는 왜 이렇게 가질 못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언제나 소식을 늦게 접해버리거나 아니면 일찍 접했더라도 항상 일정이 잡혀 있는 날이다. 그 일정이라는 것도 변경불가능한 일정이라던지, 다른 날에 잡혀 있는 일정이 그 날에 잡혀버린다던지 하는 것이 다반사인것이다. 이건 다 핑계라고 치부해버리면 되는걸지도 모른다.
행사 공지는 대부분 짧게는 일주일 전(좀 심했나? ㅡㅡ;;)이나 그 이상의 기간에서 할 텐데, 정보의 입수가 항상 늦는 것은 무관심한 성격탓이라고 정당화해버리면 될까나.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이 무관심이라는 것이 성격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 마디 더 하자면,| 어린 시절(초등학교 4학년)부터 PC에 몰입(!)하여 살아온 나로서는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참 힘들었다. 부모님들도 나름 일 때문에 항상 바쁘셨던데다가 PC를 접하고 나서는 동생과도 – 물론 다른 남매들보다 잦은 접촉이나 친밀감을 가졌겠지만 – 잘 놀지않아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초, 중, 고등학교 때의 집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거나 아주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스무살이 넘어 내 길이 PC쪽이 아니라고 생각이 되어질 무렵부터는 조금씩 소외감 같은것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적극적이며 외향성의 성격을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생각된다.
간부는 어떤 조직에서든 그 아래에 속해 있거나 위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소속돼 있는 집단의 여러 면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정리했다.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군에 간부지원해서 갔는데,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그런 성격을 얻으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아서인지 적극적이어 졌으며, 외향성의 성격을 획득했다고 판단된다.
물론 처음에 들어가서 – 훈련을 마치고 – 간부라는 신분을 갓 가지게 되었을 때는 그런 무관심한 성격탓으로 꽤나 고생했다. 물류 창고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아래 함께 일하던 친구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또 업무에 관심을 가지는데는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이론적인 수업들을 업무에 적용하고, 또 제대로 업무수행을 하는데까지 이른 시간은 무려 4년 가까이다.
아무래도 관심이라는 것이 있어야 업무능력이든 뭐든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변화..

나란 인간은 참 변하지 않는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변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이, 환경, 성격이라는 3가지 분류로 살펴본다면,
먼저 지금은 무려 27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지고 있다. 나이라는 것은 단지 태어난날로부터 몇 년이 흘렀는가를 나타내기도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사람이 얼마나 죽을 날에 가까워지는가 하는 것을 수치로 나타내주는 것이다. 참… 쓰고 나서도 우울하지 않을 수 없는 정의로군.

환경면에 있어서는 전보다 평균적인 삶의 질이 조금 더 높아졌다고 해야하는걸까? 질이라는 것의 기준이 모호해서 명확하게 어떤 점이 어떻게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린 시절의 생활과 비교해봤을때 지금의 삶은 여러 모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해있다. 이전의 월세 생활에서 전세로, 지금은 어렵게 마련한 자금들을 이용한

우리집

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좋아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부채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나아졌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 가족은 화목하기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겠다.

철없던 고등학교 시절(17살 ~ 19살)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됐는데, 오늘 그렇지도 않은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낮에 당산에서 회의를 하고 나서 친구녀석이 “너 요즘 왜 이렇게 침체돼 있니?”라는 것이다.
스스로는 성격의 변화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여서인지 “그래?”라는 답변만 해 줬을 뿐이다.
단지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변한건가? 사람의 성격이라는거 나이 먹어서도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 타인이 갑작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단숨에 – 변해 버린 것일까?
지금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까 확실히 전보다 굉장히 차분해졌다. 사람이 결단을 하고 그것을 행하려고 할 때 변화되어버리는 것인가. 결단이라는 것은 목표가 있지 않더라도 사람을 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 버릴 수 있는 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란 변하게 마련이라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변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좋지 않은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사람이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갑자기 달라지게 된다는 생각이 대표적이지 않을까?

성격 변화라는 주제에 연관지어 성화라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성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믿기로 작정했을 때 긍정적으로 발전시켜나간다는 과정을 말하는데, 비난 받는 – 비그리스도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히 성화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완전히 성화된 인간이 아닌 불완전 성화의 상태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것이다.

뭔가.. 꽤나 복잡해져버릴 것 같아서 이만 줄여야 겠다. 사실 좀 피곤하기 때문에 줄이는 것이기도 하다.

불꽃 중앙 교회 수원 성전 16주년 예배

오늘(2006년 8월 19일)은 수원 성전 창립 16주년이었으며, 내일 그에 대한 감사예배를 드린다.
2005년에는 15주년이라고 해서 굉장히 규모가 컸었다고 한다. 컨벤션 센터를 빌려다가 전 교인들과 여러 지인들을 모아서 행사를 가졌다고 한다.

