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

김준우박사 (감신대 초빙교수,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I. 문제제기: 세계/한국 기독교의 몰락 위기 — 윤리학자가 최근의 예수 연구 소개에 전념하는 이유

1.  한국교회/이민교회는 지난 세대 동안 급성장했기 때문에, 서구교회의 몰락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러나    2000년 1월 London Sunday Times 보도 – “영국 전체국민의 70%가 하나님을 믿지만, 18세 연령층의 경우는 77%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기독교가 한 세대만에 이렇게 몰락하는 위기는 조만간 한국교회의 현실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와 쇠퇴는 젊은층과 고학력자가 교회를 빠져나가기 때문으로 조사. 새신자 전도의 어려움 – 영남지역의 꽤 큰 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새신자는 10명쯤”- 3년에 1명꼴. 2천년 동안 확장을 거듭한 기독교가 서구에서 한 세대만에 급속히 몰락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새신자를 얻기 힘들어 교회가 점차 “양로원”으로 바뀌어가는 현실적 위기의 신학적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외적인 요인들, 즉 유물론적 세계관, 세속주의, 소비주의, 주5일 근무제 등의 도전 앞에서 교회 내적인 요인 해결이 시급하다.

2. 귀국해서 두세 군데 기독교 대학들에서 몇 년 동안 [기독교 개론]과목을 가르친 경험: 신학생들 가르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신학생들은 기독교 전통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작업이지만, 기독교 대학들의 학생들 가운데 기독교인은 5-10%에 불과했다.  대다수 비기독교인 대학생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는 이유는 첫째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회가 가르치는 것들은 동정녀 탄생, 육체부활 등 이해할 수 없는 것,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무조건 믿으라고 한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억지부린다.”

3. 물음
1: 왜 기독교인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가?
왜 기독교인들은 정직하지 않은가?
왜 기독교인들 가운데 부정부패와 비리에 연루되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들보다 그 비율이 많은가?
왜 기독교인들이 예수는 믿으면서, 예수처럼 목숨 걸고 살려 하지 않는가?
생태계 파괴에 대한 무관심.
물음
2: 교회가 가르치는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지, 교회 밖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 언어가 매우 게토화된 언어이다.- 새신자들의 장벽.
교회는 오늘날 교육받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아니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인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육체부활을 정직하게 이해, 수긍하는가?

4. 이 문제는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정직한 이해 -> 확신 -> 열심 -> 교회부흥.  “교회의 게토화된 언어를 비기독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윽박지르는 한, 기독교가 몰락하고 만다는 것은 서구교회가 이미 입증했다.
오강남 박사의 {예수는 없다}가 1년 넘게 기독교 학술서적 베스트셀러 1위- 성경에 대한 정직한 이해를 추구.  청년층의 갈증 반영,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고작 “성불하신 예수”, “유영모와 함석헌의 예수”가 전부이다.

II. 최근의 “예수 르네상스” – [예수 세미나](Jesus Seminar)를 중심으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데, 굳이 예수를 “따라서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가? -> 언행 불일치의 근본 이유.
매주일 사도신경의 내용에 대해 머리로는 정직하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냥 고백하는 것, 외우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기독교인의 정직하지 못하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신앙고백조차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존 캅 박사의 지적대로,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이성적으로 검토하고 토론을 통해 자기 나름의 신앙으로 다듬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열정이 없는 것 아닌가?  사도신경에는 알맹이가 빠져 있다. 즉 예수의 잉태/탄생, 죽음과 부활/승천만 있지, 예수의 행적, 교훈은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헬레니즘 밀의종교 영향을 받은 바울의 구원자 이해(하늘에서 내려왔다가 다시 승천한 구원자)가 압도하게 된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잉태, 탄생, 수난, 죽음, 승천)은 모두가 수동태로 되어 있다.- 예수의 일생이 이처럼 수동적이라면, 기독교인의 생활태도도 자연히 수동적, 비주체적, 노예적이 된다.

1. 예수 이해는 본문(text)과 상황(context)의 관계 이해가 기초이다 – 예수와 폭력 문제에 대한 오해를 중심으로 9․11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모슬렘 근본주의자들의 폭력에 대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대응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원수 사랑을 내세워 폭력에 굴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결과적으로 폭력을 부추기고 있다. 폭력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1)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마태 5:39).
이 말씀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오해하듯이 폭력에 대한 굴종이 아니라, 절대로 폭력을 용납하지 말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반항하라는 가르침이었으며, 폭력에 대한 피해의식이 복수심으로 발전하여 똑같이 폭력을 사용하는 가해자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가 오른편 뺨을 친다는 것은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친다는 뜻이다. 즉 가해자가 오른쪽 손바닥이나 주먹으로 칠 경우에는 왼뺨을 맞게 된다. 따라서 누가 오른편 뺨을 친 경우, 즉 가해자가 왼쪽 손바닥이나 왼손 주먹으로 치는 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왼손을 사용하지 않았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심지어 왼손을 사용하여 제스처를 하는 경우, 열흘 동안 회원직을 박탈하고 참회를 해야만 했다.  오른쪽 손을 사용하여 오른편 뺨을 때릴 수 있는 것은 손등으로 때릴 경우뿐이다. 이것 역시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창피와 모욕을 주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가 오른편 뺨을 치거든”이라는 말은 가해자가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편 뺨을 치거나, 아니면 오른쪽 손등으로 오른편 뺨을 치는 것으로서, 이것은 모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아이에게,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네 주제를 파악해라”는 뜻으로, 혹은 “너는 내 부하이니 권위에 복종하라”는 뜻으로 손등으로 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너는 쓰레기 같은 존재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 즉 당시의 소작농들과 병자들, 여인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는 것에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씀은 “그런 비인간적인 모욕을 더 이상 당하지 말고, 왼쪽 뺨도 돌려대라”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은 반항하라는 뜻이 분명하다. 즉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이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가해자가 더 이상 손등으로 때릴 수 없게 된다. 또한 가해자가 왼손으로 친 것은 상처를 주지 않고 단지 모욕할 생각으로 친 것인데, 왼쪽 뺨을 돌려댈 경우에는 부득이 오른쪽 손으로 때릴 수밖에 없게 된다. 오른쪽 손으로 때린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싸울 경우뿐이기 때문에, 상급자가 오른 손으로 때리는 것은 결국 하급자를 자기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로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왼쪽 뺨을 돌려대는 것은 소작농이나 노예가, 혹은 유대인이 그 상급자에게 대하여 “나는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는 행위이다. “나를 존엄성이 있는 존재로 취급하라”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를 때려죽일 수도 있지만, 나는 더 이상 쓰레기가 아니며, 당신과 동등한 사람이다”라고 행동으로 선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것은 폭력에 굴종하여 눈을 내리깔고, 주인의 처분에 맡기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는 지금 “절대로 굴종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폭력적 세계 속에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그런다면 맞아죽을 것이다. 모든 약자들이 함께 왼뺨을 돌려댈 때 비로소 사회적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2)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달라 하면 속옷까지 내주어라.”
이 말씀 역시 불의를 조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겉옷과 속옷이 입은 옷의 전부였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담보물 규정은 신명기 24:10-14에 나와 있다. 보통 담보물은 양이나 염소처럼 동산(動産)을 담보물로 잡지만, 그런 종류가 없을 경우 부동산을 담보물로 제공했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들은 겉옷을 담보로 잡혔지만, 낮 동안뿐이고, 해가 질 무렵에는 채권자가 반드시 채무자에게 겉옷을 되돌려주어, 추운 겨울에 채무자가 그 겉옷을 덮고 잘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 당시에 빚 문제는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다.  로마제국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갖가지 세금을 부과했다. 부자들이 세금을 탈루하는 방식은 제국의 변방에 있는 토지를 매입하여 재산을 은닉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가 그 토지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자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는 방식은 빌려준 돈이나 곡식에 대해 25% 내지 250%의 엄청난 이자를 붙이는 방식이었다. 농민들은 결국 이자를 갚지 못해 땅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채권자들이 아니라 채무자들을 상대로 이 말씀을 가르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법정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러므로 “너를 고소하여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는 말씀은 채무자가 입고 있는 속옷까지 벗어주어 완전히 벌거벗고 나체가 되라는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자신의 벗은 몸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알몸이 되는 것은 최소한 사람들을 찡그리게 만드는 일이었다. 로버트 펑크의 연구에 따르면, 사해사본의 하나인 {훈련교범}에 따라, 옷에서 팔을 빼면서 우연히 맨몸을 드러내면 30일 간 참회해야 했다. 친구에게 아무 이유 없이 맨몸을 드러낸 경우에는 6개월 간 벌을 받았다(Manual of Discipline 7:12, 14.). 수치를 당하는 것은 그 나체가 된 사람을 보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게릴라 전술이다. 채권자 앞에서 벌거벗고 떠남으로써, 고리대금에 근거한 경제구조가 어떤 것인지를 남김없이 폭로하라는 가르침이다.

