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슭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한국어판)를 방금 다 읽어냈다.

전에도 몇 번인가 쓴 적이 있지만 책을 다 읽어낸다는 것은 일단 그 책의 난해함, 분량에 상관없이 엄청난 일이다. 읽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차치하고 읽는 속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 책을 – 이전에도 많이 읽었지만 계속 읽기 시작한 이후로 – 읽었을 때보다 훨씬 빨라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한 달이 걸리던 한권의 읽기 속도는 몇 주 내지는 몇 일만에 읽을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굳이 흡족해 하는 것은 책 읽기 속도가 느리신 분들은 공감하리라 생각된다.

쨌뜬 이 책의 마지막권인 3권에서 역자인 이윤기씨는 도움말을 별도로 넣으려던것을 그만두었다면서 에코 교수의 말을 인용하여 넣었다.

작품이라는 것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나는 내 작품과 독자 사이에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독자들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혹은 작품을 가로막고 섬으로써 그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가 자아서 훼손할 생각은 없다.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푸코의 진자 3, 서울: 도서출판 열린책들, 2006, p. 1191.

그렇다 나는 어떤 분야의 것이든지 일단 평판을 제쳐두고 직접 확인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사람의 감상이나 느낌, 또는 작가(감독)의 의도 따위는 이미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졌느냐 혹은 어떤 메시지를 넣었느냐는 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 작품의 의도, 메시지를 구해내고 나서 필요해진다.

다른 사람의 것들을 무시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순수한 자신의 생각을 가지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에코 교수의 한 마디는 필자의 행동에 대한 한 근거로써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에코 교수가 부러 작품의 초반부에 난삽한 글이 있는 까닭에 대한 이유가 걸작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 내 책 머리에 길고 난삽한 글이 실려 있는 데는 까닭이 있다. 원고를 읽어본 내 친구들과 편집자들은, 너무 어려워서 읽으려니까 진땀이 나더라면서 처음의 백 페이지를 줄일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두 번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이 낯선 수도원에 들어가 이레를 묵을 작정을 한다면1 그 수도원 자체가 지닌 리듬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내 책을 읽어 낼 수 없다. 따라서 난삽한 첫 부분은 나의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 독자가 마땅히 치러야 하는 입문 의례와 같은 것이다. 이 부분이 싫은 독자에게는 나머지도 싫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산으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산기슭에 남아 있는 것이 좋다. 소설로 들어간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을 오르자면 산의 호흡법을 배우고, 산의 행보를 익혀야 한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푸코의 진자 3, 서울: 도서출판 열린책들, 2006, p. 1190.

그렇다! 배울 생각이 없으면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어려운 부분에 대해 동생이 잘 읽히느냐는 질문을 해 왔다. 어머님께서도 읽어보시려 하셨는지 똑같은 질문을 해 왔다. 필자는 어떤 것이든지 일단 시작하면 끝내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읽은것이기는 하지만 저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는 관심을 가지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공부와 벽을 쌓았다고 할만큼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역을 하면서 공부라는 것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공부다운 공부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하다보면 알게 된다. 경험이라는 것은 그런 면에 있어서 중요하다. 뭐든 어렵더라도 일단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공부 역시 지금 당장은 어렵고 피토하고 쓰러질 것 같아도 계속 하다보면 자신만의 요령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공부는 그 이전에 받았던 성적의 두배수에 달하는 평점을 받도록 해 주었다. 컴퓨터에만 국한 되었던 집중력은 공부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것이다.

누구든 산기슭에 남아있고자 한다면 정상에 올랐을 때의 기분이나 산 속에 들어갔을 때의 그 기분을 전해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에코교수는 자신의 책을 읽을 자격시험을 작품의 초반부에 장치해 놓았기 때문에 산기슭에 남아 있으면 된다고 하였지만 실상은 산에 오르기를 바랐다고 생각한다. 산에 올라 그 정상을 점령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산에 정상에 올랐다고 해서 완전히 그 산을 정복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끝까지 읽었음에도 아직 모자란 감이 있다.

이런 작품이 더 매력이 있는 것은 필자의 성격이상 때문일까?

  1. 실제로 “장미의 이름”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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