1990년 당회장이신 강마리아 목사님께서 김충규 목사님과 이현익 목사님을 만나서 시작하게된 교회가 이제 16년이 흘러서 성령의 역사하심과 하나님의 감찰하심으로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바르게 살아가는 당회장(강마리아) 목사님은 언제나 존경스럽다. 나를 포함한 많은 현세의 부패한 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된다. 물론 부패하다고 알려진 것들의 대부분은 공격용 거짓 보도인 경우가 적지 않겠지만, 내게 있어서 그들과 다른 인물이라고 평가되어진다. 목회의 경영면과 말씀에 입각한 삶에 있어서 모델이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말씀에 있어서는 철저한 김충규 목사님을 모델로 삼고 있다.

쨌든 오늘 수원에서 청년 예배를 드리고는 청년들의 연극 연습이 있어서 보고 왔는데, 참 기특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번 전교인 수련회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특징적으로 잘 묘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칭창해 주고 싶다.
내일 본 공연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연습으로 만족해야했지만, 그들의 열정은 실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내게 있어서도 그런 열정이 있어야하지 않겠냐는 도전을 받았다.

거리, 지하철 모금(구걸)

길거리 혹은 지하철등에서 모금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 내가 저들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되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진정으로 그 모금 목적에 맞게 그 자금을 사용할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진정 불우한 이웃들도 있을거라는 적은 가능성을 이유로 가끔씩 돕기도 한다.

학창시절 친구들과의 대화중에서 지하철 맹인 장애우 모금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꼭 나오는 것이 그런 사람들 중에 진짜 맹인(장애우)이 아닌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돌아다니며 모금하는 사람들이 끝(또는 처음)칸에 가서는 안경을 벗고 내린다거나, 장난으로 돈을 넣는 척하다가 안에 있는 돈을 빼려고 하면 정확하게 그 손목을 잡아낸다던가 하는 것들을 전해듣기도 했다. 바꿔말하면 사지 멀쩡 비장애우인경우에도 그런 모금을 통해서 생활을 이어나간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들 중에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부천역에서 활동하는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부천에 와 살게된 지 12년 정도 되었고, 12년 전 부천역에서 꾸준히는 아니어도 지금까지도 가끔씩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얘기였다. 친구가 부천역에서 모임을 끝내고 집에 가는 길에 그 사람이 그랜져를 타고 가더라는 것이다. 친구에게서만 들었다면 거짓이었다고 판단했겠지만, 그 이후에도 연배가 있으신 분들의 목격증언이 있었으므로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불로소득을 준다는 것이 분하다.

그렇다면 통일교 배경의 단체들의 모금행위는 무엇이 문제인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통일교의 이미지는 적잖이 부정적이다. 기독교 내에서는 이단이라는 점과 비기독교인 중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활동자금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 먹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며, 선한 목자들을 그들과 함께 매도시켜버리도록 만들어버리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박준우씨(31·봉천동)는 “3~4년 전부터 국제학생봉사단 혹은 그 비슷한 이름을 쓰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몇 천원씩 돈을 준 적이있다. 나이 어린 학생들인 데다 외국인이라는 점, 뭔가 공익적인 성격이 있어 보여서 흔쾌히 기부했다. 하지만 통일교와 관련이 있는단체인 줄 알았다면 돈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뭐.. 저 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으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다면 오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사를 시작한 이후 모금 행위가 사라졌다고 하는 기사 말미의 내용을 토대로 생각해 봤을 때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통일교와 관련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보다 더 초점을 두어야 할 문제는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 모금액이 진정 그들이 목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제대로 쓰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랑은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조합

얼마 전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아래의 동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사랑에 대해서는 매우 많은 자료들이 있고, 또 많은 의견들이 있다.

인성이의 사랑은 이상이다. 지현이의 사랑은 현실이다.

분명히 사랑은 현실이다. 그러나 사랑으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착각이라는 것은 굉장한 오류라고 생각된다. 물론 현실 때문에 사랑이 휘청휘청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적지 않은 요소들을 극복해 나갈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 위대하다 한다.

나 역시 조인성과 비슷한 입장이기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핑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 사랑을 시작할 준비는 하고 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자라면 평생 함께 해 줄 수도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혼률이 급하게 오르고 있는 지금의 세대에서 이런 입장에 대해서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이 남자라면 내게 어떤 것이든 해 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당장의 즐거움이나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랑을 하는 자신은 용납할 수 없다.

많은 사랑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나름 직접 또는 간접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사랑을 통해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이를 가지지 않도록 상대를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평균적으로 사랑의 지속기간은 2년여라고 한다. 하지만 내 아버지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다투었을 때 잠시 사랑의 감정이 끊겼을 때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끝없는 사랑을 보이고 계신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와서인지 난

너만을 영원히 사랑해

라는 말을 믿는 바보 중에 하나이다.

쨌든 나에게 있어서도 사랑은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현실은 사랑하는 사람 상호간의 협조체제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해 낼 수 있다는게 이 글의 주제인 셈이다.

한국통신 요금, 그리고 교육이라는 것…

이번달 들어서 사역중인 교회의 성경학교로부터 시작해서 이번주에 집회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어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ㅠㅠ).