3)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이 말씀 역시 많이 오해되어 왔다. 소요사태가 발생할 경우 로마 군단들은 신속하게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하루에 100리를 행군해야 할 경우도 있었다. 30~40 킬로그램에 달하는 배낭을 지고 행군하는 것을 쉽게 하기위해 로마의 군법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시켜 대신 배낭을 지고 가도록 하는 권리를 허락했다. 이러한 명령에 따르는 것은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불응하는 것은 반역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남용할 경우 토착민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오리로 제한시켰다. 또한 로마의 모든 도로에는 오리마다 표지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이 군법을 어기는 군인들에 대해서는 장교들(백부장)이 적절한 처벌을 주도록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 청중들에게 단지 로마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배낭을 지고 오 리를 걸어간 후에 오리를 더 가겠다고 우기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피해를 입는가? 그 병사로 하여금 군법을 어기도록 만들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하라는 것이다. 로마 병사가 유대인에게 싹싹 빌도록 만들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1마일을 더 지고 가겠다고 맞설 때 로마 군인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식민지의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 체제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과 자주성을 목숨 걸고 지키는 전략을 통해 개인의 해방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확보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폭력 앞에서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폭력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폭력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타인의 불안전 위에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안전을 보증할 때만 우리가 안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폭력을 당할 때라도 비폭력 투쟁을 통해 우리의 존엄성을 지킬 뿐 아니라, 가해자의 폭력을 철저하게 폭로하여 자신들의 폭력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후에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서, 인간 사이의 철저한 신뢰에 바탕을 둔 윤리이다.

2. “예수 르네상스”의 신학적 배경과 방법론
18세기 계몽주의 이전의 성서연구: 교의학에 종속되어 교리를 변증하는 수단/도구.
18세기 계몽주의 이후의 성서연구: 역사비평이라는 합리성을 통해 본문 배후 탐구 – 교리와 교권으로부터 해방.
20세기 전반부: 역사적 예수는 알 수도 없고,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알 필요도 없다.
1960년대 해방신학: 현재적 해방실천에 초점 – 텍스트 자체보다는 해석자의 컨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1970년대 사회학적 방법(Gottwald, Kee, Horseley, Teissen): 본문의 사회적 요소들의 상호작용 관계 관찰.
1980년대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해석: 본문 배후가 아니라 본문 자체의 구조 속에서 의미 해석.
1980년대 이후 “예수 르네상스” – 역사적 예수에 관한 연구서들이 수 십 권 출판.
1983년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산하에 Historical Jesus Section 구성됨
1985년 [예수 세미나] 조직

1) 예수찾기의 간략한 역사 (게르트 타이센․아네테 메르츠, 손성현 역, {역사적 예수}, 다산글방, 2001, 31 이하를 중심으로 정리)

(1) 1단계(Old Quest): 18세기 중엽-19세기 독일
합리주의, 중세의 권위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앙의 “참된 근거” 추구
교회가 가르쳐주는 신격화된 “그리스도”가 아니라, 성서와 역사와 이성이 가르쳐주는 “진짜 예수”를 찾기 시작.
라이마루스(1694-1768): 네 복음서들에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들이 서로 다르다 – 복음서들의 불일치 문제 지적.
예수는 실패한 유대인 혁명가였다. 예수는 예언자적-묵시적 성격의 유대인인데 반해, 기독교는 사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예수의 정치적-메시아적 메시지와 사도들의 그리스도 선포 사이의 불일치는 사기 때문이다.
슈트라우스, {예수의 생애}(1835/36): 예수는 위대한 종교적 천재 가운데 하나, 기적적으로 종말을 기대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열광적” 유대인이었다. 복음서들은 역사가 아니라 “신화적 진술”이다. 예수 전승이 신화적으로 변형된 것은 사도들이 사기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상력의 무의식적 과정 때문이다.