다녀와서 빠져나갈 여러 요금들을 점검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이 한국통신 요금이었다.
저번달에 해지를 했기 때문에 요금이 70%정도만 나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해 본 결과, 해지 때와는 달리 요금 전체가 청구됐다!
한국통신 요금 납부사이트에서 확인해 보려고 들어갔더니만 이미 해지된 상태이기 때문에 조회가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해지를 했더라도 지난 기록들은 살펴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한가지를 알게 됐는데, 작년 초에 가입해서 약 3개월여를 사용했던 넷스팟이 해지가 안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신경쓰지 않은 내 탓이다.
쨌든, 지금까지 1년여의 기간동안 20만원 가까이 되는 돈을 버렸다. 무신경한 내 뇌구조라니…

요 몇 일간의 대한수도원 성경학교 교사활동을 통해서 한 가지 거듭 확인하게 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선생님은 역시 폭력이나 강압적인 주지방법보다는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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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전혀 때리지 않았다거나 전혀 강압적이지 않았다는 말을 거짓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아야 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을 때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뿐만 아니라 라는 사람에게 더 가까이 오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초등학생 폭행 선생님들이 절실히 필요하다는게 내 생각이다. 교육에 있어서 폭력은 한 인생을 망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의 폭력은 필요 이상의 폭력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때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내 경우를 들자면 내 아버지는 군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셨다. 신체적인 결함(색약) 때문에 장교 신분에 지원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병장으로 전역하셨지만, 전역 후의 아버지께서는 군의 교육 방식, 또한 조부님의 교육 방식을 취하셨다. 그 교육 방식이라는 것은 잘못에 대해 사랑의 매로 다스리시는 것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 이어졌던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의 원인은 그 교육방식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같은 경험을 두고 동생의 평가는 다르다. 사랑으로 하신 행동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긍정적 평가를 가진 우리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그런 동생의 의견에 일부 찬성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소극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부분까지 덮을 수는 없다.
사람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런 면에 있어서 매우 힘들다.

그래서 교육자라는 분들이 존경받는 것이다.

여름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마쳤다.

작년엔 두 행사를 함께해서 부담이 덜 됐던 데다가 선교단에서 하는 캠프도 갈 수 있어서 좋았는데,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성경학교와 전교인 수련회를 다른 일자에 하게 됐다.

그 덕분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선교단 캠프에 가지 못한것은 적지 않은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원 계획은  작년과 같이 전교인 수련회와 병행하기로 되어있었다는데, 이번엔 수련회 전달 초에 갑작스레 변경하게 됐다고 한다.
수원 성전에서 교사를 맡고 있는 사람들도 교사 강습회는 물론이거니와 준비를 조금 더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이번 성경학교는 어쩐일인지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은데다가 더욱이 성경학교를 하는 곳이 부천이 아니라 수원이었기 때문에 가지 못하는 아이도 생겼기때문에 조금 더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성경학교는 어찌어찌해서 잘 마무리 되었고, 전교인 수련회가 있었다.

작년에 선교단 캠프에서 사진을 담당해서 영상담당했던 친구들과 같은 방에서 생활하며 여러모로 고생스러웠기 때문에 사실 이번 수련회 덕분에 캠프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일이라는 것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다.
나 역시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구성원이기 때문인지, 수원 성전 청년회 회장으로부터 봉사할 남자청년이 적다고 하면서 봉사 부탁을 받았다.

당연.. 일단 그다지 할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승락했다.
승락해 놓고는 참.. 난감해 했다. 이번에 가서 작년보다 더 고생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조금은 나를 겁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4박 5일간의 수련회에서의 봉사는 생각보다 즐거웠고, 그 분으로부터의 응답을 확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굉장히 의미있는 수련회가 되었다.

뭐.. 기록을 남기는 것에 있어서 사진만큼 좋은 것이 없으니 일단 오늘은 밤새도록 명언관리 프로그램을 손보느라 피곤하기에 여기서 줄여야겠다.

우워… 뭐 한것도 없이 꽤나 긴 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기쁘도소이다!

와~ 티스토리에 초대됐다.

미니위니에 새로 생긴 티스토리 초대 공간이 생겼기에 수련회 가기전 신청해 뒀었는데, 요즘은 여러가지로 좋은일이 계속된다.

이번 티스토리 계정이 생긴일만해도 그렇고, 내가 그토록 원하던 응답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일생일대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응답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그 어떤 것들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생각된다.

쨌든.. 나도 블로거인가?!

전에 네이버 블로그를 사용했었는데, 거의 사진 연결용으로 썼다가는 네이버에서 외부 링크를 차단시켜버려서 거의 쓰지 않는 폐쇄 상태로 버려져 있다.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잔뜩 드는건 왜일까?
전처럼 하루종일 글들을 읽느라 시간을 다 소비해 버리는 바보같은 짓은 반복하지 않겠지?

조금 더 체계적인 글을 작성하는데 주력하는 공간이 되었으면하는 작은 소망도 있다.

헤헤~ 마지막으로 계정 주신 WAZUP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