(2) 2단계: 역사적 예수 탐구에 대한 자유주의 신학의 낙관론,
18세기 말부터 100년 동안 수많은 “예수전” 연구 – 르낭(1863), 슐라이에르마허(1864), 슈트라우스(1835, 1865) 등 교회의 선포와 역사적 예수를 대치시킴.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 -> 기독교의 신빙성 근거 -> 자유주의 신학
르낭: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차츰 너무 높은 수준의 것을 요구함으로써 배척받음.
홀츠만: 무시간적인 윤리적 진리를 설파하는 교사의 모습,
요하네스 바이쓰: 임박한 종말을 선포한 이
슈바이처(1906): 예수는 “철저한 종말론자” 곧 가까운 장래에 하느님의 기적적 간섭에 의해 종말이 일어날 것 기대.  자신의 선교중에 사람의 아들이 도래하리라는 기대를 갖고 사역하였으나, 이런 기대가 빗나갔음을 알고 자신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에게 메시아적 고난을 체현하기 위해 자발적 죽음 선택. 그러나 그 종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는 “착각한 묵시종말론자”(mistaken apocalypticist)였다.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찾기를 포기하고 다시 “신앙의 그리스도”에게 돌아갔다.
비판: 예수전 연구는 역사적 예수의 참 모습이 아니라, 각 저자의 시대정신과 이상이라는 의상을 예수에게 덧입힌 현대적 예수를 그린 것이다.

(3) 3단계: 역사적 예수 안 찾기 시대(no quest): 질문의 폐기 시대
신정통주의(불트만, 바르트, 틸리히 등) –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 역사적 예수 역사적 예수를 찾는 일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며 신학적으로 불필요하다.
양식비평: 복음서의 전승들이 직접 반영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아니다.
켈러(1896): 진짜 예수란 역사가가 발견할 수 있는 예수가 아니라, 처음 신앙인들이 믿었던 케리그마 그리스도.
바르트의 <교회교의학>(1932): 예수의 삶의 의미와 존재 자체의 의미는 그의 죽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불트만의 <예수>(1926), <신약성서와 신화론>(1941):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불트만: 예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에서의 결단을 촉구하는 실존주의적 도전.  예수의 인성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필요하지도 않다. 필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뿐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에서 유래했다.
비판:
공적: 세상의 역사를 최고의 왕좌에 모시는 이른바 역사절대화라는 우상숭배로부터의 탈출 극단적인 역사회의주의라는 불안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  “믿음만으로”라는 신앙우선의 정신을 재생.
폐해: 케리그마 신학과 실존론적 해석학의 결합은 성서의 구원의 메시지를 극단적으로 사사화, 내면화, 정신화, 추상화시키는 엄청난 폐단을 야기시켰다(김창락, 62)

(4) 새로운 탐구(New Quest): 역사적 예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가능하며 신학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언동 속에서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근거를 찾으려함.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내포된 자기 이해는 초기 기독교 선포 속에 드러난 자기이해와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탐구를 이룩할 수 있으며, 신정통주의의 지침 아래에서 타당하다. 문학적 방법과 역사적 방법.
케제만의 {오늘의 신약성서 문제}, 본캄의 {나사렛 예수}(1956), 로빈슨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1983)  신정통주의의 틀 속에서, 복음서 속의 예수와 바울서신들 속의 그리스도 사이의 연속성 찾기에 주력하였다.
보른캄: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 내용상 연속성 있다. 현재적인 종말론적 성취
예레미아스: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의 육화된 존재
비판: 신정통주의는 예수의 중요성을 단지 그의 죽음과 부활에만 국한시켰기 때문에, 부활절 이전의 예수의 생애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과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펑크, 109)

(5) 세 번째 탐구(Third Quest) – 예수 르네상스 1975년 이후 신정통주의 붕괴, 나그 함마디 문서, 사해 두루마리 발견, 비유와 지혜전승 재발견,  –  종교사학, 문화인류학, 사회과학 등으로부터 배운 모델, 학제간 연구
a. 역사적 예수와 복음서들의 예수 사이를 구별한다.(근본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이 둘이 똑같은 존재라고 주장)
b. 신약성서 복음서들 이외의 자료들도 이용한다.   (   ꡒ    비정경 자료들은 중요하지 않음을 주장)
c. 교회의 모든 교리들을 역사적 탐구에서 제외시키지 않는다 (   ꡒ    역사적 예수를 신조의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킴)
d.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 가운데 진정한 것을 가려낸다. (    ”     가려내지 않는다)
샌더스: 예수는 유대민족 복권의 신학 전통에서 이해되는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이다.
버튼 맥: 방랑하는 견유학파적 현자, 전복적인 지혜의 교사
엘리자베쓰 쉬쓸러 피오렌자: 예수는 지혜의 예언자, 평등한 제자직
존 도미닉 크로산: 브로커 체제에 대항하여 치유와 개방된 식탁을 통해 철저한 평등주의를 실천한 사회적 혁명가
마커스 보그: 카리스마적 치유자, 성인, 전복적 현자, 사회적 예언자, 이스라엘의 재활성화를 추구하는 운동의 창시자
유대교: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해라”(레 19:2), 예수: “하느님이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워라”(눅 6:36)
리처드 호슬리: 정치적 혁명이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의 사회적 혁명가

2) 예수 세미나
[예수 세미나]는 1985년에 로버트 펑크가 중심이 되어 신약학자 200여 명이 조직한 공동연구 모임으로, 정회원에 속하는 신약학 전공 박사만 76명에 이른다. 이들은 1985년 이후 매년 두 차례씩 나흘 동안 40명 내지 50명이 참석하여 공동 세미나를 개최하여, 새로운 천년기를 앞두고,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들을 종합하기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로 되어있는 모든 기록들을 수집하여, 그 진위를 투표로 평가하여, {5복음서: 예수의 진정한 말씀을 찾아서}(The Five Gospel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ds of Jesus, 1993 –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을 새롭게 번역했기 때문에 이 책은 “학자역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와 {예수의 행적: 예수의 진정한 행적을 찾아서}(The Acts of Jesus: The Search for the Authentic Works of Jesus, 1998)를 출판하여, 전세계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던진 학자 집단이다. 그 충격은 타임지(1996년 4월8일자, pp. 52-60), 뉴스위크지(1996년 4월8일자, pp. 60-70),  유에스 뉴스 & 월드리포트지(1996년 4월8일자, pp. 47-53)에도 잘 소개되어 있다.  최근의 보도(Ministry, 1999, Jan.)에 따르면, [예수 세미나], 특히 크로산과 펑크의 저서들을 통해, 미국 교회 교인들 사이에 “예수 붐”이 일어나고 있어, 목회자들이 이 저서들을 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수 세미나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존 도미닉 크로산 박사의 {예수는 누구인가}는 그가 1991년에 출판한 책으로서 500쪽이 넘는 방대한 저작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의 축소판으로서, 이 책 Historical Jesus는 출판된 지 1년 반만에 4만 부가 팔린 책이었다. 크로산 박사는 1950년 나이 16살에 가톨릭 수도회(세르비떼)에 들어가 1969년 결혼을 위해 사제직을 떠나 드폴 대학교의 교수가 된 후 1995년 그 대학의 명예교수로 은퇴할 때까지, 평생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에만 일생을 바친 학자이다. {예수는 누구인가}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예수에 관해 질문하는 물음들에 대해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그는 특히 예수의 탄생 이야기들이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예수가 세례 요한과는 달리 당시의 민중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선택한 전략들과 그 신학적 이유, 예수가 처형된 이유,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들에게 무덤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었는지, 예수를 매장했다고 기록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이야기가 복음서들마다 서로 다르게 기록된 이유, 부활절에 일어난 일 등을 역사적으로 정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로버트 펑크는 35년간 대학에서 역사적 예수를 가르치다가 몬태나 대학교에서 은퇴한 학자로서, [예수 세미나]를 설립하고 그 세미나의 결론들을 위의 두 책으로 엮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따라서 {예수에게 솔직히}는 그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는, [예수 세미나]에 적극 참여한 75명의 통찰력이 결집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책의 1부 “나사렛으로 되돌아가는 길”에서 어떻게 우상파괴자 예수가 기독교의 성상/우상이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2부 “예수의 복음”과 3부 “복음서들의 예수” 즉
“예수에 관한 복음”을 구별하고 있다. “예수의 복음”은 예수의 비유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내부인”들(제사장, 바리새인들, 즉 경건하고 정결한 종교인들)과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던 “외부인들”(병자들, 죄인들, 불구자들, 즉 율법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이 뒤바뀌게 되는 것, 즉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의 구체적인 예증들이라고 설명한다. 둘째로 “복음서들의 예수”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마케팅”하기 위해 예수의 기적 이야기들, 죽음, 부활, 재림, 출생 이야기들을 어떻게 신화적으로 덧칠하였는지를 하나하나 집어내고 있다. 이 책은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 이상으로 학문적 정직성을 고집한 책이다.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법론 – 학제간 연구
최근에 학자들이 제안한 예수상들은 정치적 혁명가로서의 예수(S. G. F. Brandon, 1967), 주술사로서의 예수(Morton Smith, 1978), 갈릴리의 카리스마적 인물로서의 예수(Geza Vermes, 1981, 1984), 갈릴리의 랍비로서의 예수(Bruce Chilton, 1984), 힐렐 학파 혹은 최초의 바리새파로서의 예수(Harvey Falk, 1985), 에세네파 예수(Harvey Falk, 1985),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E. P. Sanders, 1985)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마커스 보그(Marcus Borg, 1984)의 “종교적 달인””카리스마적 존재로서 병고치는 자””지혜의 스승””사회적 예언자””운동의 촉매자”와 리처드 호슬리(Richard Horsley, 1987)의 예수상도 덧붙일 수 있다. 크로산은 학제간 연구를 통해 이처럼 다양한 예수상들의 혼란을 돌파한다.
(1) 교차문화적이며 통시적인 사회인류학: 接神종교 이론, 질병과 고통, 주술, 식사, 사회계층론, 저항운동이론 등.
(2) 헬레니즘 혹은 그리스-로마의 역사: 브로커체제-지배체제 분석, 노예제 농경사회의 피지배층의 생활, 각종 저항운동,
(3) 예수 전승의 문헌 분석을 통한 미시적 차원: 522개 예수전승의 단락들에 대한 전승층 구분.
(4) 성서와 기독교 전통, 특히 교리의 신화적 언어와 세계관 배후에 놓여있는 체험 탐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관계의 유비 -> 생물학적 유비 -> 형이상학적 유비(보그, {예수의 의미})
(a) 예수는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에 대해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롬 1:4), 마가는 “세례”를 통해서(막1:11), 마태와 누가는 “잉태”를 통해서(마 1:20; 눅 1:32), 요한은 “태초”부터(요 1:1-18)라고 주장한다.
(b)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의 근거가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예수의 “동정녀 출생” “부활/승천”을 고백하게 된 체험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3 최근 역사적 예수 연구의 새로운 강조점들 –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1) 예수의 사회적 세계: 농경사회, 후견인-의뢰인의 착취체제, 절망의 시대, 100년 동안 33회의 농민저항 시대.
이러한 학제간 연구 방법론에 따른 크로산의 분석에 의하면, 예수운동의 핵심은 1세기 로마제국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제국은 정복을 통한 약탈과 대농장을 중심으로 한 노예경제를 바탕으로 전세계의 상업화, 도시화를 추진했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한국어판 서문(2000년)에서 예수가 “로마제국의 세계화, 도시화, 상업화에 맞서서 저항하였다”고 말한다.

(1) “로마의 평화”는 주변부에 대한 폭력과 전쟁을 통한 중심부의 평화였을 뿐 아니라, 내국인들에게도 보복을 은폐하는 신화였다.  우선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1부 “브로커들의 제국”에서, “로마의 평화”가 허구적인 정치적 선전이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이를 위해 크로산은 엘리트층의 문학적 기록이 아니라, 옥시린쿠스 파피루스 속에 나타난 식민지 농민들의 문서, 즉 예수 당시의 예수와 같은 계급이었던 노동자 힐라리온의 편지를 인용하고, 직조공 트리폰의 일대기를 추적하여, 당시의 노동자들의 힘겨운 일생과 무거운 세금, 벌금, 징병제도 등을 분석한다. 이어서 그는 로마제국의 평민들의 고통을 입증하기 위해 [투리아에 대한 추도]에 나타난 일화를 추적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여러 시인들, 즉 버질, 호레이스, 프로퍼티우스, 오비드 등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로마제국의 “보복”과 “공포”를 설명한 다음, 타키투스의 기록에 나타난 브리튼의 장군 칼가쿠스의 로마제국에 대한 평가를 인용하여 로마제국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로마의 평화”라는 허상을 벗긴다. “그들은 약탈, 살육, 강탈을 제국[imperium]이라 부르고, 폐허로 만드는 것을 평화라 부른다.”

(2) 로마제국은 의뢰인-후견인체제로 연결된 친분중심사회로서, 부패와 불평등,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크로산은 토마스 카니(Thomas Carney)의 고대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로마세계가 계급이 아니라 후견인 체제(patronage)에 기초한 사회로서, 사회전체가 의뢰인-후견인의 고리들로 연결된 친분관계의 사회이며, 가부장적 사회로서, 억압과 착취의 사회이며 “부패한 사회”임을 밝힌다. 크로산은 이렇게 된 원인이 로마제국의 경우, 중국처럼 경쟁적인 과거제도나 터키처럼 황실학교와 같은 관리 선발을 위한 공식적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황제의 사적인 친분과 추천에 의해 모든 관리를 임명하여, 사회 전체가 브로커로 연결된 체제였다고 지적한다.  후견인 사회의 도덕적 이데올로기는 “영향력 있는 권력 브로커의 도움을 통해 관직과 이익을 기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후견인과 의뢰인 관계로 이어진 로마 사회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같은 사람들끼리 유유상종하는 족벌주의, 연고주의로 연결된 철저한 불평등 사회였으며, 억압과 착취의 사회였다. 이러한 브로커 관계는 현대의 종속이론에서 제3세계의 엘리트들과 중심부의 엘리트들의 관계처럼, 착취와 억압의 관계였다는 것이다.

(3)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로서, 토지세만 생산물의 2/3에 달했던 극도의 착취구조였다.
예수가 살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사회였다.  크로산은 농경사회의 구조적 특징이 도시의 극소수 지배계급과 농촌의 대부분의 소작농으로 구분되는 계급사회였고, 제조업은 소규모의 수공업 단계에 불과하여 지배계급의 재산 축적은 토지 임대와 세금, 그리고 대부업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분석한다. 그는 먼저 오늘날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하는 당시의 평균수명과 세금제도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전 시기에는 출생하는 아이들의 거의 1/3이 여섯 살이 되기 전에 죽었다. 열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거의 60%가 죽고, 스물 여섯 살이 되었을 때는 75%가, 마흔 여섯 살 때는 90%가 죽었다. 3%만이 예순 살이 되었다”(Carney, 88). 한편 세금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세금으로 뽑아낸 자원들은 대부분행정가들에게 재분배되었는데, 이들은 큰 토지로부터 많은 소득을 벌어들이는 자들이었다. 세금징수는 보통 세원(稅源)을 까먹는 방식이었다. 기껏해야 세원을 보호하는 것이었고, 세원을 개발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으며, 흔히 세원 자체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사실상 그들 이전의 원시사회의 엘리트들이나, 그들 다음의 산업사회의 엘리트들이 차지했던 것보다 더욱 큰 몫을 차지하였다”.
크로산은 이어서 게하르트 렌스키의 농경사회의 아홉 계층 이론을 통해, 당시의 별도의 계급이었던 통치자는 사실상 자기의 세력 범위 안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당한 소유권을 누리고 있었다는 점과, 그 다음의 지배계급은 보통 인구의 1% 정도였지만, 대부분의 농경국가의 국가 수입의 적어도 1/4 정도를 받아, 지배계급과 통치자는 모두 그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신하계급은 대개 인구의 5%로서, 서기관들과 관료들로부터 군인들과 장군들까지 포함하여, 모두 “정치적 엘리트를 위해 봉사”했다고 본다.  상인계급은 상당한 부를 쌓았으며, 몇몇 경우에는 정치권력도 갖고 있었으며, 사제계급은 농경사회에서 마지막 특권층으로서, 예를 들어, B.C.E. 12세기의 이집트에서는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으며, C.E.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전국 토지의 15%를 차지했다고 지적한다. 크로산은 이들 상층계급이 각종 세금을 통해 농민들의 생활필수품조차 빼앗아감으로써 농민들을 철저히 착취하였음을 입증한다.
크로산은 {역사적 예수} 제2부, “브로커 체제와의 싸움”에서 로마제국의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의 반세계화 운동을 유형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주로 요세푸스의 저작들을 비판적으로 주석하는 가운데, 주전 63년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식민지가 된 이후, 주후 66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33 차례의 반로마, 반귀족 농민저항과 반란을 유형별로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무장 폭력투쟁을 벌인 의적들, 하느님의 폭력에 의존한 천년왕국적 예언자들, 자칭 메시아들, 주술사, 혁명가와 반란자들의 저항에 관해 그는 사회적 출신계급과 이념, 전략, 로마의 대응에 관해 자세하게 해명한다. 그는 우선,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 직전의 천년왕국적 기대와 관련하여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그러나 B.C.E. 160년대의 천년왕국적 완성에 대해 치솟았던 비전은 그 이후에 매우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경건한 사람들의 시대는, [희년](Jubilee) 23:27에 그려진 대로, “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모세의 언약](Testament of Moses) 10:1에 약속된, “악마”도 “끝장나지” 않았으며, “슬픔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니엘7:27의 “영원한 나라”는 “가장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권세를 가진 모든 통치자가 그를 섬기며 복종”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에녹 1서 90:33의 동물들의 묵시(Animal Apocalypse)에 극적으로 그려진 것, 즉 모든 양들과 짐승들, 새들이 마침내 하나가 되어 “그들이 모두 순하게 되고 그의 집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주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OTP 2.102; 1.931; 1.71). 그 대신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우선 마카비 형제들이었고, 그 다음에는 로마인들의 지배였다. 그래서 묵시종말적 비전, 천년왕국에 대한 꿈, 그리고 초월적인 희망은 계속해서 새로 기록되었고 다시 읽혀졌다.
유대인들은 이런 절망 속에서도 또 다시 희망을 바라보았다. 참담한 아이러니(irony)는 다니엘 7-12장의 천년왕국적 소망이 천사들을 기다렸으나 결국 하스몬 왕가를 보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시편]도 주님 메시아, 즉 다윗의 아들을 기다렸으나, 그 대신에 나타난 것은
지긋지긋한 헤롯, 즉 안티파터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완전한 세상에 대한 비전들이 인간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아 계속해서 나타나고, 또 다시 패배하고 또 다시 되풀이되는 비전들을 조롱하기보다는 슬퍼하는 것이 옳다. 그 비전들은 완전한 정의에 대한 희망을 계속 살아있게 함으로써 작은 이익들을 수단과 방법으로 성취하고, 전략과 전술들을 서서히 고통 가운데 깨닫도록 만든다.
그 이상적 나라에 대한 희망이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됨으로써 완전히 꺾였으며, 로마제국조차 자신이 그 이상적 나라라고 자칭하고, 유대인들조차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의 [바만 야수트](Bahman Yasht, Eddy 343-349)에 나오는 천년왕국적 비전과 다니엘 2장과 7장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천년왕국적 비전(Collins 1984a:21-26)은 세계의 패권이 네 차례 바뀌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데, 그 둘 모두의 과거 역사에 대한 묵시적 회고는 미래 역사에 대한 예언처럼 꾸며져 있다. 그 페르시아 선지자에게 있어서 네 왕국들은 아시리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구원자 왕 아후라 마즈다와 페르시아 민족이 회복한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유대인 예언자 다니엘에게 있어서는 그 네 왕국들이 바빌로니아, 메대, 페르시아, 그리스 제국들이며, 이 제국들은 다섯 번째 제국, 즉 천군천사들의 주인인 야훼와 유대 민족이 찾은 제국에 의해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의 회복도 아니었고, 유대인들의 회복도 아니었으며,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제국은 자체의 정치적 선전을 위해 그 세계적 패권의 순서를 수정하여 이용했다. 카이우스 벨레이우스 파터쿨루스는 C.E. 30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C.E. 1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유대인 저술가조차도, 비록 마지못해 했을지라도, 로마가 그 다섯 번째 제국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인들에 대항하는 종교정치적 예언 [네번째 시빌의 신탁](The
Fourth Sibylline Oracle)은 아마도 B.C.E. 3세기 초에 비유대인이 기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C.E. 70년에 로마가 성전을 파괴시킨 후, 어느 유대인 저자가 이 신탁을 수정하였다. 네 제국에 대한 원래의 신탁(4.49-101)과 그 후의 묵시종말적 완성(4.173-192) 사이에, 로마의 패권에 대한 묘사가 후대에 삽입되었다(4.102-172)…. 그 다섯번째 왕국은 야훼의 우주적 신정통치와 신실한 유대백성들의 설욕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인들을 대신한 로마인들의 제국이었다.  묵시종말적 심판과 천년왕국적 완성은 또다시 연기되었다.
크로산은 이처럼 묵시종말적 희망이 계속해서 수포로 돌아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농민들이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참고 견디는 계급이지만,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많은 농민저항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당시의 농민들이 로마 총독부와 성전으로부터 얼마나 철저하게
착취당했는지를 반증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기원전 6세기 이래로 팔레스타인 농민들은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계속적으로 받아왔는데, 특별히 로마제국 시대에 그처럼 많이 저항운동을 벌이게 된 이유는 농민들이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천민계층이 되었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 농민들은 거의 5백 년 동안이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 밑에서, 즉 페르시아인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셀류코스 왕조, 그리고 이제는 로마인들 밑에서 그처럼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살아왔다. 그들은 언제나 이중으로 세금을 물어야만 했다. 즉 외국의 제국들에 대해, 또한 성전에 대해 세금을 이중으로 내야만 했다. 또한 언제나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페르시아인들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들이 셀류코스 왕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극심한 종교정치적 도발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 반란은 하스몬 가문의 지휘와 통제를 받았는데, 하스몬 가문은 그들 자신의 지배계급에 속하였던 제사장 가문으로서 귀족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로마인들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제까지의 저항들과는 매우 다르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하다. 특히 피터 브런트(Peter Brunt)의 표현처럼, “66년의 반란은 이방인 지배자들에 대항한 것만큼이나 동족(同族) 가운데 지주들과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항한 것”(149)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간의 사회 및 정치 윤리의식을 갖고, 유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인들이 제국주의자들이었으며, 무자비하게 세금을 부과했고, 생존 차원에 머물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식된 박탈감이 있기 위해서는 농민들이 정상적인 빈곤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져, 핍절(乏絶)과 극빈 상태로 떨어졌음에 틀림없다.  렌스키의 사회 계층화 이론에 따르자면, 농민계급의 수많은 사람들이 불결하고 비천하며 소모적인 계급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크로산은 이어서, “로마제국 치하에서 과연 정확히 무엇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농민계급을 ‘정상적인’ 생존의 차원 이하로 떨어뜨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인식된 박탈감, 그리고 감소로 인한 박탈감에 빠트려, 결국 대대적인 농민 반란을 일으키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라고 묻고,  마틴 굿맨, 메이건 브로쉬, 빅터 체리코버 등의 저술을 통해, 그 원인이 부채에 있었음을 지적한다.
우선, 메이건 브로쉬(Magen Broshi)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는 헤롯 왕 당시의 팔레스타인에서는, [헤롯왕이 벌인] 사업들 가운데 적어도 20개의 사업들은 그 규모에 있어서 당시 세계적인 기록을 세운 것들이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그 나라가 전례 없이 번성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상당한 잉여생산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도 분명하다”(31). 그러나 마틴 굿맨이 지적하였듯이, 비록 “그 효과가 유익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실제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부자들뿐이었으며,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무엇을 할지 몰랐던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결국 이득도 없었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고통을 겪었다.  유대의 경제는 투자한 자본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충분한 사업이 없었으며, 부유한 귀족들이 새로운 제조업이나 장거리 무역에 돈을 투자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대신에 그들은 재산을 토지나 대부(貸付)에 투자했다”(1982:419-421). 부자들이 재산을 토지에 투자함으로써 결국 농민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일일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정말로 악했던 것은 대부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크로산은 여기서 로마제국 당시 부자들의 대부업을 통한 농민들의 부채문제가 율법 조항, 즉 동족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조항(출 22:25; 신 23:20)과 안식년이 되면 모든 부채를 면제시켜야 한다는 조항(신15:1-8)을 어떻게 회피하였는지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첫째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금지조항이 있었다(출22:25; 신 23:20). 물론 사람들이 이 조항을 무시할 수는 있었지만, 율법을 준수하고 싶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도 여전히 상당한 투자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실제로 빅터 체리코버(Victor Tcherikover)가 지적했듯이, “무이자(無利子) 대출, 특히 옥수수에 대한 무이자 대출은 성서의 율법보다 오래된 것이며, 이런 대출은 고대 근동지방의 많은 농경민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무이자 대출은 때때로 이자를 갚는 대출보다 채무자에게 더욱 무거운 짐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이자 대출이 대개 단기간의 대출이며, 그 약정한 기간 내에 갚지 못할 경우에는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Tcherikover et al. 1.35-36). 다시 말해서, 채권자는 채무자로부터 이자를 받는 것보다 단기간에 갚지 못할 경우 무거운 벌금을 물림으로써 더욱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제1장에서 사래우스가 트리폰에게 예탁-대출을 얻었던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마틴 굿맨은 팔레스타인에서의 그러한 무이자 예탁-대출에 관해 말하면서, “만일 채무자가 정해진 기간 내에 대출금을 상환하면, 채권자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대신에 고마워하는 친구를 얻는다. 그러나 정해진 기간이 지나서 상환할 경우에는, 흔히 그럴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지만,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에 나타난 벌금은 20%의 이자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족 유대인으로부터 이자를 받지 못한다는 성서적 조항은 매우 쉽게, 또한 매우 큰 이익을 남기는 것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두 번째 난관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서, 그 해결책은 더욱 중요하였다. 신명기 15:1-8에 따르면, 유대인들 사이의 모든 빚은 일곱째 해(안식년)가 되면 면제시키도록 되어 있으며, 15:9-11은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채권자가 대출을 거부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다가올수록 채권자들은 돈을 빌려주기를 더욱 꺼려하였기 때문에, 돈을 빌리려는 사람은 더욱 돈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해결책은 차압 동의서(prosbul)였는데, 이것은 심지어 일곱째 해 동안에도 아직 갚지 않은 대출금을 법정으로 하여금 상환받도록 허락하는 문서였다. 그들은 성서의 율법이 일곱째 해에 개인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있지만, 법정이 상환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해결책을 처음 도입 것이 위대한 랍비 힐렐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그는 B.C.E. 1세기 중엽부터 C.E. 1세기의 첫 10년대까지 살았던 인물이었다.  이에 대해 마틴 굿맨은 “힐렐이 실제로 차압 동의서를 만든 것과 관련이 있던, 아니면 없던 간에, 유대 광야에서 발견된 문서는  이런 제도가 네로 황제 초기에, 아마도 법정의 지지를 받아, 이용되었음을 보여준다”(1982:422)고 말했다.
그러나 일곱째 해가 임박하게 되면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는 문제는 힐렐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는데, 왜 이 문제가 그에 “의해” 해결되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의 시대에 해결되었는가? 만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빌리고 싶지만 빌리지 못한다면, 이것은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부자들이 돈을 빌려주고 싶지만 빌려주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그들의 문제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차압 동의서 제도가 시행되는 것을 원했던 것은 부자들이었으며, 그들이 이런 제도를 원했던 것은 정확히 그들이 대부업에 투자할 만큼 과잉 재산이 많았던 때였다. 가난한 사람들 역시 일곱째 해가 다가와도 돈을 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지만, 그 법이 바뀐 것은 부자들이 그런 제도를 더욱 원하게 되었던 때였다. 즉 C.E. 1세기가 시작되기 전후에 힐렐이 이런 제도를 주창했던 아니했던 간에, 부자들로서도 이런 제도가 절실했기 때문에, 법이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예수 당시의 가장 큰 사회적 모순이며 “유대 사회가 속속들이 ?게 된 것은 팍스 로마나(Pax Romana) 동안에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 유입된 과잉 재산이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 즉 극심한 빈부격차로서, 부자들의 막대한 잉여재산을 통한 대부업의 결과로 농민들이 부채에 허덕이게 되어, 결국 농민들이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며, 유대-로마 전쟁 초기에 “요세푸스가 인솔했던 의적 군대와 그를 지원했던 그 지방의 농민들은 그 지방의 수도들이었던 셉포리스나 티베리아스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 도시들에는 세금에 대한 사정(査定)과 빚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2) 비정치적 예수상에서 정치적 예수상으로 200년 전에 이미 라이마루스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메시지가 “이 세상의 나라”로서 로마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된 것이며, 예수의 처형도 성공적인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기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했지만, 지난 200년 동안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수가 정치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이라는 말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여,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권력을 장악하려 하거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를 비정치적 인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둘째로는,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 즉 이 세상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행동에 의해 곧 끝나고 마지막 심판이 올 것을 예상하였던 인물로 간주하여, 예수는 사회적 혹은 정치적 물음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셋째로는 현대 신약학이 개인주의적 입장을 견지하여, 예수가 개인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였지, 구체적인 사회 정치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오늘날 예수를 그리스적인 견유철학자 전통에 서서 개인의 생활방식에 관해 말한 현인으로서 간주하는 입장도 이런 개인주의적 이해의 연장이다.
넷째로, 현대 신약학자들이 주로 유럽과 북미의 백인 남성 중산층 출신으로서 교회와 관련된 기관에서 교수직에 있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로 인해, 예수의 메시지가 정치적으로 체제전복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아래로부터의” 시각, 학자들의 현장이 신학대학에서 일반대학으로 바뀌었다는 점, 그리고 학제간 연구와 교차문화적 관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예수의 사회적 세계에 대한 종합적 분석이 가능하게 되어, 예수 전승을 재조명하게 된 결과, 오늘날 예수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 인물, 즉 사회적 생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적 사회적 비전을 제시한 “정치적”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3) 묵시종말론적 예언자에서 사회적 혁명가, 체제전복적 지혜의 스승 (자생적 견유철학자)으로 요하네스 바이스-알버트 슈바이처-루돌프 불트만 이후의 묵시종말론적 합의가 1980년에 와해되었다. 묵시종말적 예언자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오실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말씀들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이 아니라, 재림을 기다린 초대교회의 고백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1) 금식하는 세례요한(fasting John)과 잔치하는 예수(feasting Jesus)의 전략적 차이: 현재적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크로산은 결론적으로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였으며, 그의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공동식사 전략은 당시의 착취체제의 심장을 겨냥한 계산된 전략이었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예수는 유대인 농민 견유철학자(a peasant Jewish Cynic)였다. 그의 농촌 마을은, 견유철학을 볼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알고 있었던 셉포리스와 같은 그리스-로마 도시와 충분히 가까웠다. 그러나 그의 사역은 저지대 갈릴리의 농촌 마을들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전략은 그 자신에게 암묵적이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명시적이었던 전략으로서,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free healing and common eating)를 결합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권력과 로마의 권력의 위계적이며 후견인 체제를 당연시하던 것을 단번에 부정한 종교적 및 경제적 평등주의의 전략이었다. 예수 자신이 단순히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브로커로 해석되지 않도록, 그는 항상 옮겨다녔으며, 나자렛이나 가버나움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커도 아니었고 중보자도 아니었으며, 역설적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혹은 인간들 사이에 아무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포한 사람이었다. 기적과 비유, 치유와 식사는 개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며, 사람들 서로 간에도 아무런 중개자 없이 육체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접촉하도록 만들기 위해 계산된 전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하였다.
(2) 하나님 나라: 브로커 없는 나라, 성가신 자들과 천민들의 나라 크로산은 예수의 사회적 비전이었던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를 해명하기 위해 우선 ‘가난한 사람’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이’의 당시 용법을 추적하여, 하느님 나라가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였음을 밝힌다. 하느님 나라는 천민들의 나라였다는 말이다.
예수는 충격적인 역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Poor)에 관해서 말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의 하느님 나라(Kingdom of the Destitute)에 관해 말했다. 이런 사실은 루가 6:20과 마태오 5:3 모두의 배후에 있는 말씀복음 Q의 그리스어에 매우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그 구절들에서 복이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페네테스, 즉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프토코이, 즉 극빈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선포한 팔복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극빈자들, 가난이 아니라 거지 신세에 대한 것이다.  예수는 농민들이나 장인 계급의 하느님 나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자들, 천민들, 소모계층의 하느님 나라를 말했던 것이다.
크로산은 또한 겨자씨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누룩의 비유, 진주의 비유 등을 들어 하느님 나라가 성가신 자들의 나라임을 규명한다.
이 비유의 요점은 겨자 식물이 속담처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해서 1 미터 정도의 작은 관목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큰 나무가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겨자는 원치 않는 장소에 퍼져나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특별히 원치 않는 경작지에 새들이 꼬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와 같다고 예수는 말했던 것이다. 즉 하느님 나라는 레바논의 거대한 백향목과 같은 것이 아니며, 일반적인 잡초와 같은 것도 아니라, 얼얼한 맛을 지니고 있으며 경작지를 망쳐놓을 위험성이 있는 겨자 식물과 같다는 말이다. 즉 그 나라는 단지 조금만 원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면, 주의 깊게 통제된 적은 분량만을 원하는 그런 것이라는 말이다.

(3) 성전의 상징적 파괴
예수 주변에 병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은 사회구조적 이유 때문이었다. 즉 대다수 소작농들이 입에 풀칠도 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림으로써 병에 걸리게 된 것이지만, 제사장들은 개인적인 죄, 혹은 부모의 죄 때문에 병에 걸린 것으로 가르치고, 병이 나을 경우 그 몸이 깨끗해진 것을 제사장이 선언하도록 함으로써, 또다시 제물을 바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처럼 브로커 노릇을 통해 이득을 보는 성전과 자비심을 상실한 제사장들은 근엄한 얼굴로 벼룩이 간마저 빼먹는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행하였기 때문에 예수는 성전을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고 본다. 크로산은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서 기자가 예수의 성전 사건을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와 연결시킨 점이라고 논증한다.  그 대답은 마르코 11:15-19에 있는데, 이 구절은 흔히 성전 정화라고 잘못 불려지고 있다. 그것은 결코 정화가 아니라, 오히려 상징적 파괴이다.  소용없는 무화과나무가 파괴된 것과 마찬가지로, 소용없는 성전도 상징적으로 파괴되었다…. 그 행동은 물론 성전을 물리적으로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고의적인 상징적 공격이다. 그 행동은 성전의 재정적, 희생제사적, 예배적 기능을 “중단”시킴으로써 성전을 “파괴시킨” 것이다.

III.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와 목회적 의미

한국사회는 거의 한 세기 동안의 “組暴 국가”에서 벗어나, 정치 경제는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종교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비합리성, 비민주성, 배타성, 수동성, 레드 콤플렉스의 온상”으로 지탄받고 있다(박노자, 최상천, 김진호). 또한 교회는 타계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며, 특히 연고주의가 한국사회의 부정부패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상황에서, 교회 역시 지역교회의 계층화로 인해 사회적 연고주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교회의 합리성, 민주성, 개방성, 능동성을 위해 공헌할 수 있으며, 연고주의 극복 가능성의 길을 열어준다.

(1) 성경을 사용한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는 아니다(예: 몰몬교. 통일교). 기독교는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역사적 인물에 기초해 있다. 그러나 현대 이후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그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고 주장했다(루돌프 불트만).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지성인들의 정직한 물음들을 불신앙의 소산이라고 간단히 치부해왔던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종교적 무지의 해결자가 아니라, 종교적 무지의 원천이 되어왔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서들은 역사학, 문화인류학, 본문비평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정직하게 예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종합적으로 알 수 있게 된 시대는 없었으며,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세미나]의 공동작업의 결과 때문이다. 최근의 예수 연구는 기독교의 뿌리를 역사적 예수 위에 바로 세우게 한다.

(2) 최근에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젊은층과 고학력자들이 교회를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부도덕함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가르치는 내용들, 즉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 부활, 재림,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등, 기독교의 핵심적 가르침들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넌센스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이런 전통적 교리들에 파묻혀 있던 예수를 발굴하여, 인간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특히 이런 전통적 교리들의 신화적 언어들과 세계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예수의 모습 위에 덧칠되었는지를 상세하게 밝혀준다는 의미에서, 전근대적 비합리성을 극복하고 교회의 합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3)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왔다. 이것은 예수가 보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바라본 결과이며, 예수가 믿으라고 한 것 대신에 예수 자신을 믿은 결과였다. 크로산과 펑크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손가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가 보라고 가리킨 것(하나님 나라)을 보라고 말한다. 예수를 기독교의 교리로부터 해방시켜야만 비로소 진정한 인간 예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다. 또한 예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수동태로 되어 있어 우리의 신앙도 수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니이체의 지적대로 교회가 비주체적이며 수동적인 노예의지를 가진 자들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버린 원인이 바울의 구원자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교회는 이제까지의 그리스도 신화를 믿은 것에서부터 예수의 실천(제자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처럼 살 수도 없고, 살 필요도 없다”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구체적 길을 제시한다.

(4) 예수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 개입을 믿고 기다렸던 묵시적 종말론자로 이해되어 왔다. 슈바이처 이후 최근의 샌더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한국의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이르기까지, 예수가 세상의 종말을 가르치고 그 종말을 믿고 준비하도록 가르쳤으나, 그 종말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예수의 종말론 믿음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슈바이처). 그러나 크로산과 펑크, 보그는 모두 예수의 진정한 말씀들을 분석한 것을 토대로, 예수가 종말론자가 아니라, 사회적 혁명가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개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인간의 역사참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 예수의 믿음이었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의 수동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인 능동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5)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가 “수퍼맨”처럼, 외계로부터 이 지구에 기적적으로 출생하여 활동하다가 죽은 후에 다시 외계로 돌아간 “외부적 구원자”일 경우, 그런 외부적 구원자를 믿는 사람들은 의존적이며 수동적이 되는 반면에, “내부적 구원자”일 경우에는 그를 믿는 사람들이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신자들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펑크는 소위 “예수의 보혈에 의한 代贖的 구원의 교리”({잃어버린 복음서}를 쓴 버튼 맥 교수에 따르면, 대속의 교리는 히브리 전통에서는 저주였으며, 그리스 전통에서만 군인들이 도시국가를 ‘위해’, 즉 “남을 위해 대신 죽었다”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를 폐기하고, 묵시종말론적 요소들도 모두 제거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기초가 된다.

(6) 예수는 당시 끼리끼리 노는 브로커 사회에서, 그 브로커 체제의 심장을 겨냥하여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실천했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병자들과 천민들을 품어 안았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연고주의를 타파할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예수는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았으며, 특히 많은 무리들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의 핵심적 동사(“들어””축사하고””떼어””나누어주었다”)는 예수가 주인과 하인의 일, 남성과 여성의 일을 모두 했음을 보여준다.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오늘날 매우 배타적인 집단인 기독교, 특히 개신교도들에게 더욱 겸손하게 관용을 배울 것을 요구한다. 즉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매도하고, 불상이나 단군신상을 파괴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가르친 대로 기독교인들이 “내부인들”이라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되지 못할 “꼴찌”들이 될 운명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계도처의 분쟁을 통해 드러나고 있듯이, 종교가 인류의 화합과 평화의 요소라기보다는 여전히 전쟁과 증오의 원인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특히 북한의 기아현실과 남한의 고실업과 고용불안 사회 속에서, 크로산과 펑크의 책은 한국교회가 예수의 정신을 몸으로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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